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사가 환자의 병을 진단할 때 증상 자체만 봐서는 처방을 제대로 하기 어렵다. 증상의 연원과 원인을 고려하지 않은 처방으로는 완치가 힘들기 때문이다. 이런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대개 고개를 끄덕인다. 그런데 어떤 역사적 사건을 해석할 때는 지나치게 표면적인 문제에만 매달리는 자기모순을 쉽게 접할 수 있다.
영화 ‘남한산성’이 히트하면서 ‘주화파 최명길이 옳았는가’, ‘척화파 김상헌이 옳았는가’라는 케케묵은 이분법적 질문이 다시 회자되는 것이 좋은 예다. 헛된 명분에 붙들려 국난을 초래했다면서, 당시 위정자들을 싸잡아 비난하는 태도도 수준이 낮기는 매한가지다.
일국의 권력을 장악한 기득권 세력이 현실의 이해관계를 도외시한 채 한갓 명분에만 휩싸여 국사를 그르친 경우는 동서고금 역사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이는 권력을 잡은 자는 본능적으로 현실적일 수밖에 없음을 에둘러 잘 보여준다.
병자호란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 또한 예외가 아니었다. 김상헌을 비롯해 척화(斥和)를 부르짖은 양반 엘리트는 당시 조선에서 가장 똑똑한 자들이었다. 그런데도 그들은 질 줄 알면서도 왜 전쟁을 택했을까? 그들 모두 집단적으로 바보였기 때문일까?
인조 정권이 전쟁을 피하지 못한 이유는 전쟁의 승패보다 더 중요한 가치를 신봉했기 때문이다. 이런 말을 하면, 왕조의 존망 곧 생사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과연 무엇인가라고 반문하는 사람이 있는데, 이는 우문일 뿐이다. 억울한 누명을 쓴 사람 중 일부는 자살이라는 극단적 방법을 통해 자신의 결백함(명예)을 지키는 선택을 한다. 이 경우, 그에게는 목숨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분명히 있는 것이다. 신앙을 위해 순교한다거나, 동지의 이름을 자백하지 않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독립군 병사의 선택 또한 마찬가지다.
| 명분과 현실
어떤 선택의 기준을 명분과 현실(실리)로 나누는 이분법도 몰(沒)역사적이다. 잘 이해가 안 간다면,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내렸던 무수한 선택을 반추해보자. 그 가운데 과연 현실과 명분이라는 두 기준으로 칼로 무 베듯이 명쾌하게 결단을 내린 경우가 과연 몇 번일까? 거의 다 명분과 현실이 뒤섞인 채 선택했을 것이다.
자기는 명분과 현실을 분리한 세계에서 살지 않으면서, 과거의 사람들이 역사 무대에서 내린 결정에 대해서는 왜 명분과 현실이라는 잣대로 흑백 논리처럼 함부로 재단하는가? 이는 최명길과 김상헌의 속마음을 이해하기보다는 그들을 법정에 세우고 제멋대로 구형하는 ‘공안검사’의 태도와 다를 게 없다.
현대 한국인이 범하는 또 다른 오류는 21세기 현재의 가치 기준으로 17세기 중세를 살던 사람들의 생각과 선택을 제멋대로 판단하는 태도이다. 그러니 남한산성의 극한 상황에서 김상헌이 “차라리 여기서 다 죽자. 그래야 후세에 할 말이 있다”라고 외친 말을 이해할 길이 없다.
순간의 치욕을 견디고 나라와 백성을 지켜야 한다는 최명길(이병헌 역)과 대의를 지켜야 한다는 김상헌(김윤석 역)의 논리에서 오늘날 우리는 무엇을 얻어야 할까.
근대의 산물인 내셔널리즘(Nationalism)을 세뇌당하다시피 교육받은 한국인은 조국과 민족이라는 가치를 중시하지만, 17세기 당시 조선에는 그런 가치가 아직 없었다. 유럽의 중세가 왕국이라는 국가 단위의 가치보다 교황을 축으로 한 기독교라는 보편적 가치를 훨씬 상위에 두었듯이, 동시대 동아시아에서도 유교적 중화문명을 인류의 보편적 가치로 믿고 국가 단위보다 더 상위에 두었다. 조선이라는 왕조보다 더 중요한 가치가 엄연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반도의 지배 엘리트들은 언제부터 그런 보편적 중화문명을 타협과 조정이 불가능한 절대 가치로 신봉했을까? 고려 사람들은 현재 중원에서 패권을 잡은 제국을 곧 중화로 인정하곤 했다. 이는 아직 화이(華夷) 구분을 병적으로 강조한 주자학이 득세하기 전이었고, 또한 국제적으로도 고려시대에는 진정한 중화제국이 누구인지 특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제국의 교체가 잦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실제로, 고려의 국왕이 조공을 바치고 책봉을 받은 중화제국은 후당(後唐)→후주(後周)→송(宋)→요(遼)→금(金)→원(元)→명(明) 등 7개국으로, 이는 고려가 책봉국을 무려 여섯 차례나 바꿨음을 의미한다. 그런데 어떤 경우에도 윤리적, 이념적 부담감은 없었다. 고려의 지배 엘리트들은 중화를 가늠하는 세 가지 요소, 곧 공간(중원), 문명(유교), 종족(한족) 가운데 종족을 개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오히려 제국이 바뀔 때마다 천명(天命)이 옮겨갔다는 논리를 내세워 현실을 그대로 받아들였다.
| 군신 관계, 부자 관계
그런데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은 17세기 전반에 다시 발생한 제국(명·청)의 교체를 이전 고려시대 선배들처럼 융통성 있게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것은 유교에 익숙한 한반도 지배 엘리트들에게 명나라가 매우 특별했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등장해 몽골을 몰아낸 사건은 당시 한반도의 지식인이 보기에는 중원을 정화(淨化)한 중대 사건이자 쾌거였다. 그렇지만 15세기만 해도 조선인의 명나라에 대한 인식은 고려시대의 그것에 가까웠다. 왜냐하면 명나라가 아무리 한족이 권토중래(捲土重來)해 수립한 중화제국일지라도, 경험상 중원의 제국은 100년 정도 지나면 몰락의 길을 걸었기 때문이다. 명나라가 100년을 넘길지도 불분명했다.
따라서 15세기 조선은 명나라에 사대하면서도, 조선 왕조의 안위에 훨씬 더 우선순위를 두었다. 세종 말년인 1450년에 몽골이 다시 흥성해 북경을 포위하자 명나라에서 조선에 구원병을 청했는데, 그때 만장일치로 파병을 거부하고 중립을 지킨 사례는 좋은 예이다. 요컨대, 이때까지만 해도 명나라에 대한 조선의 사대는 하나의 외교정책이었지 절대적 이념은 아니었다.
의미 있는 변화는 16세기에 발생했다. 16세기는 조선의 지식인들이 주자학의 정수를 비로소 제대로 이해하던 시기였다. 또한 명나라는 100년이 지나도 망하기는커녕 더욱더 강고해보이던 시기였다. 바로 이런 16세기에 조선의 지식인 사이에서 명과 조선의 관계를 단순히 군신 관계 차원을 넘어 부자 관계로 이해하는 움직임이 나타났다.
이런 인식 변화는 중차대하다. 충(忠)에 기초한 군신 관계는 상황에 따라 가변적인 데 비해 효(孝)를 기반으로 한 부자 관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타협할 수 없는 절대적 가치였기 때문이다. 유교에서 아무리 충을 강조할지라도 만일 군주가 패륜을 자행한다면, 신하 입장에서는 군신 관계를 끊을 수 있었다. 이른바 역성혁명도 바로 이런 논리였다.
그러나 부자 관계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부친이 아무리 패악할지라도 자식 입장에서 부자 관계를 끊을 방법은 유교 내에서는 없었다. 효는 그 어떤 환경도 초월하는 절대 가치였던 것이다. 16세기에 명과 조선이 이런 군부·신자(君父·臣子) 관계로 새롭게 이념화된 사실은 앞으로 국제무대에서 어떤 상황이 발생하더라도 조선은 명나라와 운명을 함께해야 함을 의미한다.
남한산성에 세워진 삼전도비.
그런데 왜란(1592~1598년) 발생 전만 해도, 이런 이념은 아직 느슨한 편이었다. 국내 지식인 사이에서만 이론적으로 주고받는 정도였다. 그런데 왜란 때 명나라가 참전함으로써 부자 관계 이론은 현실에서도 명백히 증명됐다. 위기에 처한 자식을 구하기 위해 아버지가 직접 도와주었다는 이론적 설명이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은 이런 설명 틀의 결정판이었다.
이런 시대 상황이 바로 이전 고려시대 선배들과는 달리 17세기 조선의 지배 엘리트들이 패닉 상태에 빠진 근본 이유였다. 남한산성 내 고민의 본질도 바로 이와 직결돼 있었다. 아버지가 위기에 처했다는 소식을 듣고 자식이 취할 올바른 행동은 무엇일까? 비단 유교사회가 아닐지라도 즉시 아버지에게 달려가 아버지를 위협하는 적과 싸우는 일일 것이다.
그런데 청나라 칸에게 항복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인가? 아버지의 위급을 듣고도 그 자식은 아버지에게 달려가기는커녕 오히려 자기 아버지를 죽이려는 도적 앞에 스스로 나아가 이마를 땅에 박으며 “저 사람은 내 부친이 아닙니다. 저는 앞으로 칸을 섬기겠습니다”라고 고백한 것이 바로 삼전도 항복(1637년)의 본질이었다.
| ‘준비 없는 이념 논쟁’
17세기 당시 조선의 위정자들은 21세기 우리가 볼 때는 답답한 점이 많지만, 그렇다고 역사 평가를 즉흥적으로, 제멋대로 하면 곤란하다. 드러난 증상의 이면에 있는 연원을 제대로 살펴야 한다. 유교 문화의 유산이 지금도 막강한 현대 한국 사회에서 육두문자를 제외한 욕으로 가장 심한 게 무엇일까? “의리 없는 놈” 내지는 “금수만도 못한 놈” 아니겠는가? 병자호란을 굳이 초래하고 남한산성에서 다 죽자고 한 저들은 바로 그 의리를 지키기 위해, 다른 말로 금수처럼 구차하게 살기보다는 차라리 인간다운 죽음을 택한 이들이었다.
현대 한국인으로서 당시 조선의 위정자를 탄핵할라치면, 그것은 주화니 척화니 하는 표피적 문제가 아니라, 척화 주장은 이해하겠는데 “왜 전쟁 준비를 제대로 하지 않았는가”라는 질책이어야 할 것이다. “붓으로 적병을 막을 수 있겠는가?”라며 비변사(備邊司) 당상관들을 질타하던 광해군의 표정이 불현듯 오버랩되는 것은 과연 우연일까?
우리 한국 사회의 모습은 어떤가? 현실은 도외시한 채 그저 자기가 믿고 싶은 것(이념)만 부르짖는 이상한 종교집단의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가? 외교 노선을 조금이라도 조정하려 하면 온 나라가 벌집 쑤신 듯이 요란해진다. 외교를 가변적 정책으로 보지 않고 절대적 이념으로 보는 이들이 아직도 많은 상황에서 인조 정권에 돌을 던질 수 있을까?
시대의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하기보다 과거의 이념에 여전히 얽매인 대한민국을 바라보면서 17세기 전반 호란을 초래하고 함께 죽자고 외치던 위정자들의 모습이 오버랩되는 것은 필자뿐일까? 조선이 ‘준비 없는 이념 논쟁’으로 쇠락했다면, 오늘날 우리 대한민국은 어떠한가?
서강대학교 사학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