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범 100여 일이 지난 트럼프 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은 여전히 불명확하고 가변적이다. 미국 국내 경제의 부활을 내걸고 당선된 대통령이니 만큼 경제 위주의 안보전략을 추진한 것도 한 이유이거니와, 러시아 대선 개입 등 풀기 어려운 국내 정치 난제들이 트럼프 대통령의 발목을 잡고 있기 때문이다.
애초에 전략 개념으로 내건 미국 국익 우선주의와 힘을 통한 평화는 후퇴해 미국의 국익을 위해 동맹국은 물론 중국 등 주요 국가와 협력을 해야 함을 트럼프 대통령은 절감하게 되었고, 미국이 가진 힘의 최대 기반인 군사력을 어떻게 활용해 외교정책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도 명확하지 않은 현실이다. 한국, 일본,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사우디아라비아 등 동맹국들의 무임승차를 비판하던 트럼프 대통령은 동맹 강화를 주장할 수밖에 없게 되었고, 최근 대테러 협력에서 사우디의 협력을 강조하는 모습이다.
트럼프 정부의 외교안보전략이 가변적인 상황은 한반도 정책에서도 나타난다. 취임 이전 유세기간 중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에 대한 압박과 북·미 정상회담 개최 가능성 등 정리되지 않은 정책 발언을 해왔고, 한국에 대해서는 한미동맹 분담금 증가 및 한미 자유무역협정 재협상 등을 언급했다. 동아시아 전략 구도 속에서 북핵 문제 및 북한 문제, 그리고 한미동맹의 위상을 총괄적으로 정의하고 한미동맹 및 양자 협력 방안을 제시하는 데 한계를 보였다.
약화된 ‘최대 압박과 관여’ 정책
트럼프 정부 출범 이후 미국의 한반도 전략은 무엇보다 북핵 문제에 집중해 나타나고 있다. 북한이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 중 미국 본토를 공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망이 유력한 가운데 미국 국민들의 안보 불안을 해소해야만 국내 정치적 지지를 유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직후 북핵 문제가 매우 시급하다고 강조하면서 포괄적 정책 입안을 지시했다. 그 결과 ‘최대 압박과 관여’ 정책이 모습을 드러냈다. 군사적 수단을 포함한 모든 옵션을 고려하되 북한과 밀접한 경제관계를 유지하는 중국의 협력을 얻어내어 대북 압박을 가하고, 북한의 태도 변화가 행동으로 나타날 때 대화를 추구한다는 전략이다. 미국은 중국의 협력을 이끌어내기 위해 중국에 대한 경제 압박의 수위를 낮추면서 미·중 협력 가능성을 강화하는 정책을 취했다.
4월 초 미·중 정상회담 당시 트럼프 대통령은 중국의 대북 압박 협력의 대가로 미국의 대중 경제 압박 완화의 가능성을 내비치기도 했고, 미·중 간 전략 협력의 긴요성을 우회적으로 언급했다. 중국은 북핵 문제가 악화될 경우 미국 단독의 대북 2차 제재로 중국의 기업과 은행들이 불이익을 당할 것을 염려하는 한편, 한미 군사동맹 강화, 한·미·일 전략 협력 강화 등의 부작용이 생길 것을 피하고자 했다. 중국은 북한의 석탄 수입 중지 및 원유 공급 중단 언급 등 다양한 수단을 사용해 북한을 압박했고, 그로써 북·중관계는 극도로 악화돼 있는 것이 사실이다.
반면 중국은 북핵 문제가 북한 정권과 체제의 미래 생존 문제와 직결돼 있다는 점을 트럼프 대통령에게 강조한 것으로 보이며, 미국은 대북 압박과 더불어 관여 및 대화의 가능성을 함께 제시하고 있다. 중국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북한의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문제를 함께 다뤄야 하며 이를 위해 병행 협상이 필요하다고 주장해왔다. 이를 실현하는 구체적 방안으로 북한의 핵·미사일 실험 중단과 한미 간 군사훈련 중단을 시발점으로 제시해왔다.
중국의 대북 압박을 얻어내려는 미국으로서는 중국 안을 무조건 무시할 수는 없는 입장이다. 군사적 선제 타격 등 군사적 옵션을 강하게 주장하던 미국은 5월 들어 점차 북한과의 협상 가능성을 비치기 시작했다. 틸러슨 국무장관은 미국이 북한 정권과 체제를 위협할 의도가 없으며 군사적 옵션도 다른 압박 수단 이후에 사용할 수 있다는 점을 언급했다. 최근 문재인 정부의 대미 특사를 만난 자리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조건이 충족되면 관여로 평화를 조성할 수 있다는 언급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틸러슨 장관은 북한의 불신을 의식해 북한이 위험을 무릅쓰고 미국에 신뢰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발언을 하기도 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대북압박에도 북한은 핵과 미사일 개발에 매진할 전망이다.
서로 다른 미국과 북한의 ‘대화 조건’
반면 북한은 김정은 정권 등장 이후 스스로 핵무기 국가임을 천명하고 있고,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 때문에 핵무기를 개발한 것이라고 줄곧 주장해왔다. 논리적으로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이 지속되는 한 핵무기를 포기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며, 조건에 따라 핵무기 감축 협상과 미국의 대북 안전 보장을 기반으로 한 평화협정을 추구할 수 있다는 입장이 지속되고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야 한다.
북한의 최선희 외무성 북아메리카 국장이 5월 노르웨이 1.5트랙 회담 이후 트럼프 정부와 여건이 되면 대화하겠다고 밝힌 바 있지만, 이때의 여건은 미국의 조건과 상당한 편차가 있다. 미국이 북한의 비핵화를 위한 선행동을 요구하는 반면, 북한은 핵무기 국가 인정 및 북한 정권 보장을 조건으로 내걸고 있기 때문이다.
미국의 대북 압박이 유지되거나 혹은 강화될 것으로 보이지만, 북한은 경제 압박을 버티면서 미국의 양보를 최대화하기 위해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에 매진할 것이다. 5월 들어 ‘화성-12’ 미사일과 ‘북극성-2형’ 미사일을 연달아 시험발사했으며 이를 통해 북한의 미사일 대기권 재진입 기술과 효과적인 중·장거리 미사일 개발 성공을 선전하고 있다. 미국 본토 위협이 가시화되면서 트럼프 정부의 압박감도 가중될 것이며 미·북 간의 갈등도 강화될 것이다.
미국은 북한에 대한 최대 압박이 어떻게 진행될지 전반적으로 로드맵을 제시한 바 있지만 관여에 대해서는 명확한 비전을 보이지 않고 있다. 현재까지 북한의 생존 및 체제 불위협, 군사적 공격 불고려 정도의 입장을 보이고 있을 뿐이다. 북한은 핵 포기 시 정권의 생존과 체제 유지가 불가능할 것으로 보기 때문에 미국과 주변국은 북한의 비핵화를 유도하기 위해 압박과 동시에 비핵화된 북한의 생존을 보장할 수 있는 구체적이고 복합적인 관여전략을 제시해야 한다. 북한을 정당한 국제사회의 일원으로 인정한다는 인식을 보이고, 북한과의 평화 공존을 위한 구체적 대안을 협상하고, 중국과 더불어 북한의 정상국가 노선을 위한 다양한 법적·제도적 보장책을 고민하는 모습을 보여야 할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트럼프 정부가 한국 정부와 북한의 미래 및 한반도의 미래를 위한 전략 대화를 강화하는 것이다. 비핵화된 북한과 한국이 어떻게 평화를 유지하면서 정상적인 공동 발전을 할 수 있는지 모색하는 모습을 보여야 북한 역시 비핵화를 전제로 협상에 임할 것이다.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과 안정된 한반도를 이루려는 미국의 노력은 미국의 동아시아 전략의 성공 사례로 기록될 수 있다. 미국이 자신의 정책 수단을 최대한 활용해 압박을 가하면서도 한국, 중국 등 당사국들과 전략 대화를 유지하고, 6자 회담 등 다자회담을 통해 규범과 원칙에 기반을 둔 지역 문제 해결의 선례를 남기는 것은 비단 동아시아뿐 아니라 여타 지역에서도 큰 반향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
북한은 국제제재에 맞서 중국 관광객 유치에 적극 나서고 있다. 중국 관광객을 맞는 고려항공 여승무원들.
표류하는 트럼프 정부의 동아시아 외교안보전략
그간 미국은 유일한 강대국으로서 세계 여타 지역에 개입해왔지만 미국 중심의 개입전략에 집중해 각 지역의 특수한 문제를 내재적으로 성찰하고 해결하는 데는 아쉬움을 남긴 것도 사실이다. 북핵 문제의 해결 방법에서 단순한 핵무기 문제, 비확산의 문제뿐 아니라 북한 문제와 한반도, 동북아 외교안보 구도를 종합적으로 고려하는 모습을 보인다면 미국의 지역전략에 대한 신뢰가 제고될 수 있다.
그러한 점에서 트럼프 정부의 한반도 전략의 다른 한 축을 이루는 한미동맹 전략도 여전히 아쉬운 점이 많다. 트럼프 정부의 동아시아 외교안보전략의 큰 틀이 부재한 상황에서 한미동맹의 역할 정의 노력이 표류하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부상과 중·일 갈등의 악화, 다양한 해양영토 분쟁의 심화 등 지역 안보 문제가 대두하는 가운데 한미 전략 협력의 지평을 새롭게 정의해야 하기 때문이다.
트럼프 정부는 한미동맹을 분담금 공평 부담의 문제나 북핵 문제 해결 같은 좁은 틀에서 보아서는 안 된다. 그간 한미 안보 협력의 성과 및 문제점을 차분히 되돌아보고 향후 지역안보 더 나아가 지구안보를 위해 양국이 공유하고 있는 이익이 무엇인지 다양한 차원의 전략 대화를 서둘러 복원할 필요가 있다.
트럼프 정부가 당면하고 있는 경제 문제와 국내 정치 문제를 고려해볼 때, 미국의 선제적 노력을 기대하기는 쉽지 않다. 북핵 문제를 넘어 북한 문제 및 한반도 평화 문제의 로드맵을 작성하고, 한·미·중 간 다면적 전략 협력을 이끌어가고, 동아시아 지역의 평화를 위해 한미가 협력하는 한편, 동맹 유지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을 해결하는 노력은 한국이 주도적으로 해나갈 필요가 있다. 북핵 문제는 한국이 주도권을 발휘할 수 있는 대미 외교의 몇 안 되는 사안이니 만큼, 미국의 입장을 고려하되 한국의 대안을 미국이 취할 수 있도록 서둘러 해결 방안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전 재 성
서울대 정치외교학부 교수
서울대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 외교학 석사, 미국 노스웨스턴대 국제정치학 박사. 국방부·통일부 자문위원, 민주평통 상임위원, 서울대 동아시아연구원 아시아안보센터 소장. 저서 <정치는 도덕적인가? : 라인홀드 니버의 초월적 현실주의> 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