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기행 통일 여행

2월이면 피어나는 매향리의 상징 매화. 매향리에는 아직도 미군 기지의 흔적인 철조망이 마을 곳곳에 남아 있다.

경기 화성 매향리 전쟁 공포 사라지고
철새와 매화 향기 가득~

50년 넘게 미군 폭격기의 폭격 훈련으로 전쟁터 같았던 경기 화성시 매향리는 마을 주민들의 노력으로 평화를 되찾았다. 평화는 우리 스스로 이뤄내야 한다는 것을 일깨워준 매향리에서 통일의 봄기운을 느껴보자.

그 섬에 새가 돌아왔다. 괭이갈매기, 검은머리물떼새, 흰뺨검둥오리… 멸종 위기에 놓인 새들이 폭탄으로 소멸돼가던 그곳으로 돌아오고 있다. 6·25전쟁이 벌어지고 있던 1951년부터 미군 폭격기들이 폭격 연습의 표적으로 이용해온 경기 화성시 매향리 농섬. 54년 동안 주한미군뿐 아니라 괌, 오키나와에서 날아온 미 공군의 폭격 훈련장으로 이용되며 할퀴어지고 파괴된 곳이다.

농섬뿐이랴. 평화롭게 농사짓고 고기 잡던 주민들의 삶도 파괴됐다. 1955년에 공식적으로 ‘쿠니 사격장’이 들어서면서 주민들은 토지와 어장을 징발당했다. 오폭이나 불발탄으로 수십 명이 죽고 다쳤다. 만삭의 임신부가 포탄에 맞아 사망하고, 탄피를 줍던 어린아이들이 다쳤다. 시도 때도 없이 날아와 폭탄을 퍼붓는 폭격기들의 소음 때문에 주민들은 난청으로 시달렸다.

방준호 작가의 작품 ‘드림’.

더 이상 이렇게 살 수는 없었다. 1988년 6월, 매향리 주민들의 생존권 투쟁이 시작됐다. 농사꾼들이 낫을, 어부들이 어망을 손에서 내려놓고 폭격장 폐쇄 투쟁에 나섰다. 바닷가에서 1700명의 주민이 인간 띠를 만들고, 진압 전투경찰에 맞서 싸우고, 소음 피해 소송에 나섰다. 그렇게 17년을 싸운 결과, 2005년 드디어 미 공군 폭격장은 반백 년 만에 폐쇄됐다.

그러고 13년이 지났다. 매향리는 평화의 마을이 됐다. 하루에도 400회씩 이뤄지던 폭격이 사라지고 생태계가 복원되면서 물새들이 돌아오고, 주민들의 삶도 일상으로 돌아갔다.

“사격장이 폐쇄된 이후 마을이 정상화됐죠. 밤에도 푹 잘 수 있고, 무엇보다 주민들의 목소리가 여느 동네 사람들처럼 ‘온순’해졌어요. 이전에는 마을을 뒤덮는 폭격 소리 때문에 서로 싸우는 사람들처럼 큰 소리를 질러야 의사소통이 가능했거든요.”

매향리 역사관에는 마을에남겨진 포탄 껍데기로 만든 각종 조형물이 전시돼 있다.

매향리 주민피해대책위원장으로 활동해온 전만규 씨의 이야기다. 전 위원장은 11대조부터 매향리에서 터를 잡은 토박이. 어부로 살던 그는 고향 땅이 폭탄으로 망가져가는 것을 지켜보고만 있을 수 없어 ‘투쟁’에 나섰다. ‘집회 및 시위에 관한 법률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 받기도 했다.

마을 주민들이 합심해 사격장 폐쇄를 이끌어낸 뒤에도 그에게는 ‘위원장’이라는 이름이 여전히 붙어 있다. 지금도 마을 되살리기와 평화 알리기를 위해 ‘현역’으로 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는 매일 대책위 사무실 겸 옥상 전시장이 갖춰진 역사관 건물로 출근해 마을을 탐방하러 온 손님들을 안내하고 있다.

종탑이 마당에 세워져 있는 매향교회

매향리 평화마을 탐방은 ‘매향리 정보화마을’이라는 팻말이 세워진 마을 어귀의 역사관에서 시작된다. 정식 역사관은 올해 안으로 착공될 예정이다. 노천과 가건물 안에는 버려진 녹슨 탄피로 만들어진 각종 조형물들이 전시돼 방문자들을 맞는다.

대표적 민중미술가 임옥상 작가가 탄피들을 푸줏간의 고기 덩어리들처럼 철제 프레임 아래 대롱대롱 매달아놓은 ‘매향리의 시간’, ‘한열이를 살려내라’ 같은 걸개그림과 촛불시위 때 각종 철물 조형물 작품으로 잘 알려진 최병수 작가의 한반도 형상, ‘평화의 소녀상’을 만들었던 김서경·김운성 작가의 작품 등이 눈에 띈다. 돔 모양의 가건물 안에도 사진과 소규모 포탄으로 만든 작품이 가득하다.

대책위 활동이 시작된 1988년 당시 마을 이장을 지내며 전 위원장과 함께 마을 지키기에 나섰던 최희일(78) 옹은 전시관의 의의를 이렇게 설명한다.

“역사는 흐르는 게 아니라 만들어가는 것이오. 완전히 파괴됐던 우리 마을의 역사를 잊지 않기 위해 과거의 흔적을 보존하고 널리 알리고 있는 거지.”

역사관 앞에 진열된 녹슨 포탄들. 뒤로 보이는 한반도 모양의 조형물은 최병수 작가의 작품이다.

역사관에서 건너다보이는 곳에 위치한 매향교회가 탐방로의 두 번째 코스. ‘종탑 없는 교회’로 알려진 구 매향교회 건물이 신축 교회와 나란히 서 있다. 막상 찾아보니 종탑이 ‘없는’ 게 아니다.

건물 앞 평지에 서 있다. 흔히 종탑은 멀리서도 볼 수 있도록 교회 건물 꼭대기에 세워놓게 마련. 하지만 1968년 매향교회가 세워질 당시 이곳이 마침 폭격기가 하강하는 길목이었던 탓에 미군의 ‘고도제한’에 걸려 종탑을 건물 위에 올리지 못하고 마당에 세워놓았다.

구 매향교회 건물은 지금 ‘매향리 스튜디오’로 운영되고 있다. 평화를 주제로 한 각종 전시회가 이곳에서 열린다. 1월 말 현재 이용백 작가의 사진 작품과 조형물이 전시돼 있다. ‘마을관리자’로 활동하며 매향리 스튜디오에서 방문객을 안내하는 김미경 씨는 “평화마을이 조성된 이후 많은 방문객들이 이곳을 찾는데, 특히 가족 단위 관람객이 많다”고 설명한다.

포탄 껍데기에 매단, 평화를 염원하는 글귀. 매향리에서는 역사관뿐 아니라 마을 어귀, 도로변 등 곳곳에서 이와 같은 글귀와 마주치곤 한다.

매향교회에서는 저 멀리 바다 위로 농섬이 보인다. 폭격 때문에 원래 크기의 3분의 1 규모로 줄어들고, 폭격으로 흩어진 흙이 바다에 쌓이고 쌓여 육지와 연결된 바닷길이 생겼다고 한다. 섬을 바라보며 최희일 옹이 말한다.

“기지가 폐쇄되자 군에서 농섬도 아예 깡그리 파괴해 폭격장으로 이용됐던 흔적을 없애버리려고 했지. 그때 내가 물에 빠져 죽겠다고 나서서 막았어. 남겨두고 기억해야 하니까.”

우수 건축자산으로 등재된 쿠니 사격장

매향교회에서 차로 5분쯤 이동하면 ‘쿠니 사격장’ 부지가 나타난다. 쿠니라는 이름은 매향1리의 옛 이름인 ‘고온리’에서 비롯된 것. 폭격 훈련장을 관리하는 미군들이 1950년대에 지었던 기지 건물이 칠이 벗겨지고 바닥이 들뜬 채로 그대로 남아 있다. 내부로 들어가면 고작 15명 안팎의 미군들을 위해 만들어놓은 ‘바(Bar)’며 실내 농구장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전만규 위원장에 따르면 이 건물 역시 국방부에서 철거하려던 것을 마을 주민들이 막았다고 한다. 현재 ‘우수 건축자산’으로 등재돼 있는 이 건물은 올해 중 복원 및 리모델링에 들어간다. 주민들은 이곳에 북카페를 만들고, 폭격장으로 사용되던 당시의 동영상을 상영하는 한편 평화박물관을 건립할 계획도 갖고 있다.

미군 기지 ‘쿠니 사격장’에서 실내 농구장으로 사용되었던 공간. 1988년 매향리 이장으로 대책위 활동을 했던 최희일 옹이 환기창으로 들어오는 빛 아래 서 있다.

건물 못잖게 눈길을 끄는 역사의 흔적이 있다. 기지 건물 정원에 박혀 있는 비석이다. ‘JAMIE’라는 이름과 함께 ‘18년간의 쿠니 마스코트’라는 글자와 1992년 3월 8일이라는 날짜가 새겨져 있다. 이곳에서 18년 동안 키우던 개의 무덤이라고 한다.

“참 아이러니하죠? 매향리 임신부가 미군의 오폭으로 포탄에 맞아 사망했을 때는 장례비조차 제대로 보상받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미군들은 키우던 개 무덤에 이렇게 비석까지 만들었다니 말입니다.” (전만규 위원장)

구 매향교회 건물. 지금은 ‘매향리 스튜디오’라는 이름으로 각종 평화 관련 전시회를 열고 있다. 옆에 보이는 종탑이 미군의 고도제한에 걸려 교회 건물 위가 아닌 마당에 세워진 종탑이다.

매향리는 사시사철 찾아볼 만한 역사 교육장이지만, 특히 매화가 피어나는 2월이나 평화축제가 벌어지는 가을에 방문하면 맞춤할 듯하다. 마을에서는 2012년부터 해마다 평화축제를 열고 있다. 지난해 10월에는 ‘소풍’이라는 이름으로 마을 주민과 관광객 등 5000여 명이 모인 가운데 한판 잔치를 벌였고, 올해는 9월 중 행사를 열 계획이다.

포연으로 뒤덮였던 미군 폭격장의 흔적을 씻고 ‘매화 향기 가득한 마을’이라는 원래 이름을 되찾아가는 매향리에서는, 때마침 돌아온 철새들도 탐조객들을 기다리고 있다.

매향리 평화마을 안내

매향리 역사관은 연중무휴 관람 가능하지만 쿠니 사격장은 전만규 위원장의 안내를 받아야 출입이 가능하다.

매향리 대책위 사무실 : 031-351-3388
매향리 스튜디오 : (수요일~일요일) 11:00~18:00
문의(김미경 마을관리자) : 010-3247-1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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