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대통령은 선거 공약에서 ‘이산가족 신청자 전원 상봉 추진’을 제시했다. 구체적으로 ‘한반도 프라이카우프(Freikauf)’ 방식을 적용해 남북 이산가족 상봉 신청자 약 6만 명 전원에 대해 전체 상봉을 목표로 병원 건립 등 인도적 지원과 맞교환을 추진하겠다고 했다. 그리고 이산가족 생사 확인, 서신 교환, 상시 상봉, 제2면회소 건립 등을 해결하겠다고 했다. 적극적인 의지 표명과 함께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고무적이며, 앞으로 그 해결을 위한 노력과 성과가 기대된다.
그동안 역대 정부는 남북 이산가족 문제에 대해 다양한 노력을 쏟아왔다. 그러나 남북관계의 부침 상황에 따라 영향을 심히 받아왔다. 그리고 북한이 남북 이산가족 문제를 정치적 문제로 생각하고 있으며 체제 선전에 이용하거나, 남북관계 상황의 협상카드로 활용하거나, 아니면 그들의 실리 추구 수단으로 이용하기 때문에 이산가족 문제가 인도주의적인 사안임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간절한 바람보다는 성과가 상당히 저조한 것이 현실이다.
이 글은 새 정부의 ‘남북 이산가족 전원 상봉’ 추진 공약을 계기로 이산가족의 현황, 남북 이산가족 상봉의 역사, 북한의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입장 및 태도, ‘이산가족 전원 상봉’이 갖는 의미, 실제 전원 상봉 성사를 위한 전제 등을 살펴보고자 한다.
인도적 문제 vs 정치적 이용
남북 이산가족은 6·25전쟁 이전 월남 실향민이 약 350만 명, 전쟁 중 월남 피난민이 약 150만 명으로 이를 합하면 500만 명이 되고, 이북에 또 그만큼의 가족이 남아 있다고 봐서 통상 ‘1000만 이산가족’이라고 말해왔다.
그동안 대한적십자사에 남북 이산가족 찾기를 신청한 누적 인원은 2017년 5월 말 현재 총 13만1175명이고, 이 중 생존자는 6만745명이다. 따라서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의 이산가족 전원 상봉 추진 대상자는 6만745명이 되겠다.
남북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본격적 시도는 1971년 8월 12일 최두선 대한적십자사 총재의 남북적십자회담 제의를 북한의 조선적십자회가 수용함으로써 시작됐다. 수차례 예비회담을 거쳐 1972년 8월 30일 평양에서 ‘제1차 남북적십자 본회담 합의서’를 통해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위한 과제가 합의됐다. 그 내용은 남북 이산가족의 주소와 생사 확인 문제, 자유로운 상봉과 방문 실현 문제, 자유로운 서신 거래 실시 문제, 자유 의사에 의한 재결합 문제 등이었다.
이와 같은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후 현재까지 수많은 남북 당국 간 및 적십자회담을 추진했지만 남북관계의 부침 상황과 북한의 정치적 입장 등 때문에 실제 이뤄진 성과는 당초 목표와 이산가족들의 여망에 비해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다. 약 45년간 21차례의 대면 상봉, 7차례의 화상 상봉, 1차례의 서신 교환과 영상 편지 교환이 있었다. 그동안의 대면 상봉과 화상 상봉을 통해 4743건, 2만3676명의 상봉이 이뤄졌다. 이 과정에서 총 5만7567명의 생사가 확인됐다. 그리고 2008년 이산가족면회소가 금강산에 준공됐다.
2008년 마지막 금강산 관광객들을 북한 안내원들이 배웅하고 있다.
상봉을 중심으로 살펴보면, 1985년 9월 시범적으로 ‘이산가족 고향 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사업이 이뤄졌고, 이때 남북 100명의 이산가족방문단 중 65명이 92명의 가족, 친척들과 극적으로 상봉했다. 그 이후 1990년 11월 ‘제2차 이산가족 고향 방문 및 예술공연단’ 교환 사업에 합의했으나 북한이 혁명가극 공연 등 정치사상 공세에 더 관심을 보여 실현되지 못했다. 1992년 8·15를 계기로 ‘남북 이산가족 노부모 방문단 및 예술공연단’ 교환 사업을 추진했으나 북한이 방문단 교환 사업과 관계없는 핵 문제, 이인모 송환 문제, 한미 합동군사훈련 중지를 전제 조건으로 내세워 무산됐다.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본격적으로 이뤄진 것은 2000년 6월 남북 정상회담에서 ‘6·15 남북 공동선언’ 제3항에 이산가족 문제가 명시되면서 비롯됐다. 그해 8·15를 계기로 ‘제1차 이산가족 상봉 행사’가 남북 각기 100명의 이산가족이 선발돼 서울과 평양에서 이뤄졌고 제3차까지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 교환하면서 이루어졌다. 그러다 북한이 미국 9·11 테러에 따른 우리의 경계태세 강화를 구실 삼아 2001년 10월 상봉 행사를 연기한 후 금강산에서의 상봉을 고집했다. 2002년 4월에 실시된 제4차 상봉 행사부터 2015년 제20차까지 금강산에서만 상봉 행사가 실시됐다. 2005년부터는 거동이 불편한 이산가족에게 상봉의 기회를 제공하고, 한편으로 상봉의 기회를 확대하기 위해 화상 상봉이 이뤄진 후 2007년까지 모두 7차례 실시됐다.
13만1175명의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 규모에 비하면 상봉 성사 인원은 매우 적어 신청자의 약 3.4% 정도만 성사됐다. 이같이 저조한 이유는 남북관계의 부침 상황에 영향을 많이 받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이산가족 문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이나 태도가 우리가 생각하는 인도주의적인 문제와 다르기 때문이다. 북한은 기본적으로 이산가족 문제를 그들의 체제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는 정치적인 문제로 인식하고 있다.
이산가족 문제 협의를 위한 남북회담에서 북한은 이산가족 문제가 정치적인 문제라고 주장하면서, 우리 측이 이산가족 문제의 인도주의적인 성격과 그 시급성을 설명하면 통일만 되면 이산가족 문제가 다 해결된다고 회피하는 등 소극적 태도를 보였다. 그러면서도 이산가족 문제 협의를 그들의 정치적 목적에 이용하려고 했다.
1970년대 초 북한은 남북 이산가족 상봉 사업을 원활히 추진하기 위해 반공법과 국가보안법을 폐지하고, 반공단체들을 해체할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수시로 한미 합동군사훈련의 연기나 중단을 요구했다. 또한 그들의 대내 체제 강화수단으로 이용하기 위해 비전향 장기수 이인모 송환이나 최근의 탈북 여성 송환 문제를 협상카드로 사용했다. 그 외에도 북한이 이산가족 문제를 정치적 입장에서 접근하는 사안은 수없이 많다.
한편 북한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그들의 심각한 식량난, 경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실리적 차원에서 이산가족 문제를 활용하기도 했다. 2000년대 이후 이루어진 남북 이산가족 상봉 행사는 비료 등 대북 물자 지원을 받고 암묵적으로 교환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처럼 북한은 그들의 정치적, 실리적 입장 때문에 상황에 따라 비합리적으로, 임의로 협상카드화하기 때문에 우리의 목표대로 하루빨리 순탄하게 해결하기가 매우 어려운 사정이다.
2004년 6월 ‘평양 어깨동무어린이병원’ 준공식에 참가한 어린이들과 북녘 어린이들이 만나는 모습.
이산가족 문제를 정책의 최우선 과제로 삼아야
이런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이산가족 전원 상봉’을 공약으로 내세운 것은 이산가족 찾기 신청자의 절반 이상이 이미 사망하는 등 그 시급성이 절박하기 때문이다. 또한 그동안의 해결 방식으로는 신청자 모두의 상봉이 이뤄지려면 앞으로 100년 이상 걸린다는 암담함 때문이다. 그래서 특단의 결단과 추진이 필요하다는 절박한 인식을 바탕으로 이러한 공약이 제시된 것으로 보인다. 또한 문 대통령 본인이 남북 이산가족일 뿐 아니라 실제로 이산가족 상봉 행사에 참가해 마음으로 깊이 느낀 애절한 경험이 작용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해결 의지가 강하다 해도 공약이 성공적으로 이행되려면 몇 가지 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대북정책과제 중에서 이산가족 문제 해결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하지 않는 이상 이 문제는 결코 쉽게 해결하기가 어렵다. 북핵 문제 해결을 최우선 정책과제로 하는 것에 버금갈 정도로 이산가족 문제도 최우선 정책과제로 삼아야 한다. 북한이 한반도 비핵화 문제처럼 우리가 원하는 방식대로 쉽게 수용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둘째, 북한의 이와 같은 본질적 입장을 생각한다면, 이산가족 문제는 단순한 적십자회담이나 실무 차원의 당국회담보다는 북한 최고위층이 결단을 내릴 수 있도록 최고위급이나 최소한 고위급회담(접촉)에서 논의되고 타결돼야 한다.
셋째, 이산가족 문제는 남북관계 전반의 진전과 궤를 같이하는 가운데 획기적인 진전이 이뤄질 수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한두 차례 이벤트성 상봉으로 그치기 십상이다. 이산가족 문제는 남북관계 상황에서 협상카드화로 전락되어 정치적 의제나 다른 의제에 종속되게 된다.
넷째, 이산가족 문제를 획기적으로 진전시키기 위해서는 우리 사회에서 최우선 과제로 해결하겠다는 공감대가 형성돼야 한다. 현재는 이산가족 문제가 북핵 문제나 개성공단 등에 비해 상대적으로 부각되지 않고 있다. 정치권, 언론, 이산가족 사회 등에서 높은 관심을 갖고 이슈화가 이뤄져야 새 정부의 ‘이산가족 전원 상봉’ 정책 추진을 뒷받침할 수 있다. 여야를 포함한 정치권에서의 ‘이산가족 전면 상봉 촉구 결의안’이나 이산가족 사회에서 제기되는 ‘이산가족의 날’ 국가기념일 지정 추진 같은 다양한 노력은 국내외로 공감대를 형성하는 데 기여할 수 있으며 북한에 대해서도 우리의 강한 메시지를 전달할 수 있다고 본다.
다섯째, 기술적인 문제로 머지않은 시일 내에 이산가족 전원 상봉이 가능하기 위해서는 전면적인 생사 확인이 먼저 이뤄져야 한다. 전면적인 생사 확인 결과를 바탕으로 기술적으로 무리 없이 이산가족 전원 상봉을 순차적으로 추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프라이카우프 방식 등 구체적인 방법론 제시
새 정부의 ‘이산가족 전원 상봉’ 정책은 이산가족 문제의 시급성에 대한 확실한 인식과 이를 획기적으로 해결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표명하고, 실행력을 높이기 위해 ‘프라이카우프 방식’과 같이 구체적인 방법론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매우 크다.
그러나 과거의 이산가족 상봉 역사에 나타난 남북관계에서의 실상과 북한의 기본적인 입장 때문에 ‘이산가족 전원 상봉’의 성사는 결코 만만한 과제가 아니다. 위에서 제시한 전제를 유념하면서 지속적인 강한 의지와 말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구체적이고 실천적인 추진전략을 세우는 적극적 태도가 요구된다.

국민대 한반도미래연구원장,
전 통일부 차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