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정러시아 시기였던 1864년부터 러시아 당국의 영구 거주를 인정받으면서 한인 이주 역사는 시작됐다. 이들은 당시 조선 국경을 넘어 생존을 위한 탈출과도 같은 이주를 감행했다. 이후 19세기 후반에 걸쳐 조선 사람들의 이주는 확산되었고, 연해주 지역에는 이들이 모여 사는 마을이 여러 곳에 형성되기도 했다.
고려인들은 20세기 초에는 제정러시아 각지에 분포해 거주하게 됐는데, 절대적 다수는 극동 지역에서 살고 있었다. 1910년 조국이 일본 제국주의에 침탈당함으로써 고려인들은 졸지에 모국을 상실한 민족으로 전락하게 되었다. 당시 극동 지역 러시아는 독립운동의 기지로서 역할을 했다. 최재형, 홍범도, 안중근 등의 독립운동에 러시아 고려인들이 협력한 것은 조국을 상실한 동포로서 당연한 일이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이 발발하자 많은 고려인들은 지체 없이 혁명군에 가담했고, 사회주의자들이 되었고, 항일 투쟁에 동참했다.
소련 정권 초기에는 ‘토착화 정책’의 일환으로 각 지역의 주요 토착 민족의 문화와 정치적 이권 등이 인정되었다. 극동 지역 한인들의 경우 학교의 교육용 언어가 한국어였으며, 한국어 사범대학이 건립되고 극장, 신문 등이 한국어로 공연·발간되었다.
이 무렵 고려인들은 자신들을 ‘대한인’이나 ‘조선인’이 아닌 ‘고려인’, ‘고려민족’, ‘고려 누이’ 등으로 지칭하기 시작했다. 이른바 ‘고려인’, ‘고려사람’ 용어의 시대적 기원이 바로 1920년대인 것이다. 유명한 조명희 시인의 ‘짓밟힌 고려’는 잃어버린 국가에 대한 비통한 마음과 함께 상실한 국가 이름을 ‘고려’로 표시한 시인데 1928년에 한국어로 발행되던 신문인 ‘선봉’에 발표되었다.
고려인들이 세운 카자흐스탄 크질오르다국립대학.
고려인 17만2000여 명 강제 이주
1929년 스탈린의 농업 집단화 정책으로 극동 고려인 공동체는 집단농장과 국영농장 체제로 급속히 전환되었다. 1928년 극동의 고려인 300여 명이 카자흐공화국으로 초청돼 벼농사를 짓고, 이들 중 일부는 1930년대에 러시아 남부 지역에서 벼농사 재배로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중앙아시아 지역만 보더라도 고려인들의 거주 역사는 1897년 혹은 그 이전부터 시작되었고, 1926년 인구조사 결과만 보더라도 81명의 고려인들이 거주하고 있던 것으로 파악되었다.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주 ‘폴리타젤’ 콜호즈는 유명한 고려인 콜호즈인데, 그 전신이 바로 1924년에 조직되었던 ‘일심 협동조합’이었다.
조국은 상실되었지만 고려인들은 나름대로 소련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한국어를 잃지 않았으며, 자녀들을 위한 체계적인 교육도 진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환경은 1930년대 중반이 되면서 급격한 변화의 소용돌이에 휘말리게 되었다. 1937년에는 극동 지역의 고려인 전원이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려인 엘리트들도 정치적 탄압을 받게 된 것이다.
고려인들의 강제 이주 원인은 공개된 문서로 밝혀졌다. 극동 지역에서 활동 중인 일본 첩자들과 고려인의 외모가 비슷해 소련 당국에서 볼 때 구분이 되질 않아 아예 해당 지역의 고려인들을 전원 강제로 이주시켰다는 것이다.
여기서 당시 시대적 상황을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만주를 거점으로 한 일본이 1937년에 중국 본토로 침공해가면서 1918~22년 내전기에 있었던 일본군의 시베리아 및 극동 침략 경험이 소련 지도부의 머리를 강력히 두드렸다. 소련 극동 지역의 안보 위기가 첨예하게 대두된 것이다.
소비에트 정부 출범에 헌신했던 고려인들로서는 스탈린의 결정이 전혀 근거 없는 것이고, 너무나 터무니없는 결정이었다고 강력히 반발할 만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미 2000명 정도로 추정되는 고려인 엘리트들이 강제 이주 직전에 거의 다 체포되거나 색출 중에 있었고, 또한 강제 이주 결정이 극비리에 처리되고 있었기에 많은 고려인들은 그 내용조차도 모르고 있었다. 단지 강제 이주 결정이 상부에서 내려졌고 전원 기차에 탑승하라는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던 시대적 상황이 그들을 이끌 뿐이었다.
1937년 9월 9일 첫 이주열차를 시작으로 약 17만2000명의 극동 지역 고려인 전원이 총 124편의 열차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강제 이주되었다. 2개월 남짓 집중적으로 이뤄졌던 터라 여객열차가 부족해 화물열차를 개조해 고려인들을 이송했다. 30~40일이 걸렸던 열차 이동은 고통과 인내의 연속이었을 것이다. 열악했던 환경 탓에 이동 과정에서만 554명의 고려인들이 사망한 것으로 문서에 기록되었다.
소련이 작성한 강제 이주 고려인 명부.
고려인들의 강한 적응력
강제 이주된 고려인들은 카자흐, 우즈베키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크공화국 그리고 러시아 남부의 아스트라한 지역으로까지 분산 배치되었다. 그러나 당초 지원 계획과 달리 주택과 의료, 교육 등의 지원이 미비했고, 특히 과거에 살던 지역과 기후가 달라 적응하는 데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주택이 부족해 고려인 일부는 땅을 파고 지붕을 얹어 만든 집에서 당장에 닥친 겨울을 보내야 했다. 이 흔적은 현재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남아 있다.
고려인들의 적응력은 매우 강했다. 우선 농업 분야에서 탁월한 생산성을 보여 소련 내에서도 성실한 민족으로 평가되었고, 사회주의 노동영웅만 209명이 배출되었다. 특히 우즈베키스탄공화국 타슈켄트주의 ‘북극성 콜호즈’ 김병화 회장은 소비에트 고려인을 대표하는 인물이었고, 사회주의 노동영웅 칭호를 두 번이나 받았다. 이후 고려인들은 농업 분야뿐만 아니라 교육계, 관료, 과학기술, 문화예술계 등 다양한 분야에서 뛰어난 인물들이 배출되었다.
한편 1932년에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조직돼 1937년에 카자흐공화국으로 강제 이주된 ‘고려극장’은 고려인들이 민족문화를 지키고자 노력한 기관이었다. 다만 강제 이주 이후 고려인들이 겪었던 큰 피해 중의 하나는 바로 한국어 구사력을 거의 상실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강제 이주 이후 소련 당국은 교육기관에서 행해지던 한국어 사용을 금지했고, 한국어 수업도 1주일에 두세 시간으로 제한했다. 그 결과 고려인들은 한국어 습득의 기회를 상실해갔다. 1938년에 순 한글로 창간된 ‘레닌기치’ 신문이 1990년 말까지 발간되면서 한국어 교육의 중요성을 끊임없이 강조했음에도 고려인들에게 현실적으로 중요한 언어는 바로 러시아어가 되어버렸다.
고려인들은 1988년 서울올림픽 중계를 보고 한국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게 되었다. 한국의 경제 발전상은 고려인들의 마음을 크게 움직였고, 민족적 자긍심이 크게 고조되는 원인이 되었다. 한국이 고려인들에게 한 번쯤 방문하고 싶은 역사적인 조국으로 자리 잡게 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소련 붕괴로 말미암아 고려인들은 또 다른 시련과 도전에 직면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개인적인 경제 문제를 국가가 더 이상 책임지지 않음에 따라 자신의 노력으로 이를 해결해야 했다. 중앙아시아 등 러시아어가 제1언어가 아닌 국가에 소속된 고려인들은 현지 주류 민족의 언어를 새롭게 익혀야 하는 문제도 발생했다. 따라서 중앙아시아 지역의 고려인들 중에는 러시아로 이주하는 사람들도 발생했다.
연해주 등 과거 선조들의 땅으로 이주해 개인사업을 통해 성공한 고려인들도 나타났다. 그러나 모두가 성공한 것은 아니었다. 일부 고려인들은 새로운 땅에서 농사에 종사하거나 시장의 상인으로 활동했지만 경제적으로 크게 나아지지는 않았다. 경제적으로 힘든 고려인들은 한국의 언론과 비정부기구(NGO)에 포착되었고, 그들을 지원하는 프로그램이 등장하면서 힘든 고려인들의 생활이 한국에 소개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규모로 보나 내용적으로 보나 연해주로 재이주해 생활이 더 힘들어진 고려인들보다 거주국에서 자신들의 생활을 안정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고려인들이 훨씬 더 많은 것이 사실이다. 비즈니스 방면에서 뛰어난 업적을 보인 사람들도 있고 국회의원, 학자, 기술자, 의료인, 문화예술인들도 많이 있다. 이들이 바로 고려인들의 핵심 계층들이다.
물론 계절농을 위해 우즈베키스탄에서 우크라이나 혹은 러시아 남부로 일시적으로 떠나는 일부 고려인들도 있다. 일부 고려인들은 미국이나 캐나다, 유럽으로 이주한 경우도 있다. ‘역사적 조국’ 즉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고려인들도 2016년 말 기준으로 4만 명이 넘는다.
고려인 후손들이 한국을 방문해 할아버지의 나라를 느끼고 있다.
고려인, 한민족 동포의 근거지 확대 기여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와 정치 탄압 결정은 1993년 러시아연방 최고회의에서 범죄 행위로 단죄되었고, 당시 희생된 고려인 엘리트들의 사면·복권 조치도 이뤄졌다. 카자흐스탄도 러시아의 결정을 따랐다. 주로 구소련 국가에서 거주하고 있는 고려인들은 사할린 한인을 포함해 현재 47만 명 정도로 추산되고 있다. 1860년대 중반에 러시아 극동 지역으로 이주한 사람들을 고려인 1세대로 본다면 우리 동포인 고려인들은 현재 6~7세대까지 내려오고 있다.
고려인들은 항일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는 사실뿐만 아니라, 유라시아를 무대로 열심히 활동하며 한민족 동포의 근거지를 확대했다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아야 할 것이다. 우리가 만약 유라시아 대륙으로 나아가는 정책을 추진하고 해당 국가들과의 미래지향적인 교류를 희망한다면, 150년 이상 오랜 터전을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한민족으로서 활약하고 있는 고려인들을 잘 활용하는 구체적인 방안들을 모색해야 할 것이다.

한국외국어대 중앙아시아연구소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