염상균 수원문화원 부설 수원화성향토문화연구소 연구위원장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건설하기 시작한 것은 조선 정조 18년(1794) 정월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보다 5년 앞선 정조 13년(1789) 국왕의 친부인 사도세자의 묘소(영우원)를 양주군 배봉산(지금의 서울 동대문구)에서 지금의 경기 화성시 융릉(당시 현륭원) 자리로 옮긴다. 그리고 이듬해에는 화성에 용주사를 세워 아버지의 슬픈 영혼을 위로해주는 원찰로 삼는다.
그러나 여러 문제가 드러났다. 우선 묘소 자리 바로 앞에 수원부의 관아가 자리했고, 많은 주민이 묘소 근처에 살아서 어떤 형태로든 관아와 주민을 이주시키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만만치 않은 이주 비용도 문제였다. 어디로 어떻게 이주시켜야 할 것인가. 현륭원 자리를 고를 때 고산 윤선도(1587~1671)가 골라 놓은 효종의 능침 후보 자리를 선정했듯이, 또 원찰로 세운 용주사가 갈양사의 옛 터전이었듯이, 이 문제도 선인들의 견해가 반영되었다. 바로 조선 실학의 비조로 일컬어지는 반계 유형원(1622~1673)의 <반계수록>에 실린 ‘군현제’에서 그 해답을 찾았던 것이다.
반계 유형원은 수원이 더 큰 도시로 발전하기 위해서는 20리쯤 북상한 팔달산 근처에 터전을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했던 것이다. 그리고 팔달산 북쪽의 황무지를 개간해 농지로 삼으면 좋을 것이며 그렇게 하면 큰 도시로 발전하는 데 아무런 문제가 없음을 밝혔다. 정조는 이미 120여 년 전에 훌륭한 묘소 자리를 추천해놓은 고산 윤선도와 새 수원의 터전을 골라놓은 반계 유형원의 벼슬을 추증해주고 그 사실을 후손들에게 알리라고 하였다.
북수문으로 불리는 화홍문.
호호부실(戶戶富實) 인인화락(人人和樂)
새 수원의 건설이 시작되었다. 관아를 옮겨오고 주민들을 이주시키는 데 큰돈이 들었다. 20리밖에 되지 않지만 조상 대대로 살아온 터전을 떠나야 한다는 게 쉬운 일은 아니어서 가옥 보상비와 위로금까지 주었어도 순조롭지는 않았다. 이렇게 새 수원을 건설하는 데 3, 4년이 흘렀다.
정조 17년(1793), 정조는 아버지의 원침을 지키는 수원의 체모를 높여야 한다고 생각해 수원을 유수부로 승격시키면서 이름도 화성유수부로 바꾸었다. 북쪽의 개성, 서쪽의 강화, 동남쪽의 광주에 이어 서울을 남쪽에서 보위하는 또 하나의 유수부가 탄생한 것이다. 그리고 새 도시 수원을 에워쌀 화성의 건설을 계획한다. 국내외 여러 성을 비교·분석해 장점과 단점을 도출해내고 학자들의 견해를 받아들여 최고의 성을 건설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인다.
실학의 도시, 백성을 위한 도시
화성의 건설은 정조 18년(1794) 1월 7일 시작해 34개월 만인 정조 20년(1796) 9월 10일 끝나게 된다. 4600보(약 5.5km)에 이르는 화성과 함께 화성의 핵심인 행궁(576칸)의 증설까지 마쳤던 것인데, 중간의 공사 중지기간을 빼면 28개월밖에 걸리지 않았다. 정조는 화성을 완공한 이듬해 정월 수원에 와서 관료들에게 “집집마다 부유하게 하고, 사람마다 즐겁게 하라(호호부실 인인화락·戶戶富實 人人和樂)”고 했다. 가정은 부자가 되고 사람은 모두 행복하게 해주라는 명령이었다.
농업 진흥을 위해 정조는 ‘만석거’라는 저수지를 만들었고, 저수지 아래 땅을 개간해 대유둔이라는 국영 농장을 두어 화성을 지키는 기본이 되게 했다. 또 상업을 진작하기 위해 인삼, 관모 등의 독점 판매권을 수원의 상인들에게 주었다. 정조는 새 수원을 자신의 고향으로 생각했고, 당대의 역량을 모두 모아 화성유수부 건설에 박차를 가했다.
새 수원은 출발부터 실학과 연결된다. 반계 유형원의 실학사상이 새 수원의 터전을 열었고, 다산 정약용을 비롯한 여러 실학자들이 축성에 이바지했다. 더구나 시대적인 흐름은 실학 정신을 현실에 투입하지 않고는 안 될 상황이었다.
화성행궁 전경.
급변하는 국제 정세 속에서 서양의 과학과 기술, 문명이 청나라를 통해 조선에 들어왔다. 정조는 아마 화성을 조선 실학의 실습장으로 쓰려고 했는지도 모른다. 기계나 기구의 개발과 활용은 백성의 수고를 덜어주는 역할도 하지만, 경비를 절감하면서 공역기간을 단축하는 지름길이다. 이는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이 없으면 할 수 없는 일이다.
화성에는 국왕의 애민정신이 가득 담겼다. 설계를 변경해가면서까지 주민들을 성 안으로 끌어들인 것과 근로자들에게 인건비를 지급한 점, 그리고 척서단과 제중단 등의 환약을 내려주고 무더위와 인건비 미지급 시 공사를 일시 중지한 점 등은 애민정신의 소산이다.
화성은 기존 성들의 문제점들을 해결하려는 마음에서 건설됐다. 동서남북 사대문을 건설하면서 모두 옹성을 설치했고, 곳곳에 치성(雉城·일정한 거리마다 성곽에서 바깥쪽으로 튀어나오게 한 시설물로 여기에 몸을 숨기고 적을 감시하거나 공격한다)을 두었으며, 여장(女牆·성 위에 낮게 쌓은 담)의 높이를 높여 군사들을 보호하려고 했다. 이는 서애 유성룡이 <징비록>에서 밝힌 조선 성곽의 취약점을 보완한 것이다. 요소요소에 암문을 설치해 비상사태에 대비했고, 남북 수문을 두었는가 하면, 군사적인 위엄을 담은 장대(將臺·장수가 군사를 지휘하던 곳)를 동서에 건설했다.
화성은 여러 기능을 한 시설물에 복합적으로 수용하는 능력을 보인다. 그러면서도 아름다운 자태를 지닌다. 이는 사실 어려운 일이다. 다기능을 강조하면 외형을 놓치게 되고, 외형을 강조하다 보면 기능성에 문제가 생긴다. 이 배반적인 요소 둘을 하나로 묶어내는 힘은 문화적인 능력이 탁월했을 때 가능하고, 탁월한 문화적 능력은 튼튼한 철학이 바탕에 깔렸을 때라야 가능한 것이다. 화성은 이렇듯 조선의 정점에서 건설되었다.
화성의 건설은 완벽한 실명제로 완성된다. 성역의 처음과 끝을 모두 기록한 공사보고서를 펴낸 것이다. 국가의 재정이 많이 들어갔고 백성의 피땀 어린 정성이 훌륭한 결과를 낳았으므로 보고서 간행은 당연하다고 여겼다. 화성의 성역이 한창 진행되던 정조 19년(1795) 윤 2월에 수원에서는 커다란 잔치가 벌어졌다.
인공 연못이 있어 경관이 뛰어난 누각 ‘방화수류정’.
정조의 어머니인 혜경궁 홍씨의 회갑 잔치이다. 화성에 대한 정조의 애착이 어떠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라 하겠다. 이 잔치의 모든 것을 책으로 펴냈는데 <원행을묘정리의궤(園幸乙卯整理儀軌)>라는 책이다. 이 책의 간행에 앞서 정조는 국가의 모든 행사를 낱낱이 정리해놓을 요량으로 정리의궤청을 설치했다.
<원행을묘정리의궤>의 간행은 화성성역 공사보고서의 간행에 본보기가 되었다.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라고 제목을 단 이 책에는 공사의 논의 과정과 관청 사이에 주고받은 공문서와 임금의 의견과 명령 등 진행 과정을 기록했다. 공사 참여자의 이름과 공역 일수도 적었는데, 요즘도 사용하는 점잖은 이름도 많지만 김큰놈(金大老味), 이작은놈(李者斤老味), 박착한놈(朴善老味) 등 별명 같은 이름도 많다. 또 각 시설물의 위치와 모습 및 비용들을 낱낱이 실었다.
글로 설명할 수 없는 부분들은 그림을 그려서 이해를 돕기도 했다. 공사비에 대한 대목에서는 각 공역에 들어간 경비를 산출했고, 인건비(일당)와 공사에 참여한 일수 등도 상세하게 기록해서 석공 아무개가 어느 고장 출신이며, 어느 현장에서 며칠을 일했으며, 얼마의 돈을 품값으로 받았는지 알도록 했다.
공사 실명제 구현
어느 시설물이든 건축 자재를 하나하나 기록했고, 그 비용을 산출했으며, 성 안팎에서 본 그림을 따로 그려 이해를 도왔다. 공심돈(空心墩·주변을 감시하는 망루)과 포루(砲樓)같이 부득이한 경우엔 실내의 그림을 그려놓기도 했다. 거중기(擧重機)와 같은 기계는 부품까지 따로 그려서 부품을 만드는 법과 조립하는 요령을 설명하는 치밀함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이 공사보고서가 형식적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는 방증이다.
지난 1970년대 화성은 대대적인 보수를 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부분적인 보수를 해오고 있다. 그럴 때마다 <화성성역의궤>가 교과서로 등장하는 것은 기본이다. 수원화성이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되는 데에도 <화성성역의궤>는 한몫을 톡톡히 했다. 200여 년 전의 완벽한 공사보고서에 세계가 놀란 것이다.
정조의 수원 행차를 그린 ‘환어행렬도’.
<화성성역의궤>에 들어간 실명제도 중요하지만 우리는 현장에서도 그 흔적들을 만난다. 창룡문과 화서문, 그리고 팔달문에서 실명판이 보인다. 그중에서 팔달문 것은 마치 어제 새긴 듯 글씨가 생생하다. 기록을 남긴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다. 자신이 없으면 기록을 제대로 남길 수 없기 때문이다.
수원화성은 그 자체로도 빛나는 별이다. 화성행궁을 먼저 보고 성을 한 바퀴 돌면서 당대의 역사와 건축술도 살펴보면 좋다. 또한 화성박물관에서 화성 건설과 그 자취들을 돌아보면 정리가 된다. 그리고 화성시에 소재한 융릉과 건릉, 용주사를 함께 찾아보면 역사의 한 꾸러미가 되어 가치가 더욱 높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