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4년 7월 23일 일본 군대의 ‘경복궁 침입사건’ 이후 일본은 자국에 유리한 갑오내각을 조직하면서 갑오개혁을 추진했다. 일본은 1894년 6월 청(淸)과의 대치 국면에서 조선의 농민반란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내정 개혁이 필요하며 일청 양국의 공동간섭론을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청과의 전쟁 준비를 서둘렀다. 일본군을 지속적으로 파병해 1만 명의 병사와 9척의 병선을 인천에서 서울까지 배치했으며, 요충지에 행영(行營)과 포대를 구축해 전쟁 발발에 대비했다.
일본은 일청 양국의 공동간섭론이 실현되지 못하자 독자적으로 조선 정부에 내정 개혁을 강요했다. 1894년 6월 30일 주한 일본공사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는 외무독판 조병직과 면담하면서 조선의 독립과 속방 문제를 꺼냈다. 이는 사실상 조선의 내정 개혁을 강요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조선 정부의 교체를 요구하거나 전쟁 발발에 협조할 수 있는 정권을 설립하려는 것이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자주국이라는 원칙을 강조하면서 일본의 간섭을 가능한 한 배제하려 했다. 그러나 1894년 7월 3일 오토리 일본공사는 두 번째 제안으로 내정 개혁 방안의 세목을 마련하고 구체적인 개혁 안건을 강요했다. 오토리 일본공사는 7월 19일 조선 정부에 최후통첩을 보냈다. 일본은 우선 서울~부산 간 전신선 가설에 착수했으며, 병영을 설치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리고 조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과 중강통상장정(中江通商章程) 및 길림통상장정을 폐기하라고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일본 군대의 경복궁 침입
1894년 7월 23일, 그날의 상황은 이랬다. 일본군은 23일 새벽 용산에 있던 1000명의 병력을 경복궁으로 진군시켰다. 일본은 ‘그쪽에서 먼저 발포’해서 이에 맞서 싸워, 일본 군대가 조선 군대를 물리치고 성문을 열고 진입했다고 주장했다.
서대문 밖 아현에 주둔한 일본군 보병 21연대 제2대대는 소좌 야마구치 게이조의 지휘 아래 23일 새벽 3시 30분 행동을 개시했다. 2대대는 서대문을 거쳐 경복궁 서쪽 영추문으로 향했다. 일본군은 영추문에 도착해 공병소대를 통해서 다이너마이트로 대문을 파괴하려고 시도했다. 하지만 대문이 견고해 폭파는 실패했다. 다급해진 일본 군대는 도끼로 대문을 파괴하려 했지만 또다시 실패했다. 결국 일본 군대는 긴 장대를 벽 꼭대기에 걸치고 벽을 넘어갔다. 새벽 5시경 안과 밖에서 톱으로 빗장을 절단하고, 도끼로 대문을 부수고 겨우 영추문을 열 수 있었다.
영추문 진입 후 제2대대 7중대는 함성을 지르며 곧바로 광화문으로 나아가 수비하는 조선 병사를 쫓아내고 광화문을 열었다. 그다음 동쪽 건춘문으로 나아가 안에서 문을 열었다. 건춘문을 통해 들어온 제2대대 6중대는 북쪽 춘생문, 신무문 등으로 진격했다.
춘생문으로 향하던 6중대가 대궐 북부 외곽에 이르자 북쪽 소나무 숲에서 조선군이 사격을 개시했다. 북쪽에서 격렬한 총성이 벌어지자 5중대도 즉시 건춘문에서 성벽 안쪽을 따라 북진했다. 5중대가 지원하자 처음에 6중대에 맞서 저항하던 조선군은 북쪽 대궐 성벽을 넘어 북한산 방향으로 도피했다. 오전 7시 반경 양쪽의 총격이 멈췄다.
전투가 시작되자 고종과 명성황후는 경복궁 옹화문 안 함화당에 있었다. 7칸 건물로 팔작지붕 형태였던 함화당은 외국 사신을 접견하는 장소였다. 이때 외무독판 조병직은 오토리 공사와의 대화를 요청해 옹화문 안에서 회담을 진행했다. 그런데 대대장 야마구치는 옹화문 안에 있던 조선 병사의 무장을 해제시키고 오전 9시경 옹화문 주위에 일본 초병을 배치해 경계하게 했다.
어쩔 수 없이 고종은 1894년 함화당에서 총리대신과 궁내부대신, 각 아문 대신을 접견하고 갑오개혁을 발표했다. 일본은 1894년 7월 23일 경복궁을 강제 점령함으로써 조선의 정국을 전환시켰다. 일본은 조선 정부를 붕괴시키고 청일전쟁에 협조할 수 있는 친일 정권을 탄생시켰다.
사실 1894년 일본의 경복궁 점령사건을 실제로 지시한 인물은 일본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였다. 주한 일본공사 오토리는 일본에 일시적으로 귀국했다가 1894년 6월 다시 한국에 귀임했는데, 그때 무쓰는 “시국이 급박해 본국 정부의 훈령을 받을 여유가 없게 되면 공사의 재량으로 임기처분하라”는 훈령을 귀국하는 오토리 공사에게 내렸다. 그 후 일본이 청국과의 중재에 실패하자 무쓰는 1894년 7월 12일 “지금 시점에서는 단연한 조치를 취할 필요가 있는데 어떤 구실을 찾아서라도 실제적인 조치를 취하라”는 훈령을 오토리 공사에게 직접 보냈다.
갑오개혁 후 만들어진 신식 재판정 풍경(왼쪽). 갑오개혁 후 신식 군인 복장.
대원군 은퇴와 군국기무처
일본 군대의 경복궁 침입 당시 대원군은 주한 일본공사 오토리와 함께 참여했다. 사건 직후 고종은 대원군에게 모든 서무와 육군 및 해군의 사무를 전결할 수 있는 권한을 위임했다. 그런데 오토리의 후임 주한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조선과 일본의 중요한 외교 사건에 깊숙이 관여해 조선 문제에 정통한 인물이었다.
청일전쟁 이후 조선의 보호국화 문제가 초미의 관심사로 등장하자 그는 1894년 10월 28일 조선에 특명전권공사로 파견돼 조선 내정에 개입했다. 1894년 11월 이노우에는 군국기무처의 개혁정책을 반대하는 대원군을 정계에서 강제로 은퇴시켰다. 1895년 6월 일본 정부는 이노우에 공사에게 귀국을 명령했고, 이노우에는 자신의 후임으로 육군 중장 미우라 고로를 공사로 추천했다.
군국기무처의 설립은 경복궁 점령을 통한 일본의 개입이라는 사실과 매우 긴밀한 관계를 갖고 있다. 1894년 7월 26일 새로이 군국기무처의 처소가 정해지면서 총재에 김홍집이 임명됐다. 군국기무처는 국정 전반에 걸쳐 개혁을 수행하는 기구였다. 중앙의 행정·사법기구를 비롯해 국정 개혁 및 식산흥업 등 모든 군국 사무를 담당하는 의결 기구로 활동했다. 군국기무처의 회의는 회의원 반수 이상이 참가하였을 때 개회할 수 있었으며, 토의 사항은 가부의 다수에 따라 결정하는 다수결의 방식을 따랐다. 결정된 안건은 왕의 비준을 받아 집행하는 방식을 따랐다.
일본 군대의 경복궁 침입사건 이후 고종은 일본의 감시를 받으면서 신변 불안에 시달렸다. 최고 권력자 고종은 정신적으로 엄청난 충격을 받았고, 그 상처는 고종의 심야 집무와 연결됐다. 일본인들의 활동을 궁궐에서 감시하기 위해, 고종은 서울 주재 러시아공사 베베르, 미국공사 존 실, 미국인 고문관 클레어런스 그레이트하우스의 조언에 따라 외국인을 경복궁에 상주시켰다. 다름 아닌 미국인 군사고문 윌리엄 다이 장군과 닌스테드 대령, 러시아 건축가 세레진 사바친 등이었다. 그중 사바친은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의 현장을 목격한 유일한 외국인이 됐다.
일본군이 경복궁에 난입하는 모습을 그린 일본의 원색 판화첩.
경복궁 침입사건과 을미사변
그런데 1894년 7월 23일 일본 군대의 경복궁 침입사건은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의 전개 과정과 매우 유사했다. 두 사건 모두 주재국의 급박한 상황에서 주한 일본공사에게 판단의 재량이 주어졌다. 또한 주한 일본공사가 정변에 개입할 명분을 찾으면서 적극적으로 정변을 주도하고 일본 군대를 동원했다. 그리고 두 사건 모두 일본공사관 서기관 스기무라가 정변을 위한 세부적인 계획을 작성했고, 일본 육군대위 출신 오카모토가 대원군을 설득해 입궐시키는 임무를 담당했다. 두 사건의 구상과 인물이 모두 외무대신 무쓰의 위기 대응 시나리오에서 비롯됐다.
근대 이후 일본은 정권의 취약한 정통성을 보완하고 국내의 불만 여론을 무마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이웃나라들과의 갈등을 조장하는 형태를 보여주었다. 일본은 국제 정세가 긴장 구도이고, 한국의 자주독립이 취약하면 언제든지 한국을 침략했다. 우리가 1894년 7월 23일 경복궁 침입사건, 1895년 10월 8일 을미사변 등의 참혹한 역사를 똑똑히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김 영 수
동북아역사재단 독도동해연구실장
성균관대 사학과 석사, 모스크바국립대 역사학 박사. 동북아역사재단 연구위원,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교수 역임. 동북아역사재단 학술상 수상, 저서 <미쩰의 시기 : 을미사변과 아관파천>, <명성황후 최후의 날>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