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진욱 통일연구원장
중국은 1979년 1월 1일을 기해 미국과 대사급 공식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1949년 중국 대륙이 공산화된 지 30년 만이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당시 워싱턴에서 미·중관계의 정상화가 이렇게 지연되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을 것이다. 6·25전쟁(1950~53년)으로 전 세계적 냉전이 시작됐으며 미·중관계는 극도로 악화됐다. 이후 중국의 대약진 운동, 대만해협 위기, 문화혁명 등 중국의 불안정과 중국 지도부의 강경한 입장으로 미·중관계 개선 환경이 조성되지 못했다.
그렇다고 닉슨 대통령 이전에 미국이 아무것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케네디 대통령은 상원의원 시절인 1957년 외교 전문지 <포린어페어즈> 기고를 통해 미국의 대중국 정책이 너무 경직된 것이 아닌가 하는 문제 제기를 했고, 대통령이 된 후에는 중국의 대기근에 대한 대규모 인도적 지원을 검토하기도 했다. 케네디 대통령의 시도는 훌륭했으나 중국의 경직된 태도로 빛을 볼 수 없었다. 결국 미·중관계는 1972년 기회를 포착하고 그 기회를 놓치지 않은 닉슨 대통령의 역사적 베이징 방문과 마오쩌둥 주석과의 정상회담으로 극적인 돌파구가 마련됐다. 미·중관계의 역사적 모멘텀을 마련한 닉슨 대통령의 통찰력과 이에 못지않게 중국의 정세와 의도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바탕으로 한 케네디 대통령의 자제력 역시 역사는 평가하고 있다.
남북 고위급 접촉의 극적인 8·25 합의 이후 남북관계 진전에 대한 기대가 높아지고 있다. 경험적으로 보면 기대감은 종종 좀 더 적극적으로 속도감 있게 남북관계에 임하라는 요구로 이어진다. 사실 8·25 합의 직후 5·24 조치 해제와 남북 정상회담에 대한 요구도 있었다. 남북관계 낙관론의 근거는 북한의 의지, 주변 상황에 대한 분석 등 수 없이 많다. 문제는 비관론의 근거 역시 그 못지 않게 많다는 것이다. 과거 남북관계는 이와 같은 낙관론과 비관론이 교차하면서 진전과 후퇴를 반복했다. 북핵 문제의 해결 없이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비관론과 대북 지원과 남북 경협만 확대되면 북한의 변화는 불가피하다는 낙관론 사이에서 남남갈등만 커졌다.
남북 간 불신과 대결의 악순환을 끝내기 위해서는 천천히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이를 위해서 북핵 문제나 정치적 문제에도 불구하고 남북 간 문제를 방치하지 않고 대화와 대북 인도적 지원을 지속하는 인내력과, 지나친 욕심을 버리고 남북관계를 차근차근 진전시키겠다는 자제력 모두 필요하다. 남북관계 진전은 과속도 정체도 아닌 남북 간 신뢰의 정도에 맞는 정속도로 가야 한다. 정속도는 남북관계 초기 단계에서 특히 중요하다.
8·25 합의로 남북관계는 대결에서 대화 모드로 전환됐다. 대화 모드를 협력 모드로 전환하고 지속 가능한 모드로 정착시키려면 북한 정세와 의도에 대한 정확한 분석을 바탕으로 타이밍을 포착하고, 북한의 변화를 견인할 수 있는 의지와 능력을 겸비해야 할 것이다.
조봉현
동아대학교 경제학박사. 현재 민주평통 상임위원, 통일부 정책자문위원, 개성공단 자문위원, 북한연구학회 부회장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