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국제정치의 가장 중요한 패러다임은 국가, 특히 민족국가였다. 국제사회의 주요 관심사도 국가와 민족 간 갈등과 분쟁의 조정이었다. 그러나 21세기 지구촌 현상의 가속화로 민족국가의 역할이 감소되고 있다. 초국가적 정치 · 경제협력체 출현으로 지구촌이 하나의 공동운명체로 바뀌고 있다. 따라서 한반도 통일은 복고적인 것이 아니라 미래 지향적이어야 한다. 분단 이전 상태로의 회귀가 통일이 아니다. 통일은 새로운 창조를 지향하고 21세기 동북아와 세계에 걸맞은 미래상을 제시해야 한다.
한반도에서의 근대민족국가의 인식은 일제에 대한 저항적 성격을 지녔다. 민족주의적 경향은 좌우의 이념 지향과 함께 남북한 체제 정당화의 핵심 요소로 작용했다. 북한은 항일 빨치산 투쟁을 정권 창출·유지를 정당화하는 ‘신성’ 영역으로 만들었고 ‘신화’로 재생산했다. 특히 구소련과 동구권 붕괴로 우리식 사회주의를 고수하는 김일성 민족이 제일이라는 우리 민족 제일주의는 핵 개발 논리를 뒷받침하고, 미 제국주의 타도와 남조선 해방의 논리와 맞닿아 있다.
남북한은 근대국가 건설 과정에서 사회주의와 자본주의라는 이념 대립의 길을 걸어왔다. 동서독의 통일 과정에서도 증명된 바와 같이 남한식 자본주의 시장경제 체제가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보다 우월함이 세계사적으로도 입증됐다. 현재 북한에서도 빠르게 진행되고 있는 아래로부터의 시장화는 기존 사회주의 제도의 경제적 성과에 불만을 가진 북한 주민들이 새롭게 능동적으로 대처해가는 과정이다. 이는 사회주의식 계획경제가 가져온 빈곤으로부터 주민들의 생존을 위한 마지막 선택으로서 북한이 나아갈 방향을 예고하는 바람직한 변화다.
북한은 기존 사회주의 제도로는 기아 문제조차 해결하기 어려운 상태다. 아래로부터의 점진적인 변화보다 위로부터의 혁신이 시급히 요청된다. 하지만 김정은은 3대 세습 왕조국가 체제 유지를 위해 핵 개발만이 정권 유지의 마지막 보루라 생각한다. 하루빨리 북한 지도부가 핵 개발보다는 시장경제로의 개혁 · 개방만이 살길임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과거와 달리 국가 차원 이외에 국제적 인도지원단체들도 탈북자 지원에 개입하고 있다. 이는 중국 실정법의 경계를 넘어서까지 진행되고 있고, 미국의 북한인권법 통과는 탈북자 문제 등 북한 인권 문제가 한반도의 지정학적 위치를 넘어 전 지구적 문제로 취급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한반도 문제는 국가와 비국가 행위자들 사이에서도 발생하고 있고, 안보 이슈는 경제 및 인도주의 이슈들과 긴밀히 연관된다. 그러므로 통일 문제는 남북한, 동북아와 세계 문제로서 다양한 행위 주체와 이슈들이 중층적, 복합적으로 연관돼 있다.
우리에게는 이런 복잡한 국제관계를 지혜롭게 해결해야 하는 과제가 남아 있다. 독일 통일 과정에서 “베를린과 독일의 분단은 평화와 자유를 통해 극복돼야 하며, 이 과정에서 미국의 안보가 유럽의 안보와 연결돼 있다”는 베이커 미 국무장관의 말은 한반도 문제 해결에도 많은 시사점을 준다.
한국학중앙연구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