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위 ‘장미대선’으로 상징되던 한국 사회 변화의 열망에 힘입어 문재인 정부가 탄생했다. 외교안보는 물론 통일정책 전반에 걸친 대외관계에도 변화가 불가피할 것으로 예상된다. 물론 북한의 핵 개발 및 미사일 실험이 위험 수위를 넘어선 지 이미 오래이고, 21세기형 국가이기주의로 불리는 국제자유주의의 위축이 진행되는 상황이어서 대외정책의 과도한 방향 전환은 쉽지 않을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과거와 동일한 방향성과 정책 옵션으로는 한반도 평화와 동북아의 안정을 더 이상 추구할 수 없다는 판단 역시 확산돼 있으므로, 문재인 정부의 외교안보정책은 어려운 고민에 직면하게 될 것으로 보인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가 처한 외교안보 환경 및 그와 연동된 이슈에 대한 정확한 판단이 긴요히 요구되는 상황이다. 동북아는 물론 국제사회 전반은 역사적 전환기라 불릴 만큼 중요한 변곡점을 맞이하고 있다.
한반도가 처한 외교안보 환경을 살펴보면, 스트롱맨들의 등장이라는 표현에서 알 수 있듯이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등 우리를 둘러싼 열강의 지도자들은 외교정책에서 자국의 이익을 극대화하기 위해 국내 정치를 적극 활용하고 있다. 특히 미국과 중국의 경쟁이 과거 사안 중심적인 대결을 넘어 이제는 제도 경쟁의 단계로 진입하고 있다. 아시아인프라투자은행(AIIB)이나 상하이협력기구(SCO) 사례에서 보듯이 중국은 자국이 디자인한 국제제도를 국제사회에 확산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트럼프 행정부 등장과 함께 미·중 간 본격적인 대결의 심화가 예상됐으나, 지난 4월 미·중 정상회담 이후 서로 대결은 하되 협력적 스탠스 역시 불가피하다는 공감대가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결과적으로 남중국해 문제나 불공정 무역 이슈가 아직은 수면 아래에서 일정 정도 관리되고 있는 인상이다. 일본의 강대국화가 여러 모로 위험요소를 내포하고 있어서 이를 사전에 안정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 국제 협력이 필요하지만, 현 단계에서는 미·일동맹이라는 틀 안에서 미국이 제시하고 있는 동아시아 전략의 큰 그림을 뛰어넘지는 않고 있는 상황이다.
문재인 정부 앞에 놓인 3가지 난제
이상과 같은 배경에서, 문재인 정부가 직면한 외교안보 환경으로 대체로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안이 핵심적인 이슈로 다뤄질 전망이다. 첫째, 북한 문제와 관련한 부분이다. 트럼프 행정부 이후 미국의 대북 기조는 매우 완강한 상태이고 작년 이후 대북 국제 제재가 일정한 관성 위에 놓여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직접 북한 지도자와의 회담 가능성을 언급하는 등 일종의 널뛰기 전략이 진행되고 있다.
하지만 북한의 입장에서 보면 핵 개발 진행이 이미 9부 능선을 넘어섰고, 한두 번의 추가 핵실험만을 남겨놓은 상황에서 확실한 체제 보장과 미국과의 완전한 외교 정상화 정도의 카드가 아닌 한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없어 보인다. 이러한 상황에서 문재인 대통령은 비핵화를 위해 원칙과 안보에 입각해서 단호하게 접근하겠지만, 동시에 대화를 포함한 다양한 옵션을 고려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에 이러한 정부의 입장을 우리 국민 및 관련 주변국에 어떤 논리로 설명하느냐가 관건으로 보인다.
둘째, 미·중 시대는 우리를 둘러싼 가장 중요한 외교안보 환경 요소이다. 결과적으로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어떤 외교적 스탠스를 잡느냐가 문재인 정부의 최대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미국과 중국에 견주어 외교정책에 투입할 자원이 현저히 부족한 우리 현실에서, 남북관계 및 한반도적 맥락의 사안들이 미·중 간 파워게임으로 전환되는 경우가 발생할 때마다 우리 외교가 행사할 수 있는 공간은 더욱 줄어들게 된다. 사드 배치를 둘러싼 논란은 바로 이러한 현실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전임 정부는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중심을 잡지 못하고 외교적 방향감각을 상실했기 때문에 결과적으로 특히 대중외교의 기조를 어떻게 재정립하느냐가 매우 중요한 현안이 되었다. 그런데 한중관계의 복원은 당연히 한미동맹의 훼손을 전제로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현실적으로 더욱 어려운 외교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많은 전문가들은 정치적 고려는 단순화하면서 사안에 따라 동북아 안정성의 유지를 전제로 우리의 국가이익이 극대화되는 선택을 일관되게 하는 것이 미국과 중국에 가장 설득력 있는 메시지를 전달할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셋째, 향후 예상되는 트럼프 행정부의 공세 역시 문재인 행정부가 직면한 특징적 외교안보 환경 중의 하나다. 아직까지는 사드 비용 전가 문제의 실체적 진실이 무엇인지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이지만, 방위비 분담금을 포함한 한미동맹 비용 확대 요구, 그리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내용 개정, 무역 압박 등 전방위에 걸친 압박이 있을 것으로 예상된다.
지난해 선거 기간 동안 미국 국민을 상대로 4% 경제성장을 굳게 약속한 트럼프 정부는 2018년 미 의회 중간선거를 치르기 전까지 어떤 형태로든 가시적인 성과를 내야 하기 때문에 조만간 한국을 포함한 우방국들에 경제적 압박을 시도할 가능성이 매우 커 보인다. 이럴 경우, 문재인 정부는 결국 국제자유주의의 준수를 기치로 국가이기주의의 확산을 막아내야 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다.
5월 14일 중국에서 열린 ‘일대일로 국제협력 정상포럼’. 러시아가 참가했지만 서방 주요국 정상들은 불참했다.
외교문제를 국내 정치에 이용하지 않기를
이처럼 문재인 정부가 처한 외교안보 환경은 결코 녹록지 않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절대로 범해서는 안 되는 교훈이 있다. 외교를 국내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유혹에 빠져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어떤 상황에서도 대외관계의 ‘정치화(政治化)’는 가능한 한 피해야 한다. 전임 정부의 예를 들면, 북한을 상대로 ‘신뢰’를 쌓아야 한다는 문제의식은 옳은 것이었기에 북한의 방해와 예기치 못한 사건이 발생하더라도 이를 종합적으로 관리하면서 추진할 신뢰 프로세스의 정치적 의지와 콘텐츠가 필요했다.
하지만 돌이켜보면 ‘남북한 신뢰’와 ‘통일 대박’은 국내 정치적 목적이 더 컸던 것이 아닌가 하는 평가를 받는다. 중국의 2차대전 전승절 기념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우여곡절 끝에 소위 ‘망루외교’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것을 보고, 미국과 중국 사이에서 적절한 외교적 자세를 취하면서 실리를 챙기길 기대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일을 계기로 25년 가까이 어렵게 쌓아 올린 한중관계의 기반이 침식당하는 것을 보며 미·중 사이에서 균형외교는 슬로건에 그친 것이 아니었나 하는 아쉬움을 갖게 된다.
마지막으로 문재인 정부가 직면한 외교안보 환경과 관련해 새로운 제안을 해보고자 한다. 세계는 지금 소위 스트롱맨들의 등장으로 자유주의 정신이 위축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 푸틴 대통령, 아베 총리 등과 같은 국제무대의 지도자들은 물론, 이민자와 테러 문제로 골치가 아픈 유럽의 다수 국민들은 세계 시민들과의 공존에 인색한 편이다. 소위 21세기형 국가이기주의와 글로벌 자유주의의 움츠림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마약 퇴치를 명목으로 자국민에 대한 인권유린이 확산되고 있는 필리핀, 인종 갈등의 조짐이 다시 고개를 드는 남아공 등 지구촌 곳곳은 마치 갈 길을 잃어버린 모습이다.
이처럼 세계화가 잠시 숨고르기에 들어간 틈을 타서 인권, 환경, 여성, 빈곤 등과 같은 글로벌 이슈들에 우리 목소리가 담긴 외교정책을 발굴할 필요가 있다. 미·중 시대의 외교 환경이 힘에 부치고 북핵 문제 해결의 길이 안 보일수록, 문재인 정부는 고개를 들고 바깥 세계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국제사회가 직면한 새로운 위협들에 평화와 정의의 가치를 담아서 글로벌 스탠더드를 제공하는 노력이 요구되는 시점이다.
지금 국제사회에는 환경, 인권, 테러, 이민자 문제 등이 새로운 글로벌 안보 위협으로 자리 잡고 있는데, 이러한 어젠다에 외교력을 집중해서 국제사회에 한국의 역할을 마련하는 노력은 매우 중요하다. 우리는 늘 말만 앞섰지, 소위 국제사회의 신안보 위협을 해결하는 데에 적극적이지 못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메이드 인 USA’를 강조하며 자국 제품 구매를 권유하는 연설을 하고 있다.
글로벌 안보 위협에 외교력 집중해야
한반도는 초강대국들로 둘러싸여 있고, 이들 국가들은 우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만큼 풍부한 외교 자원을 확보하고 있다. 이들에 둘러싸여 동북아 지역에 매몰되는 한 한국의 외교에 미래는 없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필요하다면 독일도 벤치마킹하고, 무력은 약하지만 평화와 도덕을 무기로 국제사회의 외교 강국이 된 북유럽 국가들과 캐나다도 유심히 관찰해 우리만이 제공할 수 있는 평화와 정의의 외교전략을 고민한다면, 새로 출범한 문재인 정부의 정체성과도 잘 부합될 것으로 판단된다. 궁극적으로 북한 문제를 슬기롭게 해결하고 평화로운 방법으로 남북한 통일을 기대한다면, 평소 평화를 몸소 실천하는 모습이야 말로 가장 적극적이고 설득력 있는 노력이 될 것이다.
아직 출범 초기 시점이기는 하지만 문재인 정부는 국민들로부터 높은 지지를 받고 있다. 지난 수개월 동안의 외교안보 컨트롤타워 부재의 한계를 비교적 빠른 시간에 극복하면서 특사 외교를 포함해 발 빠른 조치들을 취하고 있고, 이러한 조치들은 긍정적인 결과로 이어질 것으로 기대된다.
하지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외교안보 환경은 매우 열악한 편이어서, 북핵 문제가 최악의 상황으로 치달을 가능성, 미·중 경쟁이 심화되어 한반도에 미칠 악영향, 그리고 국제자유주의의 위축으로 말미암아 대외의존도가 높은 한국의 국가이익이 침해될 가능성 등은 상존한다. 정부는 물론 다양한 행위자를 포함한 외교 역량 강화와 스마트한 외교전략으로 이러한 위기들을 극복하기 위한 만반의 준비가 필요한 시점이다.
박 인 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
미국 노스웨스턴대 정치학 박사.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연구교수 역임. 통일준비위원회 전문위원, 통일부·외교부·국방부 정책자문위원(현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