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마다 녹음이 짙어가는 6월이 되면 위기에 처한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 바친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마음속에 떠올리게 된다. 그분들의 나라 위한 희생정신을 기리고, 국민의 호국보훈 의식 및 나라 사랑 정신 함양을 위해 지정된 호국보훈의 달이기 때문이다. 생명력 넘치는 계절인 6월을 호국보훈의 달로 정한 것은 6·25전쟁이 발발한 달일 뿐만 아니라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청사에 길이 새길 사건들이 6월에 적지 않게 일어났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무엇보다도 6월에는 조국 광복과 국토 방위를 위해 싸우다 돌아가신 순국선열과 전몰장병들의 영령을 추모하기 위한 국가기념일인 현충일이 있다. 나라 위해 목숨 바친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이 존재하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점에서 그분들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것은 더없이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처럼 현충일은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을 기억하고 기념하는 날로서 호국보훈의 달의 클라이맥스에 해당하는 날이라 할 수 있다.
6월이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 역사적 사건은 1950년 6월 25일 새벽 북한의 기습공격에 의한 6·25전쟁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1945년 8·15 광복과 동시에 미군과 소련군의 한반도 진주에 따른 민족 분단은 남북 간에 이념과 체제의 대립과 반목을 고착화했고, 끝내 동족상잔의 비극을 초래하고 말았다. 3년 1개월간 지속된 전쟁은 한반도를 초토화했고, 피아간 수많은 군인 및 민간인 희생자를 냈으며, 10만여 명의 전쟁고아, 1000만 명이 넘는 이산가족을 발생시켰다. 한마디로 6·25전쟁은 한민족에게 크나큰 물질적, 정신적 상흔을 남겼다. 휴전과 함께 남북은 각기 체제 이데올로기 강화에 몰입하면서 분단 상황은 더욱 견고해지고 말았다. 전쟁 발발 후 6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한반도에 여전히 불안한 정전체제가 지속되고 있는 근본 이유이다.
6월이 되면 북한의 또 다른 도발 사건이 상기된다. 1999년 6월 15일과 2002년 6월 29일, 서해 북방한계선(NLL) 남쪽의 연평도 인근에서 우리 해군 함정과 북한 경비정 간에 발생한 두 차례의 연평해전이 그것이다. 제1연평해전은 1999년 6월 15일 오전 어뢰정 3척을 포함한 7척의 북한 함정이 고의적으로 NLL을 침범한 데 대해 우리 해군 함정이 대응하는 과정에서 북한 측이 먼저 포 사격을 가했고 이에 아군이 응사함으로써 발생한 사건이다. 당시 아군은 북한 어뢰정 1척을 침몰시켰고, 5척의 경비정을 크게 파손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또한 교전 중 사망한 북한군은 3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반면에 우리 해군 측 피해는 함정들 일부에 경미한 파손이 있었고 9명의 군인이 경상을 입은 것으로 파악되었다.
2002년 6월 29일 2002 한일 월드컵이 막바지에 이른 시점에 북한 경비정이 NLL을 침범해 우리 해군 고속정 참수리 357호를 향해 기습 포격 도발을 감행했다. 이에 공격을 받은 참수리 357호와 주변에 있던 참수리 358호가 즉각 대응사격을 가했고, 경비 중이던 초계함 제천함 및 진해함, 4척의 고속정도 신속히 교전에 가담했다. 이 제2연평해전에서 우리 해군은 전사자 6명, 부상자 18명, 참수리 357호 침몰 등의 피해를 보았다. 북한 측은 약 30여 명의 사상자를 내고 SO·1급 초계정 등산곶 684호가 반파된 채 퇴각했다. 두 차례에 걸친 연평해전은 남북한이 신뢰 회복과 함께 점진적인 평화통일의 길로 가기에는 여전히 큰 벽이 가로놓여 있음을 실감케 하는 사건이었다.
1987년 6월항쟁은 우리나라 민주주의 발전에 신기원을 이뤘다.
6·15 남북공동성명, 국내외 큰 반향 일으켜
6월 들어 또 하나 잊을 수 없는 중요한 역사적 사건은 김대중 정부 시절에 남북 화해·협력정책을 추진하는 가운데 2000년 6월 13~15일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 정상회담을 들 수 있다. 특히 그 결과물인 6·15 남북 공동성명은 국내외에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공동성명은 기능주의적 통합의 길을 제시하기는 했지만, 남북 간의 동상이몽적인 해석의 차이 때문에 우리가 원하는 점진적 통일의 방향으로 전진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체제 위기에 봉착한 북한은 경제,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교류협력을 활성화하며 신뢰를 회복하는 일에 우선시하기보다는 공동성명 제1항(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해나가기로 하였다)과 제2항(남과 북은 나라의 통일을 위한 남측의 연합제 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하고, 앞으로 이 방향에서 통일을 지향시켜나가기로 하였다)에 집착하며 ‘반미 자주화 통일’과 ‘연방제 통일 방안’을 염두에 둔 대남 선전선동과 통일전선 전술에 역점을 둬왔다.
문제는 이 같은 북한의 대남 공작에 우리 사회가 ‘남남갈등’으로 분열에 휩싸이고 만다면 통일의 길은 더욱 멀어질 뿐이라는 데 있다. 남북 상호 간의 신뢰 증진을 바탕으로 남북관계를 발전시키며 평화통일의 길로 나아가기 위해서는 통일 이전에 우리의 사회 통합이 우선되어야 함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한편 6·15 남북 공동성명이 남북 간의 군비 축소 등 군사적 대립 완화책을 담아내지 못한 것도 큰 아쉬움이 남는 부분이다. 북한이 금과옥조로 여기는 공동성명에 군비 축소 관련 조항을 담아냈더라면 북한의 핵 개발 의지를 꺾을 수 있는 발판이 되지 않았을까 싶다.
6월 민주항쟁 역시 6월이면 상기되는 대표적인 역사적 사건이다. 직선제 개헌을 통해 정치적 민주화의 진전을 이룩함으로써 각 분야에 걸쳐 민주적 제도의 확산을 이루는 등 우리나라 민주주의의 발전에 신기원을 이뤘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더군다나 올해는 6월항쟁 30주년에 해당하는 해인지라 그 의미가 더욱 새롭게 다가온다.
1999년 6월과 2002년 6월 북한의 도발로 두 차례 해전이 발발했다.
6월 민주항쟁, 직선제 개헌 이뤄
1980년 전두환 정권이 집권한 이후, 군부 권위주의 독재정치에 맞선 민주화 운동은 줄곧 대통령 직선제 헌법 개정을 포함한 민주 체제 요구로 이어졌으나 군사정권은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강경 탄압으로 일관했다. 그러던 중 1987년 1월 서울대생 박종철 군이 치안본부 대공수사단에 연행되어 조사받던 중 사망하는 사건이 일어났고, 이에 분노한 시민들의 거리 시위가 전국적으로 거세게 일어났다.
그렇지만 군사정권은 오히려 국민적 민주화 열기에 찬물을 끼얹는 ‘4·13 호헌조치’를 발표했고, 정치적 반대세력에 대한 탄압을 강화했다. 그러자 산발적으로 전개되던 민주화 투쟁 양상은 야당과 재야 민주세력이 총결집한 ‘민주헌법 쟁취 국민운동본부’ 결성으로 확대되기에 이르렀다. 급기야 1987년 6월 10일 국민운동본부는 ‘박종철 고문 살인 은폐 조작 규탄 및 민주헌법 쟁취 범국민대회’를 개최하며 6월 민주항쟁의 도화선에 불을 붙였다.
20여 일간 계속된 항쟁에 전국적으로 500여만 명이 참가해 4·13 호헌조치 철폐, 직선제 개헌 쟁취, 독재정권 타도 등 반독재 민주화를 요구했다. 결국 전두환 정권은 거센 국민적 저항에 굴복해 민주화 요구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민주정의당 대통령 후보 노태우가 직선제 개헌과 평화적 정부 이양, 대통령 선거법 개정, 김대중의 사면 복권 등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6·29 선언을 발표한 것이다. 6월 민주항쟁은 민주세력과 시민의 힘으로 권위주의적 군부 독재정치를 종식시키고 1987년 헌정 체제를 마련하는 기폭제가 되었다는 점에서 한국정치사에서 매우 큰 의의를 갖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민주화 이후 민주주의 공고화의 여정은 아직도 갈 길이 멀어 보인다. 대화, 타협, 합의의 과정을 거치며 국민을 통합으로 이끌어야 할 정치사회가 제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반드시 해결해야 할 크나큰 정치적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대의제 정치제도 하에서 의회정치가 잘 이뤄지기만 하면 결코 시민사회가 혼란스러울 이유가 없다. 그러나 우리의 의회정치는 걸핏하면 국회의사당을 아수라장으로 만드는 모습을 보여왔고, 그 결과 걸핏하면 원내정치를 포기하고 ‘거리의 정치’, ‘광장의 정치’로 변질돼왔다. 이는 1987년 헌정 체제가 우리의 정치문화에 맞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문제는 우리의 정치 상황이 어려우면 우리 사회가 갈등과 분열로 혼란스러워지게 마련이라는 점이다.
호국보훈은 대한민국의 미래
6·25전쟁의 깊은 상처는 남북한에 이념과 체제의 극단적인 이질화를 수반해 상호 적대관계를 고착화함으로써 동서독과는 달리 서로 신뢰하기 어려운 환경을 조성하고 말았다. 두 차례의 연평해전은 남북 적대관계의 구체적인 표현이며, 6·15 남북 공동선언이 제대로 이행되지 못하는 것도 남북한이 각기 자기중심적 관점에서 달리 해석하고 있기 때문인데 이 또한 6·25전쟁으로 말미암은 극도의 불신감이 주원인일 것이다.
주지하다시피 우리는 북한의 ‘핵 공갈’은 물론 대남 선전선동과 통일전선 전술에 상시적으로 시달리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내적 안보태세 확립에 우선권을 두어야 함은 분명하다. 북한이 시시때때로 ‘남남갈등’을 부추기고 있음에도 그 대응을 소홀히 한다면, 이는 국가 안보 측면에서 볼 때 매우 위험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북한이 대남 전략 차원에서 노리는 바는 바로 우리 사회의 무질서이고 그에 따른 혼란이다. 그러할 때 북한의 주의주장이 우리 사회에 먹혀들어갈 가능성이 훨씬 커지기 때문이다.
오늘의 우리 사회는 물질적 번영과 정치적 자유가 크게 신장된 반면 계층 간, 세대 간, 지역 간 갈등과 분열로 몸살을 앓고 있다. 문제는 이러한 갈등과 분열이 우리의 내적 안보에 심각한 위협을 초래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를 사는 우리는 과거 순국선열과 호국영령이 피 흘린 터전 위에서 살고 있다. 그분들의 희생이 없었다면 대한민국의 존립·유지는 어떻게 되었을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가 그들의 희생정신을 끊임없이 기리고, 호국보훈을 중시해야 하는 근본 이유는 그것이 결국 대한민국의 미래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호국보훈은 대한민국의 과거요, 현재요, 미래이며, 국민 통합을 위한 불가결한 상징적 기제이다.
오 일 환
전 보훈교육연구원 원장
한양대 정치외교학과 졸업, 프랑스 Univ. de Paris X(Univ. de Paris Nanterre) 정치사회학 석·박사. 한양대 연구교수, 통일교육원 통일교육위원, 저서 <현대북한체제론(공저)>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