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의 길을 묻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은 최근 문재인 정부가 한반도 평화를 위한 주도권을 확실하게 잡았다고 평가했다.

이종석 전 통일부 장관 “제대로 앉은 한반도 운전석
신중하되 과감한 운전 필요”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가 한반도 평화통일에 어떤 역할을 할 것이며, 우리 정부와 국민들은 앞으로 어떤 준비를 해나가야 할까. 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과 국가안전보장회의(NSC) 상임위원장을 지낸 대표적 ‘북한통’인 이종석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으로부터 그에 대한 의견을 들어보았다.

북한이 대화 테이블에 나선 배경이 있을까요.
“문재인 대통령과 우리 정부가 보여준 강력한 반전(反戰), 평화의 입장 표명이 큰 역할을 했다고 봅니다. 3불 원칙(사드 추가 배치, 미국 미사일방어체계 편입, 한·미·일 군사동맹에 반대함을 의미) 선언, 전쟁은 절대 불용한다는 의지 선언, 한중 정상회담 당시 평화 4원칙 합의 등이 그것이죠.

특히 주목할 것은 문재인 대통령이 미국과 합의를 거치기도 전에 먼저 한미 연합군사훈련 연기를 제안한 사실입니다. 만일 우리 정부가 말로만 ‘남북대화의 창은 열려 있다’고 하면서 미국의 호전적 발언에 침묵했다면 북한은 대화의 장에 나오지 않았을 것입니다. ‘한국과 대화해봐야 얻을 게 없다’고 생각했을 테니까요.”

북한의 평창동계올림픽 참가를 통해 우리가 얻을 것은 무엇입니까.
“첫째, 최근 악화된 한반도 위기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습니다. 적어도 올림픽 기간까지는 전쟁에 대한 위협이 상당 부분 해소된 것이죠. 둘째, 북한이 참가함으로써 평창동계올림픽 성공 가능성이 높아진 것은 물론이고 북한이 선수단과 함께 예술단, 고위 대표단을 파견할 경우 세계적 이슈가 될 것입니다. 셋째, 이제 대화 채널을 열었기 때문에 한반도의 우발적 충돌 사태에 대응할 수 있는 위기관리 능력이 생겼습니다. 마지막으로 올림픽을 계기로 남북대화가 원활히 진행되면 이것이 북핵 문제를 풀 수 있는 고리로 작용할 수 있습니다.”

이종석 전 장관은 ‘압박과 제재 일변도’ 정책에 한계가 있다고 꾸준히 주장해왔다. 그는 ‘원유 공급을 중단하고 해외 송금을 차단하는 등 제재를 가하면 북한이 핵을 포기할 것’이라는 시각에 회의적이다.

북한의 객관적 실상을 잘못 판단해서 나온 주장이라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북한은 김정은 체제에서 식량 자급도를 일정 수준까지 높여놓은 상태다. 국제사회의 제재가 가해지더라도 버틸 수 있는 내성을 상당 수준 갖췄다는 것이다. 제재가 ‘무용’할 뿐 아니라 오히려 불필요한 국지적 갈등을 촉발할 수 있는 스트레스 요인이 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국제사회가 압박과 제재를 철회한다고 과연 북한이 핵실험을 중단하고 미사일을 더 이상 발사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을까요.
“지금까지 9년간 제재와 도발의 악순환만 반복됐습니다. ‘제재’는 실패한 정책인 것입니다. 북한이 가장 원하는 것은 체제 유지이고, 북한은 이를 보장해줄 나라는 바로 미국으로 보고 있습니다.

미국이 북한에 ‘체제를 인정하고 공격을 안 할 테니 핵을 포기하라’고 협상 카드를 내밀어야 한다는 겁니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리라는 확신은 그 누구도 하기 어렵습니다. 그렇다고 시도조차 않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런 접근이 핵문제 해결에 새로운 물꼬를 트는 계기가 될 수 있습니다.”

참여정부 시절 대북 창구로서 많은 역할을 하셨습니다. 북한을 상대할 때 가장 어려운 점은 어떤 것이었습니까.
“북한은 ‘나의 관리 능력 범위’를 벗어난 상대였습니다. 우리와는 완전히 상이한 질서와 가치를 가진 상대이기 때문에 나의 전략이 어떻게 받아들여지고 반응할지 예측하기가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상대의 ‘셈법’을 이해하는 게 가장 큰 과제이고 어려움이었죠. 이런 ‘그들 나름의 셈법’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면 북한 체제를 ‘비이성적이고 기괴한 사회’로 치부해버리기 십상입니다. 하지만 북한은 절대 기괴한 체제가 아닙니다.

자신을 둘러싼 외부 환경에 끊임없이 적응하고 길항하며 자신의 체제를 구축했죠. 그들은 무모하지 않습니다. 나름의 셈법에 따라 행동하는 체제입니다. 그런 관점에서 북한을 이해하고 분석해야 하는데, 이를 국민들에게 이해시키는 게 쉽지는 않았습니다.”

지금도 김정은을 ‘이해하기 힘든 전쟁광’이라고 보는 시각이 많습니다.
“김정은의 미사일 도발은 ‘무모한 미친 짓’이 아닙니다. 미국의 적대적 대북정책에 대응하고 외부 세력의 물리적 개입을 차단함으로써 체제를 안정적으로 유지하기 위한 수단을 확보하고자 치밀한 계산에 따라 이뤄진 것이죠.

그래서 댄 코츠 미 국가정보국장이 ‘김정은은 미치지 않았으며 자신과 국가의 생존방식으로 핵과 미사일에 집착하고 있을 뿐이다. 오히려 그는 제재에 대비해 냉철하게 준비를 해온 것’이라고 진단한 것입니다.”

2012년 대선 당시 문재인 대선 후보와 김대중·노무현 정부 시절 통일부 장관들이 2007년 남북 정상회담 표지석을 찾았다. 맨 오른쪽이 이종석 전 장관.

이런 상황에서 북한을 향한 우리 국민들의 적대감은 갈수록 커지는 게 아닌가 염려스럽기도 합니다.
“1987년 6월항쟁 이래 우리 민주주의는 꾸준히 발전해왔습니다. 그런데 민주주의 가치 중 하나인 다원주의, 즉 ‘나와 다른 상대에 대한 관용’은 오히려 축소되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북한에 대해 적대감을 가질 만한 사건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지만, 근거 없는 적대감은 안보에 도움이 안 됩니다. 객관적인 자료에 근거해 북한 체제의 내구성을 이야기하거나, 평화통일이라는 국익을 위해 북한과의 협상을 주장해도 ‘친북’으로 매도되는 분위기는 해소돼야 합니다.”

문재인 정부가 표방한 ‘통일국민협약’도 보수와 진보 간 갈등이 심하고 북한에 대한 시각차가 큰 국민들의 다양한 스펙트럼을 껴안아야만 가능하다는 어려움이 있습니다.
“상당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분열된 국론을 하나로 모아야 한다는 ‘당위’는 누구나 알고 있으나 실현은 쉽지 않습니다. 보수와 진보가 절반씩 물러나는 기계적 절충은 불가능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에서는 ‘진보’나 ‘보수’라는 용어 자체가 잘못 쓰이고 있습니다.

‘진보=친북’이라는 선입견만 해도 잘못되었습니다. 3대 세습을 한 북한은 진보사회가 아니라 수구 중에서도 가장 강한 수구이죠. 그런데 진보 집단이 친북을 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진보나 보수라는 개념 자체가 잘못 이해되고 있는 것이죠. 이런 이분법에서 벗어나 국민들이 상식과 합리를 갖고 안보·통일 문제에 대한 여러 쟁점을 객관적으로, 실사구시적으로 이야기하며 공통 영역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민주평통과 <통일시대>가 해야 할 역할이 클 것 같습니다.
“그렇습니다. 민주평통은 국내와 해외에 2만 명에 이르는 구성원을 지닌 풀뿌리 조직입니다. 국론을 형성하는 데 엄청난 역할을 할 수 있는 국가기관입니다. 하지만 구성원들 중에는 9년간 이어진 지난 정부들과는 다른, 새 정부의 통일정책 때문에 혼란을 겪을 분들도 있을 것입니다.

<통일시대>가 이 같은 새로운 통일정책을 이해시키기 위해 북한에 대한 객관적인 정보를 더욱 풍부하게 전달하고 담론의 장을 마련하는 기능을 해야 합니다.”

지난 정부의 통일정책 중에서 계승하고 지켜나가야 할 부분이 있다면.
“이명박·박근혜 정부의 북한 인권 정책은 일정하게 계승해도 된다고 봅니다. 인권이라는 화두는 인류 보편적인 문제입니다. 따라서 이 부분은 남북관계 현실을 고려하되 기본적으로 이전 정부의 정책을 이어가는 게 맞다고 봅니다. 하지만 지난 정부 통일·외교정책에서의 수많은 시행착오는 꼼꼼히 성찰해서 타산지석으로 삼아야 합니다.”

현 시점에서 문재인 정부의 대북정책에 점수를 매긴다면.
“지난 한두 달 사이 문재인 대통령은 중국과의 정상회담에서 ‘평화 4원칙’과 함께 ‘전쟁 절대 불가’를 천명하고, 한미 연합훈련 연기를 먼저 제의해 김정은이 대화 테이블로 나올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등 의미 있는 행보를 보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이제 우리 정부가 한반도 통일 문제를 조율할 수 있는 운전석에 제대로 앉았다고 봅니다. 물론 북한의 의도를 조심해라, 대화에 신중을 기하라는 우려의 목소리는 귀 기울여 들어야 하지만 조심만 해서는 차가 앞으로 나아가지 않습니다.

정확한 목적지, 즉 평창동계올림픽에 북한을 참가시켜 평화적으로 성공시킴으로써 한반도 평화를 이루는 데 일조한다는 목표가 설정됐으니 그 목표를 향해 머뭇거리지 말고 속도를 내야 합니다. 변수가 발생할까 봐 걱정해 일을 만들지 않는 것보다는 변수를 대비하면서 일을 만들어나가는 것이 필요한 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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