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여 년 동안 진보정부 10년, 보수정부 9년을 거치면서 통일정책도 시계추와 같이 진보에서 보수를 오갔다. 구체적 정책 내용이나 실행 과정에서는 차이가 있더라도 크게 보면 김대중 정부의 대북 화해·협력정책과 노무현 정부의 평화·번영정책은 통일정책의 철학, 목표, 수단 등의 측면에서 대북 포용정책의 패러다임을 공유했다.
반면 이명박 정부의 상생·공영정책(비핵·개방·3000 구상)과 박근혜 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 및 통일준비론은 레토릭과 내용에서 차이가 있지만 크게 보면 압박정책의 패러다임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단순화의 위험이 있기는 하지만, 큰 틀에서 두 패러다임을 다음과 같은 기준에 입각해 비교할 수 있다.
첫 번째 기준은 통일정책의 목표다. 분단 이후 역대 정부는 분단 상황을 평화적으로 관리하고 평화 공존을 지향하는 데 초점을 둘 것인가, 아니면 최종 목표인 통일에 초점을 둘 것인가 하는 문제를 놓고 차이를 보여왔다. 또한 통일의 최종 형태를 사실상의 통일(De Facto Unification)로 설정할 것인가, 아니면 법적, 제도적 통일로 설정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차이가 있었다.
시계추처럼 오간 대북 통일정책
김대중 정부와 노무현 정부는 평화 공존에 우선순위를 두고 평화 정착과 교류협력의 제도화를 통해 사실상의 통일을 지향했다. 반면 이명박 정부와 박근혜 정부는 분단 관리나 통일 과정보다 최종 목표인 법적, 제도적 통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통일 미래상 제시, 통일 준비에 역점을 두었다.
둘째, 북한에 대한 인식이다. 북한을 어떤 상대로 인식하느냐는 통일정책에 대한 차이를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다. 진보정부는 북한 체제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교류협력의 대상으로 인식한 토대 위에서 가능한 한 대화와 협력을 모색하고자 했다. 물론 진보정부도 북한 체제의 변화를 통일정책의 궁극적 목표로 설정했지만, 평화 정착과 협력을 위해 우선 북한 체제를 인정하는 것이 불가피하다고 전제했다.
반면, 보수정부는 북한 체제를 인정하지 않고 북한 체제의 변화를 통일정책의 우선 과제로 설정했다. 북한 체제의 변화는 북한의 대남 적대정책의 변화, 북한의 합의 준수, 북한 정권 차원의 변화 등을 포괄하는 개념이었다. 또한 보수정부는 북한을 기본적으로 경계 대상이자 적대 대상으로 인식하고 긴장의 끈을 놓지 않았다.
세 번째 비교 기준은 정경 연계의 여부다. 특히 북핵 문제가 남북관계의 핵심 변수로 등장한 이후 핵 문제 및 군사 문제와 여타 경제, 사회문화, 인도주의 문제를 어느 정도 연계할 것인지가 통일정책의 핵심 이슈다. 정치·안보 문제와 경제 문제를 분리하고자 하는 정경분리는 대북 포용정책과 평화·번영정책의 핵심이었다.
김대중 정부는 정치·군사 문제와 경제 협력을 분리함으로써 남북관계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노무현 정부도 정경분리 원칙을 큰 틀에서 유지했다. 진보정부는 정경분리 원칙에 입각해 핵 문제의 와중에서도 경제 협력의 동력을 유지하고 조금이라도 우호적인 여건이 조성되면 경협을 확대하고자 했다.
그러나 보수정부는 정경분리 원칙이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북한의 핵 개발을 방조했다고 비판한다. 보수정부는 북핵 문제가 남북관계 전반, 특히 경제 협력의 조건이 돼야 한다고 여긴다. 이명박 정부의 ‘비핵·개방·3000 구상’은 북핵 문제의 선해결을 강조하고 다른 분야의 남북관계는 북핵 문제의 진전 상황에 따라 결정돼야 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박근혜 정부도 신뢰 구축 프로세스를 강조했지만, 북한의 연이은 핵실험으로 남북관계를 전면 중단했다.
넷째, 접근 방식과 정책 수단에 대한 것이다. 진보정부는 관여를 통해 북한의 호응과 정책 변화를 이끌어내는 관여정책(Engagement Policy)을 중시했다. 반면, 보수정부는 북한의 대외 접근망을 차단함으로써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봉쇄정책(Containment Policy)을 중시했다.
한편 대북정책의 수단에는 외교적 압박, 경제 제재, 군사적 시위, 군사적 압박, 선제 타격, 예방 공격 등과 같은 압박 수단과 대화, 경제적 인센티브 제공, 안전 보장, 체제 인정 등과 같은 유인 수단이 있다.
진보정부는 햇볕 또는 포용이라는 정책 수단, 특히 경제 교류와 협력의 효과를 기대하고 유인 수단을 활용했다. 포용정책은 바람보다 햇볕이 나그네의 외투를 벗기는 데 더 효과적이라는 이솝우화를 예로 들었다. 바꿔 말하면 압박은 오히려 북한 체제를 공고화하는 데 기여할 뿐이며, 포용이 북한을 자극하지 않고도 결과적으로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 더 효과적이라고 가정했다.
그러나 보수정부는 포용정책이 북한의 개방·개혁과 대남정책 변화를 이끌어내는 데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고 전제하고 압박 수단을 활용했다. 보수정부는 북한의 변화를 위해 당근보다 채찍이 더 효과적이라고 여긴다.
보수정부는 북한의 변화를 위해 당근보다 채찍이 더 효과적이라고 여긴다. 박근혜 정부는 2016년 개성공단을 폐쇄했다.
지속 가능한 통일정책 필요
진보 진영과 보수 진영의 통일 패러다임이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차기 정부가 지속 가능한 통일정책을 추진하는 것은 어려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차기 정부는 어떤 정부라도 압도적 국민의 지지를 얻는 것이 어려울 것으로 전망된다.
과반에 미치지 못하는 득표로 권력을 장악한 정부가 다수의 반대세력을 상대하게 되고, 대통령이 확정되는 순간부터 이미 차기 대권을 둘러 싼 물밑 경쟁이 전개되는 게 한국 정치의 현실이다. 여당을 중심으로 국정을 주도하려는 대통령과 다당제 경향을 보이는 국회가 국정 주도권을 놓고 주도권 다툼을 하는 것도 익숙한 모습이다. 특히 진보·보수 간 견해 차이가 큰 통일 문제에서 국민 다수의 지지를 받는 통일정책을 형성하는 것은 난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을 감안해 차기 정부는 다음과 같은 기본 방향에 입각해 대북정책을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첫째, 평화 공존과 통일 준비의 종합 구도를 마련해야 한다. 중·장기적인 통일 비전과 통일전략의 큰 틀 위에서 통일을 준비하는 정책과 한반도 안정과 남북 화해·협력을 이끌어내는 평화 공존 정책에 대한 종합적 구도가 필요하다. 통일정책은 대북정책에 대해 일종의 지침을 제공하는 가이드라인이라 할 수 있으며, 대북정책은 세부적 정책 이행에 의해 최종 목표인 통일을 향해 가는 로드맵이라고 할 수 있다.
둘째,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을 순차적으로 연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핵 문제 해결을 모든 분야 남북관계 개선의 전제조건으로 설정하는 것도 적절하지 않고, 그렇다고 북핵 문제 해결을 방치한 채 남북관계 진전을 추진하는 것도 비현실적이다. 따라서 북핵 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개선을 순차적으로 또는 선별적으로 연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요컨대 핵 문제의 우선순위를 인정하되, 그 틀 내에서 가능한 남북관계를 진전시키고 숨통을 틀 수 있는 가능성을 찾는 게 필요하다. 그리고 핵 문제의 진전 상황에 따라 남북관계를 순차적으로 진전시키는 방안을 모색하는 게 바람직하다.
셋째, 선택적 관여정책에 입각해 여러 정책 수단을 배합해야 한다. 통일 문제의 여러 이슈들에 대해 상황 및 조건에 따라 ‘선택적 관여(Selective Engagement)’ 정책을 구사해야 한다. 봉쇄 일변도나 관여 일변도 정책의 효과는 제한적이다. 선택적 관여정책은 보상 위주의 정책이나 제재 위주의 대북정책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대안이다. 선택적 관여정책은 북한의 정책 변화 및 협상의 진전에 따라 협력의 수준과 범위를 조절하는 것이다. 선택적 관여는 ‘퍼주기’ 논란을 피하면서도 남북관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고 북한의 변화를 이끌어낼 수 있는 방안이다.
한편, 이론적으로 볼 때 압박 수단이나 유인 수단은 나름대로 효과와 한계를 지니고 있다. 어느 한 가지 정책 수단을 고수하기보다 상황별, 단계별로 압박 수단과 유인 수단을 신축적, 탄력적으로 배합하는 지혜가 필요하다. 북한의 도발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대응하면서 대북 제재의 정당성과 효율성에 대한 국제사회와 주변국의 지지를 이끌어내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북한의 우호적 태도와 협력에 대해서는 보상을 제공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 보상의 종류 및 규모를 사안에 따라 조절해야 한다.
최소한의 정치·사회적 합의 형성부터
넷째, 대북정책에 대한 최소한의 정치사회적 합의가 필요하다. 그동안 정부 교체에 따른 통일정책의 빈번한 변화에도 불구하고 시행착오를 거치는 동안 다음과 같은 몇 가지 대원칙에 대해서는 합의가 가능할 것으로 여겨진다. 예를 들면, 통일정책의 지속성과 일관성이 필요하다는 점이다. 또한 상황 변화에 따라 통일정책은 전략적 신축성을 지녀야 하며 선택과 집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통일을 이끌어가는 데 한국의 주도적 역할이 불가피하다는 점이다. 또한 남북한이 협력할 수 있는 환경을 남북한 차원과 국제적 차원에서 조성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평화적 통일을 위해서는 많은 시간이 걸리더라도 어떤 형태로든지 북한 체제의 변화가 필요하다는 점이다. 그리고 평화적 통일을 위한 통일 과정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 실질적, 내적 통합이 중요하다는 점 등이다.
이러한 기본 방향을 바탕으로 구체적 이슈에 대해 최소한의 정치·사회적 합의를 형성하는 것이 필요하다. 예를 들면 북핵 문제의 우선순위, 억지력 확보의 중요성, 대북 제재의 필요성과 함께 출구전략의 모색 병행, 압박 수단과 유인 수단의 조합, 인도적 지원과 교류협력의 지속, 남북한과 주변국을 포함하는 우회적 다자 협력 방안 모색, 인도적 문제와 인권 문제의 중요성 등에 대한 공통분모를 만들어내는 것이 진화적 대북정책을 위한 정치·사회적 합의의 출발점이 될 것이다.

박 종 철
통일연구원 선임연구위원
고려대 정치학 박사. 미국 하버드대 교환교수, 일본 도쿄대 객원교수, 국가안전보장회의 자문위원, 대통령비서실 통일외교안보정책실 자문위원, 북한연구학회 회장 역임. 현 통일부 자문위원, 논문 ‘김정은 체제의 변화와 우리의 대책’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