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적으로 반전되는 듯하던 남북관계가 북한의 장거리 로켓 발사 및 핵실험 위협으로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는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 전문가들의 좌담을 통해 남북관계 현안과 의제를 진단하고 해법을 모색했다.
■ 일 시 | 2015년 9월 16일 오전 10
■ 장 소 | 동아일보 충정로사옥 회의실
■ 사 회 | 윤영호 동아일보 출판국 부국장
■ 참석자 | 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남광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
성기영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이 석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가나다 순)
사회 반갑습니다. 남북관계가 8·25 고위급 접촉 합의 이후에도 여전히 살얼음판 위를 걷는 느낌입니다. 우선 8·25 고위급 접촉 합의 이전의 박근혜정부 남북관계를 간단히 짚어볼까요.
김근식 박근혜정부의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는 문제의식과 접근방식이 나쁘지 않습니다. 현 정부 출범 이후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가동할 수 있는 몇 번의 모멘텀도 있었지만 정부의 강경 입장으로 기회를 놓쳤습니다.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일이 진행되는 것인데 다행히도 이번 8·25 합의로 기싸움 끝에 대화 국면을 여는 데 성공했습니다. 이제 남과 북이 이행을 잘해서 박근혜정부 임기 내에 큰 진전이 있기 바랍니다.
이 석 북한이 참 답답할 것으로 느껴집니다. 과거에 비해 국내에서 대북정책을 둘러싼 남남갈등 소지가 줄었고 북한이 배제된 채 우리 정부가 직접 중국, 미국과 통일 문제를 협의하고 있습니다. 우리 정부는 북한이 도발하면 원칙으로 대응해서 북의 의도가 거의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북한 처지에서 보면 얻은 것은 없고 국제적으로 고립만 됐습니다. 지금까지는 북한에 대한 압박이 스마트했습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북한을 코너에 몰아넣는 것은 우리 정부의 입장도 아니고 바람직하지도 않다고 생각합니다.
남광규 박근혜정부 임기 중반에 새로운 모멘텀이 마련됐으나 합의 내용 해석에 모호한 부분이 있어 아직은 북한의 요구에 대한 접점을 만들기가 쉽지 않은 상황입니다. 노동당 창건일 전후의 북한 장거리 로켓 발사 여부는 남북관계 정상화 국면의 큰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성기영 8·25 합의 과정에서 안보와 교류협력의 균형에 대한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인식 틀을 일관되게 보여주었습니다. 남북관계 진전은 말이나 설계도에 의해서가 아니라 되돌릴 수 없는 이익과 목표를 발견한 개성공단처럼 공동의 이익과 목표를 찾아나가야 합니다.
로켓 발사 도발, 통치 재원 조달에 치명타
사회 북한 노동당 창건일 전후의 장거리 로켓 발사와 추가 핵실험 문제가 중대 현안으로 떠올랐습니다. 어떻게 전망하시는지요.
이석 우리가 남북관계를 아무리 좋게 가져가려 해도 핵은 국제 문제입니다.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우리도 국제적 사안에 대해서는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습니다. 다만 이산가족 상봉은 우리 국민이 절실히 요구하는 우리의 이익이기 때문에 그대로 가고, 로켓 발사에 따른 국제사회 제재나 비난에는 동참해서 공을 북에 넘겨줘야 합니다.
남광규 북한 내적 필요성과 상징성, 그리고 이벤트 차원에서 로켓 발사 가능성이 높습니다. 로켓 발사는 남북관계는 물론이고 북·중, 북·미관계에 아주 나쁜 영향을 끼칠 것입니다.
성기영 남은 기간에 북한에 대한 자제 요구, 자제되었을 경우 어떤 이익이 있는지를 암시하는 막후 외교 채널을 가동해야 합니다. 만에 하나 북한의 로켓 발사가 강행된다면 한미 정상회담의 메시지는 사전에 조율해온 어젠다가 뒤로 밀리고 강력한 규탄과 함께 유엔을 통한 다자 간 제재 문제가 앞머리에 올라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북한은 이를 한국의 합의 위반으로 간주해서 이산가족 상봉을 막판에 철회할 수도 있겠지요.
김근식 저는 북한이 판을 깨기로 결심한 것은 아니라고 봅니다. 한미 정상회담, 미·중 정상회담을 앞두고 대외 과시용 성격이 강하다고 봅니다. 과거에 장거리 로켓 발사는 대외용 벼랑끝 전술이나 대내용 목적으로 활용해왔는데, 과연 당 창건일이 그러한 비중이 있는지 의문입니다. 과거 패턴을 종합해보면 북한으로서는 ‘우리가 이런 카드를 가지고 있다’는 차원에서 만지작거리고 있을 뿐이고, 로켓은 발사하지 않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게 합니다.
성기영 기존의 군사회담은 남북 교류협력 사업에 따른 군사적 보장이 주요 어젠다였습니다. 그러나 군사회담의 핵심 어젠다는 긴장 완화와 신뢰 구축 방안입니다. 군사 문제는 금기의 영역이 아닙니다. 군사적 문제를 제의해서 손해 볼 것이 없다는 생각을 해야 합니다.
사회 북의 경제 상황이 과거보다 호전되고 있는데 이 점이 로켓 발사 도발이나 남북관계에 끼치는 영향은 어떻게 보십니까.
이석 북한 주민들의 생활은 상대적으로 좋아졌지만 외화 상황이 좋지 않습니다. 각종 대외적 도발에 따른 비용이 너무 컸습니다. 중국 시진핑 국가주석 집권 이후 북·중관계에도 악영향을 끼쳤습니다. 북한은 내부적으로 현금이 필요한데, 국제적 도발이 또 다른 비용을 지불케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금강산 관광에 대한 기대도 큰 상황인데 이런 요인들이 일정한 제동 역할을 할 것으로 생각합니다
남광규 북한은 경제회생 마스터플랜을 2년 전부터 발표해왔지만, 자생적으로 이루어진 장마당을 중심으로 경제성장이 이루어지고 있습니다. 여기에 얹혀가는 권부도 통치자금이 거의 바닥으로 가고 있습니다. 북이 이번에도 체제의 특수성을 우선하여 자기 논리를 고집할 경우 경제적으로 마이너스를 불러일으키는 한편으로 통치에 필요한 경제적 재원 확보에도 치명타를 줄 것입니다.
<사진>성기영 통일연구원 연구위원
성기영 남북 협상의 어젠다가 굉장히 포괄적으로 열려 있기 때문에 남북한 서로가 바라보는 것이 다릅니다. 북한은 경제협력과 5·24 조치 등 제재 해제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데 비해 우리는 인도주의적 문제를 얘기하고 있습니다. 어느 시점에 가면 이것저것 줄다리기를 할 텐데, 한 테이블에 올려놓고 주고받는 협상을 해야 합니다. 빨리 하면 상황을 관리하는 우리의 주도적인 능력을 보여주는 효과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진>김근식 경남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김근식 8·25 합의 이후 정부의 입장이나 방향과 관련해 세 가지를 당부하고 싶습니다. 첫째, 합의의 지속성을 분명히 고수해야 합니다. 정부는 북한이 먼저 깨지 않는 한 합의한 내용을 적극적으로, 선제적으로 가동하는 것을 시작해야 합니다. 둘째는 의제의 포괄성을 고수해야 합니다. 남북이 그동안 대화 의지를 밝혔으나, 북은 정치군사적 의제, 남은 사회경제적 의제를 고수해 무산됐습니다. 이제는 다 테이블에 놓고 협상을 병행하면 좋겠습니다. 셋째는 이산가족 상봉이 정상적으로 이루어진다면 신뢰의 상호성을 견지하는 차원에서 북에 뭔가 주는 것을 생각해봤으면 합니다. 과거 정권과 같은 대규모 쌀과 같은 것보다는 최근 태풍으로 큰 피해를 본 나진지역에 인도적, 동포애적 관점에서 먼저 이재민을 돕겠다고 나서는 것 등을 검토할 수 있습니다.
이석 남북 간 협력에 대한 인식을 정부가 바꿔야 합니다. 무엇보다 단순하고 정직하게 협력해야 합니다. 과거 쌀 지원에 대해 인도적 지원을 표방했지만 실제로는 모니터링을 이유로 차관으로 주었습니다. 장관급 회담, 이산가족 상봉 등과 다 연결된, 단순한 협력이 아니라 복선이 깔려 있었습니다. 남북 협력은 국제적 기준에 따르되 이산가족 상봉과 같은 인도적 문제는 좀 더 단순하고 정직하게 진행할 것을 제안하고 싶습니다.
금강산 관광 재개까지 갈까
사회 5·24 조치 해제나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는 어떻게 전망하시는지요.
김근식 5·24 조치 해제는 북한과의 협의 과정에서 입구가 아닌 출구로 자리 잡아야 합니다. 5·24 조치 해제는 천안함 폭침 문제와 직결돼 있습니다. 천안함 폭침 문제는 우리도 북에 양보하기 어려운 사안입니다.
금강산 관광 재개는 정부도 5·24 조치와 분리해서 북과 협의할 용의가 있는 것 같습니다. 사실 북한도 2010년 2월 실무회담에서 진상 규명, 재발 방지, 신변 보장 등 우리의 요구 사항을 대부분 수용한 적이 있습니다. 현금이 들어가서 다소 신중하게 접근할 문제이지만 약간의 우회전략을 갖고 임한다면 협상 테이블에서 논의될 문제입니다.
<사진>남광규 고려대 아세아문제연구소 교수
남광규 우리 정부는 북한의 도발로부터 이 두 문제가 비롯된 것이기 때문에 북한이 좀 더 책임 있는 조치를 취하느냐를 관건으로 보고 있습니다. 이 부분을 둘러싸고 남북 간에 치열한 논전이 펼쳐질 것으로 전망되지만 이산가족 상봉이 예정대로 이루어지면 민생 지원, 취약계층 지원을 먼저 해본 후 다음 단계로 두 가지 문제가 논의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성기영 북한은 굉장히 명분을 중요시하는 것 같지만 실리를 챙기는 데도 밝습니다. 예를 들어 우리 정부 입장에서 비무장지대(DMZ) 세계생태평화공원과 경원선 연결을, 북한 입장에서 금강산 관광 재개를 상호 연계해 공동의 이익을 찾아낸다면 천안함 폭침에 대한 사과 형식과 내용이 그 안에서 조율될 여지가 생길 것으로 봅니다.
이석 5·24 조치는 한국 정부가 특정한 군사안보 문제 때문에 최초로 내린 경제제재 조치입니다. 상황이 변했다 해서 풀 수 있는 조치가 아니라는 얘기입니다. 만약 그런 일이 벌어진다면 한국이란 나라가 입는 국가적 손실이 클 것입니다. 따라서 북한과 5·24 조치 해제를 논의는 하되 사과 없이 함부로 해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금강산 관광 재개 문제도 마찬가지입니다. 속성상 현금이 들어가는 데다 유엔의 제재 대상인지 논란이 있을 수 있습니다. 한번 풀어주면 상황에 따라 다시 묶고 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
북은 한국을 통해서 미·중과 접촉하는 게 유리
사회 끝으로 남북관계 진전을 위한 과제를 살펴주십시오.
성기영 우선은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의 정신으로 돌아갈 필요가 있습니다. 안보와 교류협력의 균형, 협상과 억지력의 균형, 남북 협력과 국제 공조의 균형은 단순한 중립의 의미가 아니라 상황 전개에 따라 필요한 카드를 탄력적으로 쓸 수 있는 자세나 준비를 의미합니다. 북한이 장거리 로켓을 발사했다고 한쪽으로 쏠리거나, 남북 합의를 이끌어냈다고 승리 모드에 접어드는 단기적인 대응은 자제할 필요가 있습니다. 어차피 남북관계는 장기 안정성이 목표입니다. 경제 분야에서 공동의 이익과 목표를 발견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해서 다양한 의제를 상호 연계해 남북관계를 멈추지 않고 계속 굴러가게 하는 그런 태도가 필요합니다.
<사진>이석 한국개발연구원 연구위원
이석 북한과의 경협은 우리가 북한을 끌어안기 위해 접근하는 것이 맞습니다. 경협은 단순하고 정직해야 합니다. 만에 하나 북한이 장거리 로켓을 발사하고 핵실험을 해서 이산가족 상봉이 무산된다면 그 어느 때보다 제재의 목소리가 높아지고 북한을 압박하게 될 것입니다. 북한이 이런 경제제재를 쉽게 빠져나갈 것으로 보이지 않고 체제의 불안정성이 높아질 것입니다. 북한은 한국을 통해야만 미국을 가고 중국을 갈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남광규 리트머스는 이산가족 상봉입니다. 순조롭게 진행되면 남북관계가 탄력을 받을 것입니다. 이제는 정치 논리보다 철저히 경제 논리에 입각해서 북한도 도움이 되고 우리에게도 도움이 되는 방안을 찾아내는 새로운 단계로 진입해야 합니다. 이런 것에 익숙해지는 것이 북한 체제의 안정성에도 도움이 될 것입니다.
김근식 우리 정부와 국민의 통일에 대한 기대와 준비는 필요하겠지만 이것을 전면에 내세울 필요는 없습니다. 남북대화 국면에 방점을 찍고 통일에 대한 담론을 수면 아래로 내려놓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