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세기 프러시아의 전략가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다른 수단으로서 정치의 연장”이라는 명언을 남겼다. 한 나라가 전쟁을 계획하고 수행할 때 그 전쟁으로 취하고자 하는 뚜렷한 정치적 목표, 즉 ‘정책 목표’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외교행위도 ‘정치의 연장’이고, 뚜렷한 정책 목표를 설정한 후 수행해야 한다. 따라서 정상회담 준비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회담으로 이루고자 하는 정책 목표를 명확히 하고 그에 맞는 틀을 짜는 일이다. 그리고 그 틀 안에 채워질 콘텐츠를 준비하고, 정책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분위기를 조성해야 하며, 방문의 동선(動線) 등 세부 계획도 설정한 목표 달성을 염두에 두고 꼼꼼히 챙겨야 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성공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정상회담의 정책 목표를 한미 신정부 사이의 ‘한미동맹 재확인’으로 명확히 설정했고, 치밀한 준비를 통해 소기의 정책 목표를 달성했기 때문이다.
대통령이 탄핵되는 헌정 사상 초유의 사건으로 6개월 넘게 이어지던 한국의 외교 공백은 문재인 대통령 취임으로 재가동됐지만, 사드 배치와 위안부 합의 등 박근혜 정부가 결정한 외교정책을 재조정할 것을 예고했기에 미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 재정립에 많은 관심이 쏠렸다.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을 정상외교 데뷔 무대로 선택한 것은 한미동맹이 아직까지는 한국 외교안보정책의 초석일 수밖에 없고, 정책 재조정도 미국과의 동맹을 재확인하고 한미 신정부 간의 신뢰를 확인한 후 진행해야 한다는 현실 인식이 반영된 결정이었다.
‘동맹 재확인’과 ‘정책 재조정’
다소 억울한 측면이 있겠지만 미국 조야에서는 문재인 정부 외교안보정책의 정체성에 상당한 의구심을 가지고 있던 게 사실이다. 중국과의 관계 개선을 위해 사드 배치를 지연하고 종국에는 철수하려고 하는 게 아닌지, 북한과의 관계 개선에 너무 욕심을 부리는 건 아닌지 하는 의심도 있었다.
문재인 정부 내부에서도 이번 정상회담의 정책 우선순위를 동맹 재확인으로 할지, 아니면 정책 재조정으로 할 지를 놓고 치열한 논의가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동맹 재확인’과 ‘정책 재조정’이라는 두 마리의 토끼를 동시에 잡을 수 있으면 금상첨화겠지만 한미 신정부 간의 신뢰가 우선 확인되지 않으면 정책 재조정은 난망한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 회담으로 동맹의 신뢰를 재확인할 수 있었고, 정책 재조정의 여지도 마련할 수 있었으니, 주어진 상황에서 최선의 결과를 도출했다고 보인다.
정상회담 목적이 동맹의 재확인이었다면 그 목적에 부합한 콘텐츠로 회담의 틀을 채우는 것이 필요했다. 양국 당국자들이 분주히 오가며 회담 의제를 조율해 이루고자 하는 소기의 목적에 부합하는 콘텐츠를 대화 테이블에 올려놓은 것으로 판단된다.
양국 정부는 동맹의 중요성, 그리고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에는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엄중하게 대처할 것이지만 북핵 문제의 해결은 압박과 함께 대화로 해결해야 한다는 기본 전제에는 동의하고 있었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에 대처하기 위해 사드를 배치하기로 했다는 점에도 인식을 같이하고 있었다. 단지 북한과의 대화 재개의 조건, 사드 배치의 시기 및 비용, 적절한 방위비 분담,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등에 대한 입장엔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그렇다면 인식을 공유하는 의제로 회담 콘텐츠를 채우고, 그렇지 않은 사항은 원칙만 합의하고 실무선에서 추후 논의할 수 있게 하는 것이 순리다.
우선 사드에 대한 양국의 인식 차이가 부각되지 않은 것은 양국의 긴밀한 조율 덕에 가능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회담 전에 미국 매체와의 인터뷰와 의회 지도자들과의 대화를 통해 사드에 대한 우려를 충분히 불식시킬 수 있었다.
북한과의 대화 재개의 조건으로 양국 정상이 회담 도중 승강이를 벌이지도 않았다. 공동성명서에는 ‘올바른 여건’이 형성된다면 대화를 재개할 수 있다고 명시됐는데, 북한 핵문제 해법의 주도권을 우리 정부가 가져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동맹의 신뢰 재확인에 공을 들인 결과이고, 이 정도면 현 상황에서 문재인 정부가 북한 문제에 있어서 미국으로부터 받아올 수 있는 최대치를 받아왔다고 볼 수 있다.
트럼프가 한미 FTA 재협상에 대한 의지를 피력했지만 거친 언사로 몰아붙이지는 않았고, 문 대통령도 원론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면 후속 논의를 하자고 잘 대처했다. 트럼프가 언론발표문과 트위터에 무역 문제를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이 다소 지나치다 싶기도 하지만, 트럼프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이슈이고, 발언 수위도 ‘트럼프의 기준’으로는 그다지 강하지도 않았다.
회담의 내용과 분위기뿐 아니라 회담장 밖의 동선과 메시지도 동맹 재확인이라는 목적을 위해 잘 계획된 것으로 보인다. 문 대통령은 방미 첫날 장진호 전투 기념비를 방문해 헌화하고 참전용사들을 격려했다. 이 자리에서 본인의 가족사를 얘기하면서 미국이 치른 희생에 감사하는 연설을 했다. 백발의 참전용사들이 감격에 겨워 흐느끼자 잠시 연설을 멈추고 그들을 지긋이 응시하며 위로하는 모습은 많은 이들에게 감동으로 다가왔다. 싱크탱크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를 방문해 행한 연설에서는 한미동맹은 보통 동맹이 아니라 위대한 동맹이며 인류 보편적 가치를 수호하기 위한 가치동맹임을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이 6월 28일(현지시간) 장진호 전투 기념비에 헌화하고 연설하고 있다.
방미 첫날 장진호 전투 기념비 헌화
이렇듯 이번 한미 정상회담은 회담의 정책 목적 설정, 내용 및 세부 계획 측면에서 상당히 성공적이었다. 동맹의 재확인 외에도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 재조정에 대해서도 동의를 얻고 왔으니 사실 기대 이상의 성공을 거뒀다고 할 수 있다. 한미 FTA에 대한 양 정부의 인식 차이는 여전하지만 돌파구가 전혀 없는 것도 아니고, 방위비 분담금 증액 요구도 거세겠지만 적극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방안이 있을 것이다.
FTA 재협상 요구에는 FTA 이행 강화로 협상의 초점을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무역 불균형 해소를 위해 미국산 셰일가스와 액화천연가스(LNG), 그리고 자동차 및 농산물 수입 확대를 선제적으로 제안할 수 있을 것이고, 트럼프가 우려하는 철강의 대미 수출량 감축도 제안할 수 있을 것이다. 대신 한국 기업을 대상으로 하는 철강 반덤핑 및 상계관세 조사에 대해서는 좀 더 합리적 기준을 적용해줄 것을 요구할 수 있어야 한다.
동맹비용 증가는 우리에게도 상당히 민감한 사안이니 조정 과정에서 감정이 상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어차피 더 내야 하는 비용이라면 우리의 자주국방 역량을 확충하는 방향으로 비용이 충당될 수 있도록 협상을 해야 한다. 우리가 더 많은 비용을 부담하되, 이러한 비용과 연계해 미국의 첨단 전략자산 이양 및 기술 지원을 유도하고 비용이 한국의 방위산업과 연구개발에 투입될 수 있도록 큰 딜(Big Deal)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우리가 연합 방위태세를 주도할 수 있는 능력을 확충할 수 있고, 전작권 조기 환수도 가능할 것이다.
가장 큰 관건은 북핵 문제 대처에 공조를 유지할 수 있을지, 공조를 유지하더라고 과연 북한 핵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여부이다. 우선 대화의 조건이다. 미국 조야에서는 문 대통령이 제안하는 단계적 해법에 대해 이론적으로는 동의하지만 성공을 거두기 어렵다는 인식이 강하다. 더구나 미국으로서는 웜비어 사망으로 당분간 대북 강공책이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 우여곡절 끝에 양국이 동의해 단계적 해법을 시도하더라도 어떠한 단계에서 어떠한 보상을 할 것인지에 대해 의견을 맞추는 게 쉽지 않다.
문 대통령은 북한이 핵과 미사일 활동을 ‘동결’하면 보상할 수 있다고 했는데, 어떠한 동결이어야 하는지에 대해서 의견을 맞추기가 쉽지 않다. 일례로 대니얼 러셀 전 미 국무부 차관보는 핵·미사일 활동의 동결과 함께 과거 핵 활동을 명확하게 신고하고,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정기 사찰이 가능해야만 대화가 가능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북한 핵문제 해법의 주도권을 우리 정부가 가져올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
대화로 김정은 마음 바꿀 수 있을까
핵 동결을 조건으로 대화를 시작한다는 것은 사실 북한의 핵 보유를 상당히 오랜 기간 인정한다는 것인데, 사실 미국보다 북한 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하는 우리에게 훨씬 더 예민한 문제일 수 있다. 문재인 정부가 ‘핵·미사일 동결 시 대화 재개’에 대한 미국의 동의를 구하더라도 한국 국민의 합의를 구하는 데 더 큰 어려움을 겪을 수 있다.
제일 중요한 것은 북한의 입장이다. 한미는 상당히 까다로운 조건의 동결을 요구할 것이고, 북한이 이러한 조건을 받아들일 가능성이 매우 낮기 때문이다. 북한은 핵 보유국의 확실한 지위를 가지고 국가 전략을 새로 짜고 주변국 관계를 재정립하려고 한다. 따라서 소형 핵탄두를 탑재한 탄도미사일이 미국에 도달할 수 있는 능력을 확보하기 전에는 어떠한 보상과도 동결을 맞교환하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문 대통령은 한미 정상회담으로 트럼프의 마음을 어느 정도 돌려놓을 수 있었다. 과연 대화로 김정은의 마음을 바꿀 수 있을지가 이제는 최대의 관건이다.

서강대 국제대학원
국제정치학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