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는 여느 때의 신년사와는 다른 부분이 발견된다. 우선 구성과 형식 측면에서 기존의 전체 목표, 경제, 사회·문화, 당 사업, 사상, 국방, 대남, 대외 등의 내용들이 압축·생략되는 등 기존과는 다소 다른 구성을 취하고 있다.
내용적인 측면에서도 ‘대남 부문’에 해당하는 남북관계에 이례적으로 많은 부분을 할애했다. 또한 연설문의 어투 역시 상당 부분 기존 스타일과 다른 구어체로 손을 본 느낌이다. 구성과 형식, 내용에서 감지되는 이런 변화는 아마도 김정은 위원장이 상당 부분 직접 관심을 갖고 연설문을 손보았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올해 신년사는 ‘국가 핵무력 완성’을 명분 삼아 남북관계에 많은 비중을 할애하며 적극적인 화해 제스처로 국면 전환을 꾀하는 동시에 ‘평화를 사랑하는 책임 있는 핵강국’ 이미지를 전달하는 데 주력한 것이 특징이다.
미국에 대한 직접 언급을 자제해 대북정책의 변화를 관망하는 한편, 한국에 대해서는 적극적인 화해 제스처를 보임으로써 남북관계에서 변화를 모색할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특히 눈길을 끄는 부분은 정권 창건 70주년과 평창동계올림픽을 ‘민족적 대사’로 표현하며, 이를 계기로 한 국면 전환 의지를 강력하게 표명한 부분이다.
‘국가 핵무력 완성 대업’
마치 2017년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남측이 제안한 화해·협력 메시지에 화답하듯 ▲평창올림픽 대표단 파견 ▲다방면의 남북 교류협력 실현 ▲남북관계 개선을 위한 논의 등을 제시하며 남북 당국 간 회담 개최 의지를 강하게 시사했다.
물론 한미 연합훈련 및 미국의 전략자산 한반도 전개 중단, 다방면의 교류협력을 위한 ‘법적·제도적 장치’ 철회 등을 제기함으로써 이후 대화 과정에서 5·24 조치 및 대북제재에 대해 문제를 제기할 여지를 둔 부분도 눈에 띄는 대목이다.
다음으로 공세적인 핵·미사일 고도화에 대한 언급을 자제하고 ‘전쟁억제력’ 및 ‘실전화 중심의 군사 활동’을 언급했다. 추가적 도발 및 고도화보다는 방어적 성격에 초점을 맞춰 ‘전쟁억제력’을 언급한 것으로 볼 때, 향후 핵실험이나 중·장거리 미사일 시험발사와 같은 전략 도발은 당분간 자제할 가능성이 높아졌다.
2017년 9월 5일 열린 ‘대륙간탄도로켓 장착용 수소탄’ 실험 완전 성공을 축하하는 평양시 군민경축대회 모습.
여러 언론에서 미국 본토 전역이 북한의 핵 타격 사정권에 있다거나 “핵 단추가 내 사무실 책상 위에 있다”는 김정은의 언급에 대해 도발을 예고하는 호전적 발언이라고 기사화했지만, 이것이 갖는 행간의 의미는 미국과 대등한 ‘균형’을 갖춰 ‘전략국가’가 되었다는 것과 향후 ‘핵군축’을 주장하기 위한 수사로 보는 것이 더 적합해 보인다.
다만 핵·미사일의 대량 생산 및 실전 배치 사업과 ‘핵반격 작전태세(2차 공격 능력)’를 강조함에 따라 향후 핵·미사일의 실전화와 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SLBM), 다탄두각개진입탄도미사일(MIRV), 지대함·대공미사일 등의 한미 전략자산의 틈새를 노리는 무기를 시험하는 군사적 움직임은 배제할 수 없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전략 도발보다는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피하면서 실전화와 은밀성을 효과적으로 과시하는 차원의 군사적 활동을 할 것으로 보인다.
‘평화를 사랑하는 책임 있는 핵강국’ 프레임
대내적으로는 대북제재에 따른 자원 조달의 제약 속에서 자구적인 정권 70주년 경제 성과를 내는 것에 주력할 것으로 예상된다. ‘핵무력 완성 대업’을 모든 부문으로 확산하는 ‘혁명적 총공세’를 강조한 만큼, 국가 경제발전 5개년 전략을 통한 경제 활성화를 촉구하는 일련의 선전 활동이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이런 움직임은 제재와 압박에 대응한 장기전 체제를 준비하기 위한 내부의 정비 시간을 확보하고 정권 창설 70주년에 맞춘 경제 성과 내기에 초점을 맞추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종전과 같은 대규모 건설보다는 대형 공장·기업소나 산업 부문의 생산 성과 도출, 효율성 제고, 자원 절약, 국산화 등을 강조하는 경제 전략을 구사할 것으로 예상된다.
전반적으로 올해 김정은 위원장의 신년사는 북·미관계의 대결 국면을 우회하는 남북관계의 공간을 확보하기 위한 ‘평화’ 공세 차원으로 볼 수 있다. 특히 국면 전환의 명분으로 성공적이고 평화적인 올림픽 개최를 앞세움으로써 ‘평화를 사랑하는 책임 있는 핵강국’이란 프레임을 부각하는 효과를 기대한 측면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으로 ‘평창 모멘텀’을 통해 대북 압박·제재 국면과 국내적으로 높아진 피로를 진정시키는 ‘시간 벌기’의 차원도 있을 것으로 보인다. 2018년 상반기 올림픽 참가와 성공적 개최를 명분으로 도발을 자제하면서 북·미 대화의 조건을 자연스럽게 충족시킨 후 올해 중·하반기에는 북·미 당국 간 대화를 모색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여자 아이스하키 남북 단일팀이 함께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향후 예상되는 북한의 행보는 우선 신년사 이후 평창올림픽 전후 남북관계 개선을 보여주는 적극적 행보에 나설 가능성이 높다. 올림픽 대표단 파견과 관련한 남북 고위급회담 등을 통해 올림픽 기간 군사적 충돌 방지를 위한 실무적 안전 보장 등에 적극적으로 나설 가능성이 있다.
실제로 신년사 이후 북한은 남북 고위급회담과 평창올림픽 참가와 관련된 실무회담에 적극적으로 임하고 있다. 올림픽 이후에는 남북관계 전반의 의제를 논의하는 고위급회담 및 군사회담에 응해 남북대화가 일정한 속도를 낼 가능성이 있다.
그러나 여러 장애와 변수가 존재한다. 평창동계올림픽 직후 3월 말부터 5월까지 한미 연합훈련의 연기, 축소, 중단을 놓고 남북 및 미국 사이의 갈등 국면이 조성될 가능성도 있다. ‘평창 모멘텀’으로 일정 기간 유화 및 대화 국면이 유지되겠으나, 한미 연합훈련 중단을 요구하는 북한의 공세 여부에 따라 남북관계는 매우 가변적인 상황에 처할 수도 있다.
한미 당국의 2018년 키 리졸브 및 독수리 훈련 연기 방침에 북한은 기존의 ‘중단’ 주장을 원론적으로 제기하는 수준에서 넘어갈 가능성이 있으나, 8월로 예정된 을지프리덤가디언(UFG)의 중단이나 2019년 한미 연합훈련 일정의 중단을 요구할 가능성도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의 평화적 개최에 자신들이 기여한 것을 명분 삼아 9월 9일 정권 수립 70돌에 앞서 진행되는 UFG의 중단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두 가지 시나리오
평창동계올림픽 직후 남북대화가 북·미 대화로 연결될 가능성과 관련해 일단 두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해볼 수 있다.
첫째, 남북대화 과정에서 북핵 문제 의제화를 거부하고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의 우선적 철회를 주장하며 남북대화와 북·미 대화의 연결을 차단하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 다만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일정 기간 북한이 핵·미사일 관련 위협적 활동을 중단할 경우, 북·미 당국 사이의 접촉과 대화가 남북대화와는 별도로 진행될 가능성이 있다.
둘째,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남북대화 과정에서 한국의 주도적인 제안과 견인을 통해 ‘한반도 평화’ 문제를 논의하는 4자 또는 6자의 대화 틀에 북한이 응해 초보적이지만 북핵 문제를 논의할 수 있는 다자의 논의 공간이 만들어질 가능성도 어렵지만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1월 9일 남북 고위급회담 후 합의 내용을 발표하는 조명균 통일부 장관.
다음으로 정권 수립 70주년 기념행사에 한국의 축하단 또는 고위급 인사 방북을 요청할 가능성이 있다. 평창동계올림픽에 대규모 대표단, 예술단, 기자단, 응원단 등을 파견한 것을 명분으로 이에 상응하는 답례 차원의 고위 인사나 축하단 파견을 요구할 가능성이 있다. 신년사에서 평창동계올림픽과 북한의 정권 수립 70주년을 동일 선상에서 ‘민족적 대사’로 표현한 만큼 축하단 파견 요구를 통해 남북관계 주도권을 잡으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
이런 요구는 기본적으로 김정은이 남북관계 개선 및 경제 분야에서 쌓은 성과를 정권 수립 70주년의 성과로 제시하기 위한 차원일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의 결단에 따라 남북관계가 획기적으로 개선됐음을 선전하기 위해 올해 9월 9일까지 남북관계에서 모종의 이정표를 만들려고 할 가능성이 있다.
통일연구원 북한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