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북한 북한연구가 김형덕(44) 씨는 한 달이면 두세 차례 서울은 물론 지방에 소재한 대학교 강단에 올라 강의한다. 2017년 11월에도 캠퍼스 4곳을 방문해 ‘평화통일의 씨앗’을 뿌렸다. 김 씨는 동국대 건축공학과 학생들과 만난 자리에서 “북한에는 아직도 엘리베이터가 설치되지 않은 건물이 많다.
통일이 되면 건축·건설업계는 대호황을 맞을 것”이라고 말했다. “통일 후에는 유럽에서 기차를 타고 남한까지 한 번에 오게 된다. 외국인 관광객으로 한반도가 북적거릴 것”이란 말도 덧붙였다. 통일강의는 그가 젊은 세대에게 통일의 영감을 불어넣는 일이다.
김 씨의 현재 본업은 북한 연구다. 2004년 서울 마포구에 설립한 연구소의 이름을 한반도 평화를 기원하는 뜻에서 ‘한반도평화번영연구소’라고 붙였다. 더불어민주당 싱크탱크인 민주연구원에서 객원연구원으로도 일하는 그는 “몸이 성치 않거나 힘들 때도 있지만 ‘오늘 강의하지 않고 연구하지 않으면 다음 세대에게 평화통일의 희망을 불어넣을 수 없다’는 것이 내 신념”이라고 했다.
젊은 세대에게 통일 영감 불어넣다
그런 김 씨가 2017년 6월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특보로 임명됐다. 임무는 북한 관련 현안을 분석해 정보보고서를 작성해 제출하는 것. 6개월째 매주 월요일마다 열리는 특보단 회의에 참석하고 있다. 그는 그간 수십 년에 걸쳐 모은 북한 관련 자료 덕분에 특보단 첫 회의 때 문재인 정부와 더불어민주당의 대북정책에 관해 여러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발표할 수 있었다.
“역대 당직자를 통틀어 당 대표에게 북한 관련 정책을 제언한 것은 제가 처음이라고 해요. 여당으로서는 탈북한 사람이 말하는 대북정책을 직접 들을 수 있는 경로를 확보하게 된 셈이지요.”
김 씨는 1994년 북한을 탈출해 중국, 홍콩, 베트남 등지를 떠돌다 천신만고 끝에 한국에 들어왔다. 이 과정에서 북한에서 두 번, 중국과 베트남에서 각각 한 번씩 투옥과 탈옥을 경험했다. 연세대에서 경영학을 공부하고 김성호 전 의원의 정책비서관으로 활동했다. 대학 동아리에서 만난 지금의 아내와 가정을 꾸린 그는 아내, 두 딸과 함께 2005년 탈북민으로는 처음으로 금강산 관광길에 올랐다.
2016년 가족과 함께 중국 여행을 하고 있는 김형덕 씨.
이후 대기업 기획팀을 거쳐 2008년 공인회계사가 된 부인과 함께 탈북민 최초로 2년간 미국 연수를 다녀오기도 했다. 그는 “여기까지 온 게 감개무량하고 한편으로 격세지감을 느낀다”고 말했다.
김 씨는 16세 때 군사조직인 돌격대에 입대해서 3년간 군 생활을 했다. 북한에선 “국가의 허락 없이는 안 된다”는 말을 들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체제라는 숭고한 가치를 지켜왔다”는 대한민국 사회에 정착했다.
그런 그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것이 언론에 기고한 그의 가족 여행기다. 김 씨는 한 잡지에 아내, 두 딸과 함께한 ‘중국, 러시아, 몽골 52일간의 여행기’를 게재해 통일이 만들어낸 한 가족의 모습을 사람들에게 보여줬다.
“바쁜 와중에도 틈틈이 언론에 글을 기고하는 건 저의 생활상을 통해 북한 사람들을 자극해 ‘남한은 어떤 곳일까’ 생각하게 만드는 효과가 있기 때문이에요. 해외여행을 자유롭게 다니는 저와 가족의 모습은 남한에서 살고 있는 탈북민뿐 아니라 북한 사람들이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받아들이는 데도 도움이 될 겁니다. 세상은 보편적 가치가 비보편적 가치를 대변하게 돼 있어요. 모름지기 발전한 사회가 보편적인 가치를 더 많이 수용하는 법이니까요.”
“남북 교류로 북한 사람들 의식 깨워야”
올해로 남한에서의 북한연구가 생활도 25년째를 맞았다. 그가 최근 10년간 남한에서 북한을 연구하는 동안 크게 깨달은 것은 ‘남북 교류의 가치’다. 남북이 분단된 지 올해로 73년. 그사이 남한과 북한의 정치·경제적 격차는 더욱 커졌다.
그는 “현실적으로 조건이 다른 상대가 통일을 이루기 위해선 ‘공동의 이익’이 있어야 하는데, 그게 바로 개성공단이다. 문재인 정부가 점진적인 평화통일을 내세우며 상호 존중에 기초한 남북관계 발전을 추구하고 있어 참 다행”이라고 했다.
“통일정책은 감정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에요. 이성적으로 합리적으로 접근해야 합니다. 다음 세대의 미래를 위한 일이니까요.”
억세고 강인한 그의 말투에서 강한 확신이 묻어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