흉부 방사선 촬영기에 가슴을 갖다 대는 손이 가늘게 떨렸다. ‘찰칵~ 찰칵~.’ 몇 초간의 침묵을 뚫고 촬영기가 상하로 움직이는 순간, 조만희(가명) 씨가 탄성을 질렀다. 그는 3년 전 강원도 춘천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탈북민이다. 조 씨를 진료하는 의료진은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이다.
조 씨가 흉부 방사선 촬영을 시작으로 이비인후과 진료까지 모든 건강검진을 마칠 때까지 민주평통 자문위원으로 활동하는 국내 의료진과 국민건강보험공단 직원들이 그의 건강 상태를 요모조모 살펴봤다. 조 씨는 “그동안 비용과 시간 부담 때문에 병원 가는 걸 미뤘는데, 출근하지 않는 토요일에 무료로 양방과 한방 모두 진료받을 수 있어 무척 좋다”며 미소를 머금었다.
6월 3일 오후, 강원 춘천시 에티오피아 참전기념관과 주차장에서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은 탈북민 100여 명을 대상으로 혈액검사, 소변검사 등 임상병리검사와 흉부 엑스선 검사를 비롯해 내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산부인과, 치과, 한방, 안과 등의 진료를 진행했다. 이날 의료봉사단 중 일부 의료진은 소속된 병원에서 오전 진료를 마치고 급히 봉사 현장으로 달려왔다. 더 많은 탈북민에게 다양한 진료 서비스를 제공하기 위해서였다. 그 결과 10여 개 과목의 진료가 ‘원스톱’으로 이뤄졌다.
진료를 마친 탈북민에게는 다양한 기념품이 제공됐다.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이 구급의약품함과 의료봉사 기념 타월을, 민주평통 강원지역회의에선 머그컵 세트를 준비했다. 국민건강보험공단은 빵과 음료를 제공했다. 여러 도움의 손길이 모인 셈이다. 박용성 강원지역회의 부의장은 “봉사는 나 혼자 할 수 없다. 북한이탈주민을 돕는 의료봉사는 대한민국 전체가 나서야 하는 일”이라고 말했다.
체계적인 준비와 봉사정신 덕분일까.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을 계기로 탈북 후 하나원에서 건강검진을 받은 지 수년 만에 비로소 몸과 마음의 상태를 살펴봤다는 감사 인사가 쏟아졌다. 특히 혈액검사와 초음파 검사 등 엑스레이 판독 후 정밀 검진이 필요한 경우 인천IS한림병원에서 전화로 연락해 본인이 원하는 의료기관에서 의료급여 또는 국민건강보험으로 정밀 검사나 진료를 받을 수 있도록 행정적 절차를 마련해 탈북민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 있다. 탈북민들은 “국가와 민족에 보답할 수 있도록 더 나은 삶을 살고 싶다”고 입을 모았다.
의료 봉사단의 자발적 참여로 진행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이 출범한 건 지난 2014년 2월. 민주평통의 ‘통일맞이 하나-다섯운동’ 일환으로 시작한 16기 의료봉사단은 1년 4개월 동안 19명의 의료진이 총 7회에 걸쳐 약 700여 명의 탈북민에게 의료봉사를 펼쳤다. 이후 2015년 9월부터 29명의 의료진을 주축으로 17기 의료봉사단이 창단돼 10회 동안 약 870여 명의 북한이탈주민에게 의료 서비스를 제공하는 등 의료봉사가 확산됐다. 그동안 의료봉사 때마다 탈북민에게 나눠준 의료구급함이 8500여 개에 달한다. 어려운 환경에 처해 있는 탈북민의 성공적인 정착 지원을 위해 민주평통과 국민건강보험공단이 사회공헌활동 공동 추진 협약(MOU)을 체결해 연 2회에 걸쳐 의료봉사 및 건강검진 등을 상호 협력해 공동 추진한다.
의료봉사 아이디어 기획부터 실행까지 모든 프로그램은 의료봉사단원의 자발적 참여로 진행된다. 의료봉사단원들이 낸 회비로 의료봉사 비용을 조달하는 것이 그 예다. 지난해 7월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은 국민건강보험공단과 광주광역시에서 탈북민을 대상으로 혈액·뇨검사 등 임상병리검사와 흉부 엑스선 검사, 내과, 정형외과, 신경외과, 산부인과, 치과, 한방진료 안과 처방 및 안경 제작 등 의료봉사를 펼친 바 있다. 비타민과 같은 영양제와 구강용품 세트, 과자선물 세트, 샴푸 등 생활용품 세트, 남산 케이블카 왕복 탑승권, 명절 선물 세트, 한방보약 세트, 머그컵, 안경 상품권 등 다양한 선물도 별도로 준비해 북한이탈주민들에게 제공했다.
모범 탈북 학생에게 장학금을 지원하는 활동도 활발하다. 지난해 9월과 올 6월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은 민주평통 서울지역회의와 공동으로 선발된 모범 탈북 학생들에게 500만 원에 달하는 장학금을 지원했다. 올 12월에도 장학금을 지원할 예정이다.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은 향후 탈북민 의료봉사를 확대해 추진할 방침이다. 올 9월부터 제18기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을 창단한 후 대상 지역을 선정해 매분기 1회 이상 의료봉사를 실시할 계획이다. 탈북민 대상으로 의료비를 지원하는 사업도 추진된다. 올 11월부터 의료비 지원이 필요한 탈북민 20여 명을 선정해 1인당 50만 원에서 100만 원까지 지원하기로 했다.
INTERVIEW
김철수 민주평통 의료봉사단 단장
“탈북민 치료하는 건 의술이 아니라 마음”
“의사 생활 40년보다 민주평통 의료봉사단 3년이 더 값지죠.”
낡은 청진기를 목에 건 ‘할배 의사’가 웃었다. 40년 넘게 신림동 양지병원에서 환자들을 돌보다 2014년 2월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장으로 임명된 김철수(73·에이치플러스양지병원 이사장) 단장이다. 그는 지난 3년간 17회에 걸쳐 1570여 명의 탈북민을 진료했다. 김 단장은 “탈북민을 치료하는 건 의술이 아니라 마음”이라고 말했다.
“탈북민들을 진료해보니 위장병을 앓는 이들이 많더군요. 아마도 식사를 제때 하지 못해서일 겁니다. 목숨 걸고 남한에 와서 사회에 적응하느라 신경이 잔뜩 예민해졌을 테고요. 이런 분들은 마음을 보듬어줘야 합니다. 치료가 아니라 ‘치유’가 필요해요.”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은 진료를 마친 탈북민에게 의료구급함을 선물한다. 이는 김단장의 아이디어이다. 현재 사전 제작된 의료구급함 1만 개 중 8500여 개가 탈북민의 품에 안겼다. 그는 “탈북민이 3만 명이니 1만 개를 제공하면 탈북민 한 가정에 한 개씩 보급하는 셈”이라고 말했다.
의료봉사단, 탈북민 의료 서비스 문턱 낮추는 데 기여
1944년생인 김 단장은 유년 시절 전쟁을 경험했다. 그의 아버지는 6·25 전쟁터에서 눈을 감았다. 당시 그의 나이 고작 일곱 살이었다. 이후 6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대한민국은 여전히 남북통일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전후세대로서 탈북민을 바라보는 그의 마음은 이루 말할 수 없이 복잡하다.
“어쩌면 제가 치료하는 탈북민의 부모가 내 아버지를 총살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한없이 측은합니다. 잘못을 따지기보다 그들이 남한 사회에서 이질감 느끼지 않고 잘 살 수 있기를 바랄 뿐이에요.”
전문의 60명, 의료진 450명, 병원 침상 450개에 달하는 대형병원 운영을 책임지고 있는 김 단장은 의료 환경이 양극화된 시대에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이 탈북민의 의료 서비스 문턱을 낮추는 데 크게 기여하고 있다고 평가했다. 그는 이제 한반도 통일시대를 대비해 후배 의사와 간호사들이 북한 지역 의료봉사에 나설 수 있도록 적극 지원할 방침이다. “통일 한반도와 한민족의 건강과 생명 보호에 공헌하는 것이 원로 의사의 궁극적 책무”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민주평통 의료봉사단 운영 방침을 보완할 방법도 찾는 중이다.
“민주평통 자문위원 자격을 갖고 있어야 의료봉사단으로 참여할 수 있어요. 봉사는 혼자서 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더 많은 의료진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의료봉사에 대한 갈급함이 있는 의료진들이 더 많이 참여할 수 있는 방안을 강구해야겠어요.”
INTERVIEW
김택우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원
“지방에 사는 탈북민에게 건강과 행복을 전해요”
강원 춘천시 에티오피아 참전기념관 주차장에 주차된 이동진료버스에서 만난 김택우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원(온세의원 원장)은 토요일 오후 진료를 이제 막 끝내고 온 참이라고 했다.
“미처 점심도 못 먹고 달려왔는데 끼니 거르고 오후 가족모임 제쳐놓고 의료봉사를 하는 분들이 저뿐만이 아니네요. 늘 돕고 싶었던 환자가 탈북민입니다. 현장에 와서 이들에게 의료 서비스를 무료로 제공하는 것이 얼마나 큰일인지 다시 느끼고 있어요.”
김 단원은 춘천 시내에서 외과를 진료하는 1차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그 역시 20년 넘게 환자들을 만났지만 탈북민을 진료한 경험은 많지 않다.
“의료봉사단을 통해 탈북민들을 만나보니 경증 환자가 많더군요. 체격이 작고 영양 부족을 호소해요. 심적으로 피해의식을 갖고 있어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 치료가 필요한 분들도 있고요.”
지방에 거주하는 탈북민들은 의료 사각지대에 놓여 있어 그 누구보다 의료 서비스가 절실하다. 김 단원은 “의료봉사단을 계기로 탈북민들이 지역 가까운 곳에 1차 병원이 있다는 걸 인지하고 활용하는 방법을 터득한다면 1차 목적은 달성한 셈”이라며 “중증 질환의 경우 초진을 통해 종합병원으로 안내하는 것도 의료봉사단의 역할”이라고 말했다.
INTERVIEW
이태리 탈북민
“10년 만에 병원 진찰… 더 많은 탈북민 이용했으면”
“한방에 익숙한 제가 첨단 의료장비가 가득한 진료버스에서 진찰을 받으니 잠시 어리둥절했습니다. 목숨을 걸고 북한을 탈출해 남한으로 온 탈북민의 설움을 달래고 몸과 마음이 건강하게 사는 법을 배웠습니다.”
혈액검사와 초음파 검사를 연달아 받은 이태리(46) 씨는 의료봉사단이 진료버스에서 진찰하는 장면이 처음엔 낯설었다고 했다. 그러나 “가난과 질병으로 괴롭고 힘들었던 시절에 탈북민의 한과 슬픔을 어루만지고 달랬다는 점에선 민주평통 의료봉사단이 참 귀한 존재”라고 말했다.
이 씨는 토요일 낮에도 근무하는 탈북민 이야기를 꺼냈다. 일을 할 수만 있다면 밤낮, 평일 주말을 가리지 않다 보니 병원에 들러 아픈 곳을 찬찬히 살펴볼 겨를이 없다는 것. 이날 의료봉사가 이뤄지는 현장에서도 이 씨는 주변 탈북민들에게 연락해 진찰받을 것을 권했다. 이 씨는 “더 많은 탈북민들이 참여했더라면 좋았을 텐데”라며 아쉬워했다.
남한에 온 지 올해로 만 10년. 이 씨는 “아직도 사는 게 서글픈 것이 현실이지만 섬김의 마음을 가득 안고 달려온 의료봉사단 덕분에 건강을 회복하고 간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