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커스

10월 25일 서울 코엑스에서 열린 식품박람회에서 아세안 국가들의 모델들이 자국 식품을 홍보하고 있다.

아세안과 우리의 통일 외교 아세안을 잡아야 세계를 잡는다

문재인 대통령은 역사상 처음으로 취임 직후 아세안 국가에 특사를 보냈으며, 대아세안 외교를 4강 수준의 외교로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했다. 아세안의 중요성과 의미를 짚어보았다.

우리에게 동남아시아국가연합(아세안)이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고 있다. 세계경제와 국제정치에서 아세안의 중요성이 부각된 것은 이미 오래된 일이지만 요즘만큼 우리 국민, 기업, 정부가 합치된 관심을 보인 적은 일찍이 없었던 것 같다.

아세안 회원국 10개국과 2003년에 독립한 작은 나라 동티모르 등 11개 나라로 이뤄진 동남아는 이미 4, 5년 전에 한국인들이 가장 많이 찾는 해외 여행지로서 중국을 능가하고, 반대로 한국을 관광하는 외국인들이나 취업 또는 결혼으로 한국에 뿌리를 내리려는 외국인들 중에도 동남아인들의 수가 급증하는 추세에 있다. 지난해부터 사드 배치에 대한 중국 정부의 보복과 중국인들의 반한 감정이 격화되면서 한국 기업들도 아세안 시장을 중국의 대안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베트남이 특히 각광을 받아 삼성전자 베트남법인 단일 기업이 베트남 총 수출액의 25%를 기록하는 믿기지 않는 일까지 일어나고 있다. 한국의 대기업들이 모두 아세안 시장을 공략하기 위한 전략 수립에 여념이 없다. 한편 우리 정부가 최근 정치와 안보 분야에서도 아세안 외교에 주목하게 된 것은 만시지탄의 감이 있으나 실로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약소국이 뭉쳐 세계를 이끌다

아세안이 국제정치 무대에서 주목을 받기 시작한 것은 창설 30주년이 되던 1997년 이후다. 갑자기 밀어닥친 동아시아 외환위기가 지역 협력, 나아가 지역 통합의 필요성을 뼈저리게 인식시킨 덕분이었다. 경제 위기의 급작스러운 발발과 이에 따른 사회적 혼란과 정치적 격동은 그들이 믿고 따르던 서구 선진국들과 이들이 주도하는 국제기구들에 대한 큰 실망을 안겨주었다.

창설 후 30년 동안 유명무실하기만 했던 아세안이 아세안 공동체라는 지역 협력체를 향해 통합의 시동을 걸고, 불신과 경계의 눈으로 바라보던 중국과 일본을 포함한 동북아 국가들을 협력 파트너로 재인식하게 되었다. 최근 20년 사이 아세안과 한·중·일은 ‘아세안+3’으로 불리는 협력 채널을 통해 경제 분야는 물론이고 사회문화와 정치안보 영역까지 상호 협력을 강화·확대하고 있다.

아세안+3을 통한 동남아와 동북아 간의 협력체제 구축은 제2차 세계대전, 냉전, 외환위기 등으로 이어진 역사적 격동 속에서 동남아를 버리고 떠났던 서방국가들을 다시 돌아오게 만들었다. 동아시아 국가들만의 지역주의로 중국의 위상이 더욱 강화될 것을 두려워한 미국은 아시아로 다시 눈을 돌리고, 미·중 패권 경쟁을 자신의 이익 증진과 교섭력 강화에 활용하려는 아세안은 이를 쌍수로 환영했다.

베트남에서 열린 K-뷰티 행사.

아세안은 유럽 국가들과 아시아·유럽정상회의(ASEM)를 정기 개최하고 미국, 러시아, 인도, 호주, 뉴질랜드와는 동아시아정상회의(EAS)를 정례화해 자신을 아시아를 넘어 국제정치의 중심 무대로 만들어놓았다. 1994년 창설 이후 큰 역할을 하지 못하던 아세안지역안보포럼(ARF)도 참여국 수가 27개로 늘어나면서 세계 최대의 다자주의 안보포럼으로 부상했다. 약소국과 중견국의 지위를 벗어나지 못하는 개별국가들이 지역 협력체 구축을 통해 힘과 지혜를 모음으로써 냉혹한 현실주의가 지배하는 국제관계의 중요한 변수가 된 것은 놀라운 일이다.

무역과 투자 분야에서도 아세안은 1992~1997년 사이 10개국 전 회원국이 참여하는 아세안자유무역지대(AFTA)를 완성하고, 2007~2010년 사이 한·중·일 3국과 3개의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한 데 이어 인도, 호주, 뉴질랜드로 FTA를 확대했다. 최근 10년 동안은 한·중·일과 아세안이 공동으로 참여하는 동아시아 FTA, 아예 16개국을 통으로 묶는 동아시아 포괄적 경제 파트너십(CEPEA)과 역내 포괄적 경제 동반자 협정(RCEP)이 제안돼 연구와 협상이 이뤄졌다.

미국이 주도하고 일본이 공들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TPP)이 트럼프 미 대통령 취임으로 무산된 뒤에는 세계 최대 규모의 RCEP가 더욱 힘을 받아 실현 가능성이 크게 높아지고 있다.

아세안은 세계 3대 시장, 4대 교역국, 5대 경제 규모를 자랑한다. 6억4000만 명을 넘어선 인구는 중국과 인도에 이어 세 번째로 많고, 연 2조4000억 달러에 이르는 총 교역액은 유럽연합(EU)·중·미에 이어 4위, 총 2조6000억 달러에 달하는 국내총생산(GDP) 규모는 미·EU·중·일에 이어 5위를 차지하고 있다.

게다가 아세안 경제는 향후 10년간 연 5.7%의 성장이 예측되고, 중산층이 계속 확대되고 있으며, 노동인구 연령이 낮아 중국, 인도 시장과 함께 21세기 세계경제를 견인할 중심축의 하나로 부상하고 있다. 나아가 2015년 말 아세안 경제공동체 출범으로 자본, 노동, 기술의 역내 이동이 한결 손쉬워져 외국인 투자자들의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아세안이 국제적인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는 것은 이런 경제적 가치와 잠재력 때문만은 아니다. ‘탈냉전’, ‘문명충돌’, ‘동아시아 부상’ 등의 키워드로 축약할 수 있는 21세기 국제질서 속에서 매우 높은 전략적 가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구소련 해체 이후 미·소 간 동서 대립이 미·중 간 패권 경쟁으로 대체되고, 이슬람 문명과 서구 문명의 충돌이 극으로 치달으며, 중국의 부상과 함께 동아시아 시대가 열리면서 냉전시대 최전선의 ‘전장’이었던 동남아는 탈냉전 시대를 맞아 활력 넘치는 ‘시장’으로 떠오른 동시에, 세계 지도자들이 뜨거운 외교 담론을 뿜어내는 ‘광장’으로 탈바꿈한 것이다(박사명, ‘동아시아의 새로운 모색’).

매우 높은 전략적 가치

세계 물동량의 절반이 통과하는 말라카해협과 동북아의 생명줄과 미·일의 자유 항행을 제어하는 남중국해의 가치는 경제적으로만 환산할 수 없는 지정학적, 전략적 가치를 갖는다. 유럽 왕들과 상인들이 향신료, 환금작물, 천연자원을 확보하기 위해 대항해 시대를 연 15세기 이래, 동남아를 손아귀에 넣은 나라가 세계 패권을 장악했다.

포르투갈과 스페인, 네덜란드와 영국이 무력으로 동남아를 차지했다면 미국은 무력, 이념, 경제력을 순서대로 동원하며 동남아를 옥죄었다. 21세기에 새로운 도전자로 나선 중국은 경제력과 소프트파워를 내세우지만 성공 여부는 두고 볼 일이다.

아세안 11개국

다행히도 한국과 동남아, 한국과 아세안 간의 관계는 세계사에 유례가 없을 정도로 급속히 성장·발전하고 있다. 한중, 한일, 한미관계를 중시한 우리의 국제관계와 외교 전략 속에서 구석자리조차 차지하지 못했던 동남아가 최근 30년 사이 우리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 걸쳐 깊숙이 들어와 재빨리 자리 잡은 것이다.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동남아는 한국의 해외관광(1위), 무역(2위), 투자(2위), 건설(2위) 분야에서 주된 파트너다.

동남아의 3대 인구대국 인도네시아, 필리핀, 베트남에 체류하는 한국인 수는 외국인들 중에 단연 최고다. 한국에 들어와 있는 외국인 노동자, 신부, 유학생 중에 동남아인들은 1, 2위를 차지한다. 베트남의 지도자들은 한국을 ‘사돈국가’라고 부를 정도로 가깝게 느낀다. 동남아인들은 한류의 가장 열렬하고 충성스러운 팬들이기도 하다.

이렇듯 급속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그간 한·아세안관계가 경제적, 사회적 분야에 치우쳐 발전해온 것은 상당히 아쉬운 부분이다. 우리 국민들은 물론이고 지도자들조차도 동남아를 단순히 우리의 국익, 특히 경제적 이익을 실현하는 값싼 상품, 인력, 문화 시장으로 낮춰본 감이 없지 않다. 아세안과 동남아가 한국과 한국인의 생존과 미래에 직결된 값진 전략적 자산을 무한정 보유한 보고라는 점을 우리의 지도자들은 하루빨리 인식해야 할 것이다.

평등한 선린 관계 파트너

동남아와 아세안은 한반도에 세워진 국가들이 일찍 경험하지 못했던 평등한 선린 관계를 형성할 수 있는 진정한 파트너이다. 한국과 아세안은 과거 한민족이 중국, 북방지배족, 미국 등과 맺었던 군신 관계, 형제 관계, 후견적 동맹 관계와는 다른, 평등한 동반자 관계를 발전시킬 수 있다.

항상 불신과 두려움의 대상으로 간주했던 주변 강대국과 달리 국경을 접하거나 군사 강국이 아닌 동남아 국가를 경계할 이유가 없다. 중국과 일본이 각축해온 동아시아 지역의 권력구도 속에서 한·아세안 연대는 나름대로 세 다리 솥(삼정) 모양의 세력 균형을 도모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한국과 아세안 간의 협력(연대)이 우리에게 줄 수 있는 가장 값진 도움은 어쩌면 한반도의 통일과 남북한 적대관계 해소일지 모른다. 베트남, 인도네시아, 캄보디아를 포함한 대다수 아세안 회원국들은 전통적으로 북한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해왔으며, ARF는 북한이 참여하고 있는 유일한 다자주의 안보 채널이다.

아세안 국가들의 국기가 게양되어 있다.

만약에 남북한, 북·미 간 대화에 제3국이 중재해야 하는 상황이 온다면, 그 역할은 아세안이나 그 회원국이 맡을 가능성이 크다. 지금과 같은 무력 충돌의 위협이 어느 정도 가시고 대화나 화해를 위한 국면 전환을 꾀한다면, 그건 동남아에서 그리고 동남아 국가들을 통해서 가능할 것이다.

아세안은 1971년과 1995년 협약을 통해 ‘평화, 자유, 중립지대(ZOPFAN)’와 ‘동남아비핵지대(SEANWFZ)’를 이미 선언한 바 있어, 만에 하나 남북한이 아세안에 동시 가입이라도 할 수 있다면 한반도에서 핵전쟁의 위협은 일거에 사라질 것이라는 비약적 상상까지도 해본다.

대한민국 역사상 처음으로 동남아에 취임 특사를 보낸 문재인 정부에 더욱 적극적인 남방정책을 주문한다.

신윤환
서강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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