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은 지난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72주년 기념행사를 싱겁게 마쳤다. 하루 전 열리던 중앙보고대회도 없었고, 눈에 띌 만한 행사도 없는 약식 행사였다. 5년 또는 10년 단위로 꺾어지는 정주년은 아니지만, 2016년 5월 7차 당대회 이후 처음 개최하는 당 행사라는 점에서 관심을 모았었다. 아마도 북한은 당 창건 기념일 사흘 전에 개최한 노동당 중앙위원회 7기 2차 전원회의로 당 창건 행사를 갈음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의 노동당 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노동당 대회 휴회 기간 중 노동당의 최고 의사결정기구이다. 당의 노선과 방침을 토의·결정하고 조직과 인사 문제를 주로 다룬다. 노동당 규약은 전원회의를 1년에 1회 이상 개최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이번 회의를 7기 2차 전원회의라고 명명하는 것은 7차 당대회 이후 두 번째 열리는전원회의라는 의미다. 북한은 7기 1차 전원회의를 지난해 7차 당대회 개최 당일 개최한 바 있다. 북한이 당 규약이 정한 대로 전원회의를 정기적으로 개최할 것인지 여부는 김정은 시대 노동당 의사결정기구의 정상화 추세와 관련해 주목할 만한 대목이다.
| 경제 라인 정비와 경제 엘리트 약진
이번 7기 2차 전원회의는 ‘조성된 정세에 대처한 당면한 몇 가지 과업에 대하여’와 ‘조직 문제’를 의제로 다뤘다. 김정은이 보고에서 밝힌 정세 인식은 다음과 같다. 첫째, 김정은은 현재 조성된 정세의 핵심을 국제사회의 대북 제재에서 찾았다. 국제사회는 북한의 6차 핵실험을 계기로 북한에 대한 제재를 훨씬 강화하는 유엔 대북 제재 결의 2375호를 발동했다. 이 결의안은 그동안 금기시돼왔던 북한에 대한 유류 제공 제한과 북한의 주요 외화 수입원의 하나인 섬유 수출 금지 등 새로운 제재조치를 담고 있다. 당연히 기존 결의안에 포함된 제재조치를 확대·강화하고, 제재 대상 개인·단체를 추가 지정하는 내용들도 포함했다.
중국 정부의 대북 제재조치도 좀 더 본격화됐다. 중국 정부는 유엔 안보리 대북 제재 결의 이행 차원에서 대북 석유제품 수출 금지, 북한 기업에 대한 계좌 개설 중지, 북한 노동자의 비자 갱신 중단, 그리고 중국 내 합자기업과 독자기업 폐쇄 등 북한에 매우 큰 고통을 가할 수 있는 조치들을 취했다. 이 밖에 미국과 유럽연합(EU)의 독자 제재도 강화되고, 자국 주재 북한 외교관을 추방하는 등 북한과의 외교관계를 단절하는 나라들도 점차 늘어나기 시작했다. 이러한 상황은 김정은으로 하여금 비상전원회의를 개최해 점차 가중되는 제재 강도에 대비해 대내 결속을 다지고 대비책을 마련하도록 만들었다.
노동신문에 실린 10월 10일 노동당 창건 기념행사 모습들.
둘째, 김정은은 병진노선 채택과 추진의 정당성과 지속성을 역설했다. 김정은은 핵 무력 건설 성과에 힘입어 미국의 핵 위협으로부터 “자주권과 생존권과 발전권을 담보할 수 있게 되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오늘의 현실을 통하여 우리 당이 경제 건설과 핵 무력 건설의 병진로선을 틀어쥐고 주체의 사회주의 한길을 따라 힘차게 전진하여온 것이 천만 번 옳았으며 앞으로도 변함없이 이 길로 나아갈 것”을 독려했다.
그러나 엄밀히 말해 김정은은 2013년 3월 병진노선 제창 이후 경제 건설과 핵 무력 건설을 병진해왔다기보다는 핵 무력 건설 위주의 일방 노선을 추진해왔다. 그러다 보니 김정은은 이번 보고에서 “과학기술의 비약적 발전으로 인한 인민경제의 장성”과 “경제구조의 자립적 완비”를 강조했다. 특히 “미제와 그 추종세력들의 가중되는 제재 속에서”라는 사족을 빼놓지 않았다. 이와 같이 김정은은 과학기술과 자력갱생을 제재 상황 돌파의 ‘기본 열쇠’로 삼았다. 물론 이러한 인식의 이면에는 핵 무력 건설을 조속히 완성하고 경제 건설에 매진함으로써 자신의 장기집권 토대를 공고히 하고 싶은 김정은의 욕심이 담겨 있다.
셋째, 김정은은 제재 상황의 장기화에 대비해 인사 개편을 단행했다. 인사 개편은 제재에 대한 내구력을 확보하고 제재 국면을 돌파하면서 경제 건설을 계속 추구하는 데 방점을 두었다. 그러다 보니 경제 라인 정비와 경제 부문 엘리트들의 약진이 두드러졌다. 우선 경제 사령탑인 박봉주 내각총리의 당내 서열이 상승했다.
박봉주는 지난해 7차 당대회까지만 해도 정치국 상무위원 호명 순서에서 황병서 인민군 총정치국장보다 후순위였으나, 지난 10월 8일 개최한 김정일 총비서 추대 20주년 기념 경축대회에서는 황병서보다 앞서 호명되었다.
과거와 달리 내각 총리가 군의 2인자보다 서열이 앞선 것은 내각 중심의 경제 문제 해결에 대한 김정은의 관심을 반영하는 것이다. 그다음으로 태종수, 안정수, 박태성과 같은 경제부문 엘리트들을 노동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하고, 이주오 내각 부총리를 당 중앙위원에 선출했으며, 안정수 경공업부장을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승진시켰다. 특히 70, 80대 엘리트들이 대부분 퇴진하거나 2선으로 물러나는 상황에서 은퇴했던 81세의 태종수는 오히려 현직으로 복귀했다.
| 내년 ‘핵 무력 건설 완성’ 선언 목표
7기 2차 전원회의를 통해 미국과의 장기전에 대비한 대오와 전열을 정비한 김정은 정권의 대내외 정책을 전망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북한은 12월 개최 예정인 ‘만리마선구자대회’에 총력을 기울일 것으로 보인다. 지난 8월 13일부터 17일까지 개최한 ‘백두산위인칭송국제축전’을 사전에 대대적으로 홍보한 것과는 달리 약식으로 개최하고, 9월 9일 정권 창건 기념과 10월 10일 당 창건 기념 중앙보고대회도 생략했다.
제재 상황에서 행사비용을 절약하는 차원에서 만리마선구자대회에 집중하는 모양새지만, 이 대회를 정권 창건 70주년인 2018년을 새롭게 맞이하는 정치 행사로 활용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여기서 ‘새롭게’란 내년 정권 창건 70주년을 맞이해 핵 무력 건설 완성을 선포하고 경제 건설에 치중하기 위한 분위기를 새롭게 만든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분위기 조성을 위한 ‘개막행사’의 성격으로 만리마선구자대회를 활용하려는 것이다. 행사의 성격상 비용이나 주민 동원도 만만치 않을 것으로 보인다. 물론 이 행사의 핵심 구호는 ‘자력갱생’, ‘과학기술의 힘’, ‘자립 경제강국 건설’이 될 것이다.
둘째, 북한은 내년에 핵 무력 건설 완성을 선언함으로써 미국과 국제사회로부터 핵보유국으로 인정받고자 할 것이다. 북한은 미·러·중·영·프(P5)와 같은 핵무기국(Nuclear Weapon States)은 아니더라도, 인도·파키스탄과 같은 핵무장국(Nuclear Armed States) 인정을 목표로 삼을 수 있다.
북한의 박봉주 내각총리가 현장 지도를 하고 있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북한은 미국 본토에 도달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의 재진입 기술을 국제사회가 인정하도록 확증해야 한다. 이를 위해 북한은 몇 차례의 ICBM 시험발사를 추가적으로 실시해야 한다. 국제사회가 당장 대화를 통해 북핵 문제에 접근하기 어려운 구조적 원인이다.
그러나 북한의 입장은 다르다. 북한은 중국과 러시아를 내세워 그들이 제안한 ‘한반도 위기의 평화적 해결 로드맵’을 논의하기 위한 유관국 회담을 받아들일 수 있다. 북한이 국면을 전환하기 위해서든 핵무장국으로 인정을 받기 위해서든 어떤 식으로든 협상의 장이 개설돼야 하기 때문이다.
중국과 러시아는 나쁠 게 없다. 한반도 긴장을 완화하고 북핵 문제 해결의 단초를 마련할 수 있기 때문이다. 북한 입장에서 보면, 미국이 동의할 경우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유인할 수 있고, 미국이 거부할 경우 중국과 러시아로 하여금 미국과 각을 세우는 구도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밑져야 본전’인 게임이다. 최근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북미국장이 러시아를 방문해 러시아 외무부 관계자들과 회담을 가진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 전격적 남북대화 응할 가능성도
마지막으로, 북한은 선미후남(先美後南)식 접근 방식을 당분간 고수할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문재인 정부가 제의한 남북 군사당국자회담과 적십자회담 개최를 거부했다. 북한은 한미 연합 군사훈련 실시와 대북 제재 동참 등 외세 의존 태도를 남북대화 거부의 주된 이유로 내세웠다. 그러나 전례를 보면 이러한 이유들은 대화의 필요조건일 뿐 충분조건은 되지 못한다. 남한의 대북 제재 동참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며, 심지어 2015년 2월에는 한미 연합 군사훈련 기간에 이산가족 상봉 행사를 개최했다.
노동당 창건 기념행사를 알리는 노동신문 보도.
북한이 남북대화에 공을 들이지 않는 진짜 이유는 시기상조와 대미관계 우선 해결의 접근 방식에 기인하는 것으로 보인다.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북한은 핵 무력 완성 선언 시점까지 추가적인 전략 도발을 실행해야 하므로 이때까지 남북대화는 시기상조라는 인식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북한은 핵보유국 선언 이후 달라진 전략적 지위에 기초해 강대국을 상대로 한 외교정책을 추구하고 있다. 이러다 보니 남북관계는 강대국 관계의 후순위로 밀려났고, 대미관계가 풀리면 대남관계는 자연스럽게 해결될 것이라는 인식이 과거에 비해 더 심화된 것으로 보인다.
7기 2차 전원회의에서 이수용 노동당 국제부장에 이어 이용호 외무상을 이례적으로 정치국 위원에 임명한 것은 이러한 강대국 정치를 뒷받침하기 위한 인사 조치로 풀이할 수 있다. 그렇지만 북한이 전격적으로 남북대화에 응해올 가능성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북한은 남한을 대북 제재 연대의 약한 고리로 인식하고 있다. 따라서 제재 연대의 결속을 약화시키기 위한 의도를 갖고 남북대화에 전격적으로 호응할 가능성이 있다.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북한체제연구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