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0년 7월 5일 오산 죽미령고개에 한바탕 피바람이 몰아쳤다. 유엔군과 북한군이 최초의 전투를 벌인 이곳에서 약 180명의 유엔군과 150여 명의 북한군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바로 이 죽미령 전투를 계기로 유엔군의 참전도 기정사실화됐다.
유엔군 참전 도화선 된 ‘죽미령 전투’
죽미령 전투가 벌어진 경기도 오산에는 2013년 건립된 유엔군 초전 기념관이 있다. 유엔군 선발대인 스미스 특수임무부대 대원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리고자 만들어졌다. 앞서 1955년에는 구 초전 기념비가, 1982년에는 새로운 초전 기념비가 설치돼 전사자들의 넋을 기렸다.
오산을 지나는 지하철 1호선 세마역에 내리면 초전 기념관까지 걸어서 15분가량 걸린다. 마침 호국보훈의 달인 6월에 접어들어서일까. 자녀를 데리고 방문한 가족 단위 관람객들이 적잖이 눈에 띄었다.
1만4000여 평 대지에 조성된 유엔군 초전 기념관은 메인 건물에 해당하는 기념관을 주축으로 야외 전시장, 신·구 초전 기념비, 기념공원으로 이뤄졌다. 초전 기념관에 도착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야외 전시장에 설치된 F-86F 세이버 전투기다. 6·25전쟁 당시 미 공군의 주력 전투기로, 세계 최초로 소련이 개발한 MIG-15 제트 항공기와 공중전을 벌인 바로 그 항공기다. 1955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제트 전투기로 도입되는데, 영화 ‘빨간 마후라’(1964)에서 한국 공군의 상징으로 묘사되며 그 위용을 떨치기도 했다.
6·25전쟁 당시 사용된 무기들이 전시돼 있다.
전투기 오른쪽으로는 장갑차와 기관총 등 당시의 상황을 고스란히 전해주는 전쟁 무기들이 전시돼 있다. 그중 하나가 1952년 생산된 미군의 M48A2C 패튼 전차다. 방어력과 연비가 떨어진다는 지적에도 불구하고 내부 공간이 넓고 야전 정비성이 뛰어난 것 등 무시할 수 없는 장점을 갖췄다.
제2차 세계대전에 사용된 견인 대공포 M1 90㎜ 고사포 역시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6·25전쟁 때도 주력 무기로 사용되며 적의 공중 공격을 방어하는 역할을 톡톡히 해냈다. 휴전 이후 국내에 도입돼 지대공 미사일이 등장하기 전까지 사용됐다. 그 옆에 놓인 8톤짜리 경장갑차 KM900은 1970년대 중반 북한의 특작부대 침투 대비와 수도권 방어를 위해 도입된 것이다.
야외 전시장을 지나 기념관 건물에 들어서면 자못 숙연한 분위기가 맴돈다. 3층짜리 건물 중 2층 한 층이 전사자들을 기리는 전시 공간으로 사용되고 있다.
유엔군의 6·25전쟁 파병은 ‘자유와 평화 수호’라는 유엔의 정신에 입각해, 유엔 창설 이후 처음으로 유엔기를 앞세운 집단적 행동에 나섰다는 점에서 중대한 역사적 가치를 지닌다. 초전 기념관의 건립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기념관 내부를 둘러보기에 앞서, 67년 전 이곳 죽미령에서 벌어진 그날의 전투를 상상으로나마 머릿속에 그려보았다.
죽미령 전투를 재현한 영상.
1950년 7월 5일 새벽 3시, 빗속을 뚫고 오산 죽미령에 도착한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도로와 철로 부근에 진지를 구축하고 북한군을 기다렸다. 오전 7시쯤 수원 근처에서 북한군의 전차부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스미스 부대는 105mm 곡사포 포격을 시작으로 포탄을 쏘아댔지만 소련제 T-34 전차를 앞세운 북한군에 큰 타격을 주지는 못했다. 서너 시간이 흘러 이번에는 약 10km에 달하는 긴 행렬의 북한군 트럭과 보병이 나타났다.
스미스 부대는 또 한 번 박격포와 기관총을 쏘아댔고, 아군과 적군을 가릴 것 없이 전사자가 속출하는 아찔한 상황이 벌어졌다. 이후 북한군에 의해 퇴로가 차단된 스미스 부대는 탄약과 병력이 소진된 채 오후 2시 30분경 퇴각을 결정했다. 이날 전투에서 스미스 부대는 540명 중 보명 150명, 포병 3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북한군 역시 약 5000명 중 130여 명이 전사하거나 실종됐다.
죽미령에서 벌어진 이 첫 전투는 승패와 관계없이 유엔군 참전의 도화선이 됐다. 자유 우방국의 헌신적인 지원도 이어졌다. 미군이 개입하기 전에 전쟁을 끝낼 생각으로 남침을 감행했던 북한군은 남침 개시 10여 일 만에 미 지상군의 참전을 손 놓고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죽미령 전투를 시간대별로 설명해놓은 전시실.
전쟁 참상 보여주는 각종 유물 전시
기념관에 들어서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것은 1층 벽면 한쪽을 차지한 커다란 조형물이다. 참호에서 경계 근무 중인 미 제27연대 병사들의 실제 사진을 조각으로 구성해놓았다. 적진을 마주하고 긴장한 표정이 역력한 병사들의 얼굴이 조형물에서도 고스란히 드러난다.
2층에는 총 8가지 섹션으로 구분된 전시실이 마련돼 있다. 미군과 유엔군의 참전 결정 과정을 보여주는 각종 서류, 죽미령 전투를 재현한 영상, 살아남은 참전 군인들이 스미스 부대원들에게 보내는 편지 등 다양한 자료들이 그날의 기억을 재현한다.
전시실 한쪽에는 전쟁의 참상을 담은 일반인 김종태 씨의 일기도 공개돼 있다. 김 씨는 일기에서 피란 행렬에 몸을 실은 채 마주한 전쟁의 참상을 실감나게 표현했다. 여기에는 처음 접한 서양인(유엔군)에 대한 첫인상도 묘사돼 눈길을 끈다.
전시실 중간쯤에는 어두운 조명 아래 스미스 부대원들의 석고 모형이 전시돼 있다. 죽미령 전투에 투입되기 3일 전인 1950년 7월 2일, 대전역에 도착한 대원들의 모습이다. 젊은 병사들의 얼굴에 내려앉은 고뇌와 두려움이 보는 이의 마음을 아프게 한다.
죽미령 전투에 참가한 부대원 540명의 명단과 사진.
전시실 안쪽에는 스미스 부대 전사자들을 추모하는 공간이 조촐하게 마련돼 있다. 망자를 기리는 국화꽃 수십 송이가 가지런히 놓여 있다. 그 옆에 죽미령 전투에 참전한 부대원 540명의 명단이 동판에 새겨져 있다. 새파랗게 어린 20대 초반의 병사부터 나이가 지긋한 베테랑 병사까지, 고귀한 희생을 감내한 그들의 이름 앞에 다시 한 번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된다.
마지막으로 스미스 부대원으로부터 온 편지가 짤막한 영상과 편지지로 남겨져 있다. 이제는 백발의 노인이 된 살아남은 부대원들이 전사한 동료들을 기억하며 눈물을 훔친다.
‘너의 눈물과 죽음의 고통을 지켜보며 나는 그저 끌어안고 있을 수밖에 없었어.
너의 잿빛 얼굴은 마침내 죽음으로 뒤덮였고,
나는 내 소중한 벗이 들이쉬는 마지막 숨을 지켜보았지.
왜 하필 너여야 했니, 왜 나 대신 네가 선택된 거니?
죽음의 순간에도 강인했던 나의 친구, 폴. 너는 나의 최고의 친구였어.’ -1995년 6월 Joe Langone
구 추모비와 새 추모비.
초전 기념관을 나와 왼쪽 언덕으로 올라가면 1982년 세워진 유엔군 초전 기념비를 만날 수 있다. 기념비는 스미스 부대원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동상과 세 겹의 높은 탑신을 통해 북한군과 맞서 싸운 최초의 성벽임을 표현하고 있다. 매년 7월 5일이면 이곳에서는 죽미령 전투의 의의를 기리고 전몰장병들을 추모하기 위한 추념식이 거행된다.
초전 기념관 앞 8차선 대로변 건너에는 1955년 7월 5일에 건립된 구 초전 기념비가 설치돼 있다. 미 제24단 장병이 실종되거나 전사한 전우들을 기리며 540개의 돌을 쌓아 만들었다. 540명의 부대원을 상징하는 540개의 돌이 서로를 지탱하며 단단한 모습으로 서 있다.
마지막으로 기념관 뒤쪽에는 자그마한 규모의 유엔 참전 기념공원이 조성돼 있다. 기념공원에는 16개 참전국의 주요 전투 등이 적힌 표석과 함께 6·25전쟁을 표현한 전쟁 가벽이 설치돼 있다. 이 밖에 생태연못과 벽천, 산책로 등이 조성돼 있어 시민들의 휴식 공간으로도 사용되고 있다. 2015년 2월 초전 기념관과 공원을 연결하는 탐방로 및 조명 설치 작업이 완료돼 밤낮으로 이용이 가능하다.
지난해 열린 특별전시 모습.
권율 장군의 기지가 담긴 독산성 세마대지
초전 기념관 외에도 오산에는 둘러볼 만한 역사적 장소가 여럿 있다. 백제가 처음 쌓아 고려시대까지 이용된 것으로 추정되는 독산성이 대표적이다. 오산과 수원, 화성에 걸친 평야 한가운데 우뚝 솟아 있어 전략적 요충지에 해당한다. 임진왜란 당시 권율 장군이 이곳에 주둔하며 왜군 수만 명을 무찌르고 적의 북상을 차단하기도 했다.
성내에는 재미있는 일화가 담긴 세마대(洗馬臺) 터가 자리 잡고 있다. 성안에 물이 부족할 것이라 추측한 왜군이 성을 포위하자 권율 장군은 기지를 발휘해 말을 쌀로 씻기며 물이 풍부한 것처럼 속였는데, 이 눈속임이 먹혀들어 왜군이 그냥 지나쳤다는 것. 이때 말을 씻긴 높은 터를 세마대라 부른다.
해마다 열리는 추도식에는 참전용사와 유엔군의 발길이 이어진다.
오산대 부근에는 조선 정조 때 창건돼 공자를 봉안하는 궐리사가 있다. 충남 논산시 노성면의 궐리사와 함께 우리나라 제2대 궐리사 중 하나로 꼽힌다. 공자의 64대 손인 공서린(孔瑞麟)이 낙향해 이곳에 강당을 세우고 은행나무를 심은 뒤 제자들의 학업을 독려하며 여생을 보냈다고 전해진다.
경기도기념물 제112호로 지정된 지석묘군도 들러볼 만하다. 청동기시대의 것으로 추정되는 9기의 고인돌이 이 일대 구릉지와 논에 분포돼 있다. 가장 큰 덮개돌의 길이가 6m에 달한다니 그 거대한 크기에 놀라지 않을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