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12월 도널드 트럼프 미 행정부는 ‘국가안보전략(NSS·National Security Strategy) 2017’을 발표했다. 오바마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 2015’가 국제 제도를 중시하고 동맹과의 협력 및 중국과의 파트너십을 강조했던 반면, 이번 보고서는 매우 다른 전략을 제시하고 있다.
미국의 힘을 내세워 미국의 이익을 가장 중요하게 지키겠다는 ‘미국 우선주의’ 국가안보전략을 내세우고 있다. 특히 중국과 러시아를 동반자가 아니라 경쟁자 또는 수정주의자로, 북한은 이란과 같이 미국을 위협하는 국가로 규정하고 있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 2017’은 레이건 대통령이 1980년대에 추구했던 것과 같이 ‘힘을 통한 평화’를 추구한다는 점에서 전형적인 현실주의적 접근을 취하고 있다. 이는 오바마 정부가 군사력을 경시하는 자유주의적 정책을 추진한 결과 미국의 군사력이 러시아나 중국과 같은 경쟁국에 대한 전략적 우위를 예전과 같이 누리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적 인식에 기초해 있다.
현실주의적 국제주의와 신중상주의
물론 트럼프 정부가 실질적으로 우려하는 것은 러시아나 중국의 전체적 군사력이 미국을 추월할 것이라는 비현실적인 시나리오라기보다는 이들 경쟁국이 사이버나 지역 군사균형 분야에서 미국의 약점을 파고들 가능성이라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중국이나 러시아가 아시아나 유럽에서 영향력을 확대할 가능성을 견제하겠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트럼프 정부는 부시 정부가 추진했던 것과 같은 일방주의적 정책을 추진하지는 않을 것임을 시사하고 있다. 즉 “미국이 주도하지 않을 경우 악의를 가진 행위자들이 그 공백을 채우면 미국에 불이익을 가져다줄 수 있다는 교훈”을 언급하며 현실주의적 국제주의 입장을 보이고 있기도 하다.
트럼프 정부를 구성하고 있는 현실주의적 국제주의자와 신중상주의자의 타협은 대(對)중국 정책에 잘 나타나 있다. ‘국가안보전략 2017’에서 양자는 ‘중국을 국제기구와 세계 경제에 참여시켜 변화시킬 수 있을 것이라는 지금까지의 전제가 틀린 것으로 판명됐다’는 데 견해가 일치한다.
현실주의적 국제주의자는 중국이 “인도·태평양 지역에서 미국을 밀어내려고” 하는 수정주의국가라며 안보 위협으로 보고 있고, 신중상주의자는 중국이 “미국의 지적재산권을 훔치고”, “미국이 기여해 건설한 국제기구를 착취하고” 있는 경제 위협으로 보고 있다. 트럼프 정부의 두 축을 이루는 그룹이 중국을 ‘위협’으로 보는 데는 의견이 일치하고 있는 것이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무역과 통상을 국가안보전략과 직접 연결하고 있다. 사진은 1월 5일(현지 시간) 미국 무역대표부 회의실에서 열린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1차 개정협상.
하지만 중국의 부상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지에 대해서는 합의된 뚜렷한 대안이 없다는 한계도 드러내고 있다. 오바마 정부가 시도했던 것과 같이 인도·태평양 지역에 미 군사력을 증강하겠다는 전략이 제시된 것도 아니고, 신중상주의자들의 반대 때문에 이런 방향을 추구하기도 쉽지 않다. ‘중국 위협론’에 대한 이러한 전략적 합의와 전술적 모호성은 한반도에 기회가 될 수 있다는 측면도 주목할 만하다.
한편 트럼프 정부는 무역과 통상을 국가안보전략과 직접 연결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중상주의적 무역정책과 국제주의적 자유무역 사이의 타협이 나타나고 있다. 불공정한 무역 관행이나 외국의 부정부패와는 전쟁을 벌이겠다고 선언하는 한편, 자유시장 원칙 아래 ‘공정하고 호혜적 무역’을 추구하겠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지적소유권 및 전자상거래, 농업, 노동, 환경 등에서 ‘높은 기준’을 충족시키는 무역·투자협정을 추진하겠다면서도, 뜻이 같은 동반자와는 ‘공정하고 호혜적 경제 질서’를 지키기 위해 협력하겠다고 천명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 이익을 우선시하고 있으면서도 국가의 전면적 개입은 배제한 채 자유시장 경쟁과 민간기업의 주도권을 살리겠다는 균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국가안보전략과 무역·통상 연결
이런 면에서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안보전략은 선거 유세 중 내세웠던 단순한 일국주의와는 일정하게 거리를 두고 있다. 미국의 이익에 필요하다면 국제기구나 국제조약을 탈퇴할 수도 있다고 공언했지만, ‘국가안보전략 2017’은 전후 국제질서가 미국에 이익이 되었음을 인정하고 이를 중시하겠다고 천명하고 있다.
미국의 국가이익을 전면에 내세울 것을 원하는 중상주의자들이 국가안보전략을 비판하는 이유이기도 하지만, 현실주의적 국제주의자와 타협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반영하기도 한다. 우리 입장에서 이러한 양면성은 동시에 도전과 기회가 된다고 하겠다.
‘국가안보전략 2017’은 북한을 총 17번 언급하며 ‘북한 위협’을 적시하고 있다. 첫째, “핵무기로 미국인 수백만 명을 살상할 수 있는 능력을 추구”하기 때문에 미국의 위협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둘째, 미국 동맹국들을 위협하는 ‘지역의 위협’이라는 것이다. 셋째, 핵무기를 확산할 수도 있는 ‘세계의 위협’이라고도 적시하고 있다.
이러한 위협에 대응해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한반도 비핵화(CVID)를 성취하겠다”며 부시 행정부가 목적으로 내세웠던 CVID를 되풀이했다. 하지만 “동맹국 및 동반자 국가들과 협력”해 이 목적을 달성하겠다며, 일방주의가 아닌 다자주의를 핵심 수단으로 삼겠다고 한 것은 주목할 만하다.
미국의 군사력 우위를 상징하는 핵항공모함 로널드 레이건호.
군사적인 대처 방식에서도 부시 행정부의 ‘선제타격’이 아니라 억제와 방어를 강조한 것도 눈에 띄는 부분이다. 즉 ‘국가안보전략 2017’은 “핵, 화학, 방사능, 생물무기 공격을 방지”해야 하고 “잠재적 위협이 미국에 도달하기 이전에 억제·교란·격퇴해야 한다”고 지적하고 있다. 테러리스트는 그 근원을 공격해 뿌리를 뽑겠다고 한 것과는 달리 핵·생화학무기 대처 방식으로는 방지, 억제, 교란, 격퇴를 강조한 것이다.
구체적으로는 ‘향상된 미사일 방어, 대량살상무기 탐지·교란, 반확산 능력 향상’을 열거하고 있다. 전쟁을 불사하겠다는 호전적 이미지가 강하지만, 트럼프 정부의 기본 전략은 방지와 억제 및 격퇴 등 전통적 안보정책에서 벗어나지 않고 있다.
이는 부시 행정부의 ‘선제공격’ 전략이 미국에 득보다는 해가 됐다는 국제주의자의 평가와 미국의 지나친 군사적 개입을 경계하는 신중상주의자가 의견 일치를 보이는 부분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 어젠다 주도 통한 평화·통일 가능성
전체적으로 봐서 ‘국가안보전략 2017’은 미국의 힘을 내세워 미국의 이익을 우선하겠다는 ‘미국 우선주의’를 내세우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방주의나 ‘선제타격’을 내세웠던 부시 행정부의 네오콘(신현실주의) 입장, 또는 대통령 선거 유세기간에 보였던 일국적 중상주의에서 다소 물러나 다자적 국제주의와의 타협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타협이 국가안보전략에서의 전략적 확실성과 전술적 모호성을 낳고 있다고 보인다.
트럼프 행정부의 국가전략이 보여주는 국제주의·중상주의 혼합은 “기존 동맹에 대한 공약(Commitment)을 더욱 강화”할 것이라는 동맹 중시 입장으로도 나타나고 있다. 미국의 국가전략에 내재한 타협성은 한국이 활동할 수 있는 여러 가지 공간을 열어줄 것이다.
우리 정부가 새로운 아이디어를 계속 창발해 이 공간을 활용하면 어젠다를 주도할 수 있다. 어젠다 주도자로서 미국과 중국을 견인하고 한반도에서의 새로운 평화와 통일의 가능성을 열 수도 있는 것이다.
일본 국제기독교대 정치·국제관계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