통일시대

vol 115 | 2016.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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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쿠바 화해의 의미

쿠바의 개방 보며 북한의
개방 기대하기 어려워

3월 21일 쿠바의 수도인 하바나의 혁명궁전에서 정상회담을 한 뒤 합동 기자회견장에 나란히 선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미국 대통령이 쿠바를 방문한 것은 86년 만이고 양국은 54년 만에 국교를 회복했다.<사진> 3월 21일 쿠바의 수도인 하바나의 혁명궁전에서 정상회담을 한 뒤 합동 기자회견장에 나란히 선 오바마 미국 대통령과 라울 카스트로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 미국 대통령이 쿠바를 방문한 것은 86년 만이고 양국은 54년 만에 국교를 회복했다.

‘젖은 발이든 마른 발이든 다 받아들인다’는 미국의 ‘Wet Feet Dry Feet Policy’는 쿠바의 개방에 영향을 끼쳤다. 북한을 개방으로 유도하려면 더욱 강력한 제재가 필요하다.


국제사회에는 라이벌이나 앙숙인 나라들은 많으나 미국과 쿠바처럼 60여 년 가까이 적대적인 관계를 유지했던 국가도 흔치 않을 것이다. 쿠바는 1898년 미국·스페인 전쟁에서 미국이 승리해 스페인에서 독립했으나, 사실상 미국의 반(半)식민지가 되었다.

1959년 쿠바혁명 이후 양국 관계는 급속히 악화됐고, 1961년 1월에는 외교관계가 단절됐다. 그리고 1961년 4월 미국 중앙정보국(CIA)에 의해 훈련된 망명 쿠바인들의 피그스만 침공 사건과 1962년 10월 쿠바 미사일 위기로 양국 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돼버렸다. 미국은 교역과 금융 거래를 금지하고 미국 내 쿠바 자산을 동결하는 대(對)쿠바 경제 제재를 시작했다.

1992년에는 ‘쿠바 민주화 법(일명 토리첼리법)’, 1996년에는 ‘쿠바 자유민주주의 연대법(일명 헬름스-버튼 법)’을 만들어 그 강도를 높였다. ‘쿠바 민주화 법’은 미국 해외 자회사들의 대쿠바 교역을 금지하는 것이었고, ‘쿠바 자유민주주의 연대법’은 쿠바의 민주주의 관련 조건이 충족되기 전까지 미국 행정부는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 자체를 해제할 수 없도록 규정한 것이 특징이었다. 그에 앞서 1982년 미국은 쿠바를 테러 지원국으로 지정한 바 있다.

이렇게 적대적이었던 양국 관계가 최근 정상화되고 있다. 2014년 12월 14일 양국 정상이 관계 정상화 추진을 선언한 것은 국제사회를 깜짝 놀라게 했다. 프란시스코 교황이 막후에서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양국은 관계 정상화를 위한 교섭을 진행해 미국은 쿠바를 테러 지원국에서 해제하고 쿠바에 대한 경제 제재를 완화했다. 그리고 2015년 7월 20일 단교 54년 만에 국교를 복원해 대사관을 재개설했다.

지난 3월 20일부터 22일까지 오바마 대통령은 현직 미국 대통령으로서는 88년 만에 쿠바를 공식 방문했다. 양국 간 화해와 교류협력을 증진하는 역사적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양국 사이엔 쿠바 내 인권 개선, 미국의 경제 제재 완전 해제, 관타나모 기지 반환 같은 관계 정상화를 위해 넘어야 할 산이 있으나 화해의 흐름은 거스를 수 없는 대세로 보인다.

라틴아메리카의 베를린 장벽 붕괴

이 관계 정상화는 라틴아메리카에서 냉전을 종식시켰다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 무히카 우루과이 대통령은 양국 관계 정상화를 “라틴아메리카의 베를린 장벽 붕괴”라고 비유했다. 미국은 라틴아메리카 국가들이 미국을 배제한 독자적 연합을 만들려 하고 중국이 적극적으로 이 지역에 진출해 라틴아메리카에서 수세에 몰렸는데, 쿠바와의 관계 정상화로 위상을 회복하는 계기를 마련한 것이다. 쿠바는 미국의 오랜 압력에 굴복하지 않았다는 자존심을 지키면서, 개방을 통해 경제 회복을 이룰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는 성과를 거둔 것으로 보인다.

미국·쿠바 화해가 우리의 대북한 정책에 주는 시사점은 무엇일까? 오바마 대통령이 대쿠바 봉쇄정책의 실패를 사실상 인정하고, 새로운 해법을 모색하기 위해 쿠바와 관계 개선을 추진했다는 분석이 많다.

미국의 대쿠바 제재가 쿠바의 인권과 민주주의 발전이라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제 제재로 쿠바의 경제난이 가중돼 라울 카스트로 의장이 점진적인 개혁·개방을 추진하고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를 추진한 것이 복교(復交)의 결정적인 요인이 됐음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쿠바는 냉전시대 구소련의 지원과 2000년대 베네수엘라 우고 차베스 전 대통령의 지원으로 근근이 버텨왔으나, 이것이 사라진 현재로서는 미국과의 관계 개선이 체제 유지와 생존을 위한 유일한 방법일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쿠바도 1990년대 공산권의 붕괴 후 북한의 ‘고난의 행군’ 같은 시절을 겪었다. ‘특별시기’라 불리는 그 시절을 쿠바는 “모든 것을 자체 해결하자”는 구호로 극복하려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한국에서 쿠바의 유기농이 유명하다고 알려졌으나 사실은 비료가 없어 어쩔 수 없이 유기농을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가난에 지친 쿠바인들은 목숨을 걸고 미국으로 탈출했다. 올리버 스톤 각본, 알 파치노 주연의 영화 ‘스카 페이스’에서 잘 다뤄졌듯이 1980년 6개월간 무려 12만5000명의 쿠바인이 대량 탈출한 마리엘 긴급 해상수송사건은 너무나 유명하다. 1990년대 이후에는 뗏목을 탄 수만 명의 쿠바인들이 미국으로 탈출을 감행했고, 미국은 ‘젖은 발이든 마른 발이든 미국 영토에 들어오면 수용’하는 정책(Wet Feet Dry Feet Policy)을 취해왔다.

미국과 쿠바의 화해가 미·북 및 남북관계에 미치는 영향은 거의 없다고 볼 수 있다. 오바마 대통령이 이란에 이어 쿠바와도 화해를 이루자 미·북관계 개선에 대한 일부 기대감이 일었으나 핵개발에 집착하는 북한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북한이 쿠바와 같은 인식을 가지고 한국, 미국과 화해를 추진할 가능성도 없어 보인다. 이란이 미국과 화해를 한 것도 국제사회의 강력한 제재가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지금은 북한에 대해서도 핵개발을 포기하도록 더욱 강력한 제재를 할 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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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조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국제교육협력관
한국외국어대 영어과 졸업. 제17회 외무고시 합격. 경수로기획단 파견, 주칠레대사관 공사참사관, 외교부 중남미국 심의관, 국회 외교통상통일위원회 파견국장, 주코스타리카대사 등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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