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45주기 이승복 추모식. 해마다 10월 셋째 주 목요일에 행사가 열리고 있다.
1968년 11월 2일 삼척 · 울진 지방에 침투한 무장공비에게 무참히 살해당한 이승복 어린이를 기리는 이승복기념관이 최근 안보의 중요성이 부각되면서 다시금 주목받고 있다. 개관 40년을 맞이하는 이승복기념관의 성과와 과제를 살펴본다.
1975년 개관한 이승복기념관의 누적 관람객이 올해 2000만 명을 넘어설 전망이다. 이승복기념관 측에 따르면 누적 관람객은 2007년 1200만 명을 넘어섰다가 꾸준한 증가세를 보여 올 9월 현재 1940만 명을 기록 중이다. 이는 전 국민의 3분의 1 이상이 기념관을 찾은 것으로 명실상부한 대표적인 안보기념관의 위상에서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기념관 측은 “그동안 수학여행 방법 변경으로 학생 단체 관람객이 감소하고 신종플루, 세월호 사건, 메르스 여파로 관람객이 줄었으나 최근 비무장지대 내 목함지뢰 및 포격 도발 등으로 안보의 중요성이 부각됨에 따라 점차 증가될 것으로 예상된다”고 밝혔다.
기념관은 1968년 당시 9살의 어린 나이에 무장공비들에게 항거하다 무참히 살해당한 승복군의 넋을 위로하고 청소년의 통일안보 교육의 장으로 활용하기 위해 영동고속도로 개통과 함께 대관령 정상에 ‘이승복반공관’이란 이름으로 1975년 설립됐다. 기념관은 1982년 승복 군의 묘소 이전과 동시에 유품을 모아 강원 평창군 용평면 속사리 운두령 700m고지 약 12만㎡ 부지에 ‘이승복기념관’으로 확장 이전했다. 영동고속도로 속사나들목에서 5분 거리에 있어 접근성도 좋고, 계방산 노동계곡 입구에 넓은 녹지공원으로 자리 잡아 쉬어가는 공원시설로도 각광받고 있다.
기념관은 승복 군의 유품을 전시하고 일대기 영화를 상영하는 주 전시실과 생태학습관, 생가 모형, 군사장비 전시실 등 모두 1200여 점을 소장한 10여 개 전시관을 갖춘 종합 전시관이다. 분단 조국의 아픈 역사를 간직한 살아 있는 안보 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1959년 12월 9일 계방산 기슭의 목골재 아래에서 화전민의 아들로 태어난 승복 군은 1968년 11월 2일 삼척·울진 지방에 침투한 무장공비에게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항거하다 무참히 살해당했다.
기념관의 자체 사업도 비교적 활발하다. 매년 ‘통일 기원 나의 주장 발표대회’가 열리고 기금 10억 원 규모의 ‘이승복장학회’도 운영 중이다. 이승복 추모 행사는 두 가지다. 매년 10월 셋째 주 목요일에 평창교육지원청이 주관하는 ‘이승복 군 추모식’과 이와 별도로 11월 2일에 전국영관장교연합회가 주관하는 ‘이승복 추모제’가 열리고 있다.
‘통일 기원 나의 주장 발표대회’는 강원도 내 학생들을 대상으로 열리는데 올해로 43회째를 맞이했다. 이승복장학회는 강원도 내 학생 약 120명을 대상으로 장학금과 나의 주장 발표 대회 시상금, 관내 학생 해외 어학연수 지원, 장학활동 지원금 등에 매년 약 3000만 원의 장학금을 지급하고 있다.
<사진>기념관에 자리한 이승복 동상. 전국 초등학교에 있던 이승복 동상은 1990년에 철거됐다.
기념관은 올해 제47주기 추모식을 강원도 평창교육지원청 주관으로 유가족, 동문, 지역 기관단체장, 지역주민 등이 참여하는 전국 단위 행사로 거행할 예정이다. 기념관 측은 “이승복반공관 개관 당시 박정희 대통령과 현재의 박근혜 대통령이 참석했고 이승복기념관으로 확장 개관할 때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 기념식수를 할 정도로 국가와 국민의 각별한 관심을 받았다”고 소개했다. 특히 2009년 12월 9일 제41주기 추모제에는 당시 삼척·울진지구로 침투한 공비 120명 중 토벌작전에서 생포됐던 2명 중 한 사람인 김익풍 씨가 참석해 유족에게 사과하고 화해를 청해 주목을 받았다.
기념관에 닥친 시련도 적지 않았다. 그 가운데 1968년 12월 11일 조선일보가 보도한 이승복 사건 조작설이 1992년부터 1998년까지 일부 언론에서 제기되자 민·형사상 법정소송이 이어진 것이 대표적이다. 이 소송은 2006년 11월 24일 형사재판과 2009년 2월 12일 민사재판 등이 대법원의 사실 확인 확정 판결로 종결됐다.
교과서에서 이승복 군 이야기가 완전히 사라진 것도 아쉬움이 남는 대목이다. 1969년 이후 이승복 군 이야기는 초등학교 도덕 교과서에 실린 반공의 상징이었다. 1984년 제4차 교육과정까지는 초등학교 5학년 2학기 교과서에 상세히 기술됐으나, 1988년 7·7선언(민족자존과 통일번영을 위한 특별선언) 발표 이후인 1990년 제5차 교육과정에서 4쪽 정도로 간략하게 소개되다 1997년부터 교과서에서 완전히 삭제됐다.
최두순 관장은 “이승복 군의 항거에 대한 진실이 호도되고 잊혀져가는 현 세태에 대해 안타까운 심정을 금할 길 없다”면서 “어르신들뿐 아니라 젊은 세대의 안보관과 통일 염원을 바라는 신안보세대의 출현을 계기로 기념관을 확충하고 안보와 통일 관련 전시물을 다양화해 통일 이후에도 후손들에게 조국의 분단과 민족의 아픔을 잊지 말도록 계승·발전시켜야 한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