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2007년 7월 19일 개막된 제62차 유엔총회에서 각국 대표들이 묵념하고 있다. 반기문 사무총장 취임 후 처음 열린 총회로 지구온난화, 테러리즘 문제와 함께 유엔에서 가장 강력한 기구인 안전보장이사회 개편 등을 집중 논의했다.
대한민국이 광복 70주년을 맞이한 올해는 유엔도 창설 70주년을 헤아린다. 한국과 유엔은 역사적으로 매우 특별한 관계를 유지했다. 반기문 사무총장을 배출한 한국과 유엔의 역사적 인연, 그리고 통일 전후 유엔의 역할, 한국의 유엔외교 방향을 짚어봤다.
유엔(UN, 국제연합)은 오늘날 한국인에게 가장 친근한 단어 가운데 하나다. 대한민국이 광복 70주년을 맞이하는 올해는 유엔 창설 70주년의 해이기도 하다. 1945년 한국이 제2차 세계대전 종전과 함께 식민지에서 독립했고, 국제사회도 곧바로 유엔을 탄생시켰다. 연륜을 같이한 유엔과 한국은 초기부터 인연을 맺기 시작해 건국으로부터 현재 반기문 사무총장까지 매우 특별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한국은 국제사회에서 ‘유엔의 자손’이라고 불릴 정도이다.
한국과 유엔의 인연은 1947년 9월 미국이 ‘한국 독립’ 문제를 제2차 유엔총회에 안건으로 제출하고, 그 결과 유엔 감시하의 ‘남북 총선거’ 실시가 결정된 것으로 시작됐다. 그러나 소련의 반대로 북한지역의 선거가 불가능해지자 남한지역에서 ‘단독 총선거’를 실시하게 됐다. 유엔한국위원단의 관리하에 남한 전체에 걸쳐 1948년 5월 10일 역사상 처음으로 자유민주적인 총선거가 실시됐고 제헌국회가 구성됐다. 곧이어 7월 17일 헌법이 제정·공포되고 이승만 초대 대통령을 선출한 데 이어, 8월 15일엔 드디어 대한민국 정부 수립이 선포됨으로써 근대국가로서 새롭게 출발하게 됐다. 정부의 노력에 따라 제3차 유엔총회는 신생 대한민국 정부가 ‘한반도의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압도적인 지지로 승인했다. 유엔의 관여와 지원은 한국의 정통성과 국제적 권위를 부여함으로써 독립국가의 출범을 보장한 것이다.
유엔과의 또 다른 인연을 맺은 것은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을 때였다. 유엔이 군사적 지원을 통해 우리의 주권과 영토를 지켜준 것이다. 북한의 기습적인 남침 공격이 있자, 유엔 안보리는 즉시 그 불법성을 지적하고 유엔 회원국들의 지원을 권고했다. 결국 미국 등 16개 회원국 군대가 유엔군사령부 지휘 아래 연합군으로서 참전해 북한군을 격퇴함으로써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체제 수호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또한 유엔은 미국과 함께 휴전협상 당사자가 돼 1953년 휴전협정 체결에 참여했다.
유엔은 역사상 최초로 헌장의 핵심 안보장치인 ‘집단안보’를 발동해 회원국의 단결된 군사력으로 침략자를 응징·격퇴했다. 나아가 다른 국제기구들과 더불어 의료, 식량 제공 및 민간구호 그리고 교육 지원활동을 전개해 전후 복구 및 국가 재건에 기여했다.
하지만 유엔 회원국 가입을 위한 정부의 외교적 노력은 오랜 냉전 상황에서 불가능했다. 1980년대에 이르러 유엔 가입을 위한 외교 노력을 강화했고 특히 ‘북방외교’를 활발히 추진한 결과 성공적인 올림픽 개최, 동구권 및 소련과의 수교 등 국제정세 변화에 힘입어 1991년 유엔 가입이 성사됐다. 한국의 유엔 회원국 가입은 한국 외교와 국제적 역할에 새로운 전기가 됐다. 한반도 문제의 ‘유엔화’와 더불어 유엔 문제의 ‘한국화’가 이뤄짐으로써, 한국 외교의 지평이 한반도 문제를 넘어 글로벌 이슈와 다자외교 분야로 대폭 확대되는 것을 의미했다.
한국은 비록 유엔 가입 후발국이지만 이미 경제적 중견국 지위와 상당한 정치·외교적 역량과 의지를 갖고 있었다. 마침 탈냉전 시대에 각종 지역 분쟁이 증가하고, 난민, 환경, 테러, 핵확산 등의 문제가 속출해 각 분야별로 유엔의 활동 수요가 폭발적으로 늘어났다. 한국은 이에 맞춰 중견국가의 위상에 걸맞게 유엔에서 재정적, 외교적, 군사적으로 기회를 확대해왔다. 지난 25년여간의 적극적인 유엔 활동의 결과 유엔 분담금 12위를 포함해 두 번의 안보리 비상임이사국과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 배출로 상징되듯 유엔의 중추국 위상을 갖고 있다.
세계로 향하는 다자외교의 기회와 수단 제공
<사진>지난해 11월 11일 6·25전쟁 당시 대한민국과 세계평화를 위해 싸우다 고귀한 생명을 바친 유엔군 참전용사의 희생과 넋을 기리는 ‘TURN TOWARD BUSAN’ 국제 추모행사. 참전 21개국의 국기를 든 의장대가 추모식이 진행되는 동안 전사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추모명비 앞에 도열했다.
유엔은 향후에도 한국의 국제적 영향력 제고 그리고 민족의 염원인 한반도 통일을 위해서도 더욱 많은 역할을 할 여지가 크다. 우선 유엔은 선진 중견국인 한국에 세계로 향한 매우 유용한 다자외교, 나아가 ‘소프트 파워’ 행사의 기회와 수단을 제공할 것이다.
한국은 최빈국에서 경제 선진국으로, 원조 수혜국에서 공여국으로 발전한 유일한 국가인 점에서 국제사회의 주목을 받고 있다. 성공적인 산업화 및 민주화의 경험을 바탕으로 유엔과 대다수 회원국이 필요로하는 민주주의, 개발, 교육, 보건의료, 정보통신기술(ICT) 등 각 분야별로 활동을 지원할 수 있다. 유엔은 전 세계 국가와 더불어 국제적인 난제 해결과 국제규범 및 보편적인 가치의 신장을 도모해 국제사회에 기여하는 장소와 기회가 된다.
좀 더 직접적으로 유엔은 통일 과정과 통일 후 한반도 평화와 안정에 다양하게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유엔은 이미 지난 수십 년간 북한의 도발 사태 등 정전협정 위반에 대한 경고 및 휴전 상황 관리를 통해 많은 기여를 해왔다. 특히 안보리는 북한의 핵개발과 미사일 발사 등 핵확산방지조약(NPT)과 유엔헌장 위반 사항을 적시하고, 포괄적인 경제제재를 부과하고 있다. 또한 북한의 조직적인 인권 유린에 대해 특별보고관이나 인권조사위원회(COI) 차원의 활동을 하고, 인권이사회와 총회 결의를 통해 그 문제를 심각하게 제기해왔다.
이러한 조치는 북한 핵문제나 인권 문제가 단순히 한반도 안보나 국내 문제가 아닌 국제평화에 대한 위협이 되는 심각한 국제 문제로 규정하고 국제사회의 단결된 대웅을 결집하는 것이다.
나아가서, 향후 통일 과정과 통일 이후 유엔의 잠재적 역할이 적지 않다. 유엔은 남북한 간 중재를 통한 평화적인 접근, 그리고 북한의 급변사태 시 다양한 상황에 맞추어 군사적 개입, 평화유지활동(PKO) 전개, 난민 보호 및 치안 유지 등을 할 수 있는 여지도 크다. 가령 적절한 여건이 주어지면, 유엔 사무총장이나 총회 혹은 안보리는 한반도 문제의 중재나 화해 등을 주선하거나 직접 관여할 수 있다. 남북한의 동의나 협력을 바탕으로 평화적인 대화와 협상을 통해 핵문제 등 현안을 해결하고, 국제적 책임과 지원하에 통일을 향한 노력을 지원할 수 있을 것이다.
만약 북한 내부에서 급변사태가 발생하는 경우, 유엔은 상황에 따라 다양한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다. 가령 북한 정권의 붕괴, 군부 쿠데타, 또는 주민들의 대규모 소요사태 등으로 심각한 혼란이나 상당한 인명 피해 상황 등이 생길 수 있다. 이 경우 한국은 북한지역이 ‘한반도 영토’이므로 주권 행사 차원에서 자위적 조처로서 단독 혹은 한미동맹에 의해 군사적 개입이 가능하다.
유엔 안보리는 헌장 제7장에 의거해 군사적 혹은 비군사적 강제조치를 강구할 수도 있다. 특히 북한에서 ‘광범위하고 조직적인 살상’ 등으로 대규모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경우 집단 학살 혹은 반인도 범죄에 해당되는지에 따라 국제사회의 ‘보호 책임’ 원칙을 적용(리비아 사례)해 군사적 개입도 가능하다. 더불어 대규모 북한 난민 발생 시, 유엔의 난민 보호 및 인도적 지원 활동을 하는 기구들의 적극적인 조치가 중요해진다.
또한 북한의 소요사태 정도와 단계에 따라 유엔의 PKO 활동 전개를 통해 북한지역의 안정화 관리에 개입할 수도 있다.
PKO 활동은 필요에 따라 치안 유지부터 주민 보호, 인도적 구호품 배급, 감독 등이 우선 시 급한 활동이 될 수 있다. 더구나 상황 전개에 따라 통일 이후 과도적으로 국가 재건, 즉 법치, 행정, 교육 등의 평화 구축 기능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가장 우려스러운 사태는 북한이 또다시 전면적인 도발을 하는 경우다. 이 경우 한국이 우선 ‘정당방위’의 자위적 수단으로 자체적으로 혹은 한미동맹에 따라 신속한 군사적 대응을 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아가서 유엔 안보리가 사태에 따라, 대규모 군사작전(강제조치 혹은 안정화 작전)이나 해상 및 공중 봉쇄, 무기 금수, 각종 경제제재 등의 조치를 부과할 수 있다.
만약 북한이 핵무기 사용을 시도한다면, 안보리의 긴급 개입은 더욱 중요해질 것이다. 안보리의 조치는 북한의 핵무기나 핵시설 등에 대한 기습이나 지휘체계의 파괴 등을 통해 핵 사용을 차단하는 선제적 노력을 포함할 수도 있다. 물론 유엔의 관여에는 미국은 물론 중국 같은 이해당사국의 지지 및 협력이 중요해지므로, 이에 대한 외교적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더구나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이 여전히 한반도 안정과 통일의 주도적 영향력을 갖도록 세밀한 준비와 전략적 노력이 필요함은 물론이다.
유엔 통해 세계 이익 도모하는 국가적 비전 지향
<사진>미국 뉴욕 유엔본부 전경.
오늘날 국제사회에서 유엔은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라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세계가 당면한 많은 국제적인 난제, 예를 들어 지역 분쟁, 핵 확산, 빈곤, 저개발, 기후변화, 질병, 인권 유린, 극단주의, 난민 문제 등을 해결하기 위한 국제적 협력을 촉진하는 데 유엔은 주도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창설 이래 지난 70년간 유엔 자체의 지속적인 변화와 혁신에도 불구하고 유엔이 좀 더 효율적이고 강력한 기구로 역할을 하기에는 역부족이라는 평가가 많은 것이 사실이다. 동시에 유엔은 세계정부가 아니며 주권국가들의 연합체라는 점에서, 제한된 재원과 인력 측면에서 근본적으로 제약을 갖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글로벌 거버넌스 시대에 유엔의 역할 강화에 대한 국제사회의 요구와 기대는 여전히 크다. 이러한 주문은 유엔의 구조와 권한에 대한 개혁을 촉구하는 문제로 거론되고 있다. 달리 말해 유엔의 핵심기관인 안보리의 구조 개혁과 운영 방법 개선은 물론 총회의 권한 강화, 신탁통치이사회의 활용, 나아가 PKO 활성화 등의 문제가 있다. 또한 만성적인 재정난을 해소하기 위한 재정 확충 방안, 그리고 행정 및 관리제도의 비능률 및 낭비 등의 문제는 유엔의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계속 제기되는 개혁 의제다.
특히 안보리의 5개 상임이사국(미국, 영국, 프랑스, 중국, 러시아)의 특권적 지위와 거부권(Veto) 문제와 관련해 안보리의 근본적인 구조개혁 문제는 민주성과 대표성 등 유엔의 정당성에 관련된 매우 중요한 의제로 계속 논의되고 있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유엔이 각국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대립하는 국익의 각축장이라는 점에서 유엔 개혁 문제에 대한 합의는 어려운 문제로 남아 있다.
이와 같은 유엔의 역할 강화를 둘러싼 문제와 논의는 우리 한국에도 도전과 기회를 동시에 제공한다. 한국과 유엔은 여러 측면에서 서로를 필요로 하는 보완적 입장이기 때문이다. 한국의 비극적인 역사와 분단 현실은 아이러니하게도 유엔의 개입과 지원을 통해 유엔의 존재가치와 역할을 보여주었다.
한국은 유엔의 가장 큰 수혜국인 동시에 유엔의 가장 모범적인 성공 사례다. 유엔의 특별한 지원에 힘입어 오늘날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정착을 통해 경제 선진국, 그리고 중견 외교국으로서 기반을 구축했다. 한국은 이제 견실한 선진 중견국가로서 유엔이 추구하는 국제평화 및 안전의 구현에 더욱 기여함으로써 좁은 국가이익을 넘어 세계이익을 함께 도모하는 국가적 비전을 지향해야 한다.
유엔 활동의 확대, 주요 의제의 개발 및 주도, 그리고 개혁 노력에도 적극 참여하는 성숙한 유엔외교를 추진해야 하는 것이다. 한국에 유엔이 유용한 기회를 제공하듯, 또한 유엔은 한국과 같은 열정적인 활동국가를 필요로 한다. 광복 70년과 창설 70년 기간을 통해 특별한 인연을 이어온 한국과 유엔의 관계는 서로의 미래를 위해서도 지속돼야 할 것이다.
박흥순 선문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남캐롤라이나대 정치학 박사. 한국 유엔체제학회장을 역임했으며 현재 유엔한국협회 부회장,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집행위원, 외교부 정책자문위원으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