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역사 탐방

남한에서 갈 수 있는 최북단인 임진각에서 외국인 관광객이 북한을 촬영하고 있다.

경기 파주 분단의 상처 딛고
세계평화 출발지 되다

경기도 파주는 오랜 역사를 지닌 문향(文鄕)이자 분단의 아픔과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다. 곳곳에 자리한 분단의 흔적을 통해 통일한국의 미래를 되새겨보는 것도 뜻깊게 늦가을을 보내는 지혜가 아닐까.

이윤희 파주지역문화연구소장, 파주이야기가게 대표

한반도 최초의 인류가 태동했던 임진강을 품에 안은 땅. 고대국가 시기 영토 싸움의 현장이었으며 고려와 조선 천 년 동안 남북을 오가는 길목으로 찬란한 문화가 꽃을 피운 곳이 바로 경기도 파주다.

파주는 고려 때 해동의 명장인 윤관 장군을 비롯해 조선 초 청백리의 표상인 황희 정승, 조선 중기 대표적 학자로 기호유학의 거두인 율곡 이이와 우계 성혼 등 걸출한 학자와 정치가를 많이 배출한 곳이며, 이들의 유적이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는 문향(文鄕)이다.

그러나 파주는 1950년 발발한 6·25전쟁으로 떠안게 된 분단의 아픔과 상처가 고스란히 남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한강과 임진강변을 따라 임진각까지 시원하게 내달리는 자유로를 따라가다 보면 임진강을 경계로 북녘의 산하가 펼쳐진다. 맑은 날이면 개성의 송악산 자락이 손에 잡힐 듯하다.

통일을 염원하며 조성한 통일동산.

| 임진강 갈매기

자유로 당동나들목 인근에는 조선 세종 때 세워진 정자로 황희 선생께서 관직에서 물러나 여생을 보낸 반구정(伴鷗亭)이 임진강을 굽어보고 있다. 반구정은 황희 선생이 갈매기를 벗 삼아 여생을 보낸 정자로, 미수 허목 선생이 쓴 <반구정기>를 보면 “정자는 파주에서 서쪽으로 15리 지점에 있는 임진강 하류에 위치한다.

매일 조수(潮水)가 나가고 뭍이 드러나면 하얀 갈매기들이 날아드는데 주위가 너무도 펀펀하여 광야(曠野)도 백사장(白沙場)도 분간할 수 없고, 9월쯤 되면 철새들이 첫선을 보이기 시작한다. 서해의 입구까지 30리가량 된다”고, 당시의 아름다운 풍광을 묘사해놓았다. 그러나 지금은 반구정 아래로 강변을 따라 철책이 둘러쳐져 있어 임진강이 남북 분단의 상징이 되어버렸다.

황희 정승이 머물던 반구정.

반구정을 돌아 내려오면 황희 선생의 영정을 모시고 제향을 받드는 방촌영당이 있다. 조선 세조 1년(1455)에 건립된 방촌영당은 정면이 3칸, 옆면이 2칸인 초익공 양식의 맞배지붕 건물로, 영당 내부 중앙에 감실을 두고 그 안에 영정을 모셨다. 건물 주위로는 방형의 담장을 두르고 정면 입구에 출입문인 솟을삼문을 두었다. 매년 음력 2월 10일 선생의 탄신일에 제향을 받드는데 제향일에는 종중의 후손들과 지역의 유림 등 200여 명이 참석한다.

반구정을 나와 다시 자유로를 타고 5분 정도를 달리면 분단된 조국의 통일에 대한 염원이 집결되는 곳이며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는 곳, 임진각 관광지가 나온다.

임진각은 1972년 12월 남북 적십자회담 개최를 계기로 연면적 2448㎡(742평)에 지하 1층과 지상 3층으로 지어진 콘크리트 건물이다. 지금은 관광객들을 위해 건물 전체를 멋지게 리모델링했지만 과거 임진각은 차가운 모습의 3층짜리 콘크리트 건물이었다.

임진각 건물 앞에는 망배단이 설치돼 있다. 새해 첫날이면 전국에서 올라온 실향민들이 모여 간소하게 제례상을 차리는 것을 시작으로 연중 통일 기원 행사가 열리는 곳이기도 하다.

| 1000만 실향민의 애환의 장소, 임진각 관광지

임진각 관광지 내에는 많은 시설물들이 들어서 있다. 먼저 임진각에서 바라보이는 전면 망배단 뒤로 ‘자유의 다리’가 있다. 경의선이 지나는 철교였는데 6·25전쟁 때 파괴된 것을 휴전이 성립되고 남북 간 포로가 교환되자 그들을 통과시키기 위해 1953년 휴전 성립 직후 급히 만든 가교였다. 당시 이 다리를 거쳐 1만2773명의 포로가 남쪽으로 귀환했다. 자유를 찾아 넘어온 다리라 하여 ‘자유의 다리’로 명명됐다.

자유의 다리는 6경간(徑間)으로 이뤄진 목조 평교(平橋) 형식으로 길이 83m, 폭 4.5~7m, 높이 8m의 구조이며, 순수한 나무 구조는 아니고 인장력을 많이 받는 부분에 철재를 병용해 만든 혼합 구조이다. 자유의 다리는 임시로 가설한 교량으로 건축적으로 뛰어난 점은 없으나 상징적 의미를 담고 있다는 점에서 6·25전쟁의 대표적인 문화유산이라 할 수 있다.

자유의 다리 옆에는 6·25전쟁 때 폭격으로 옛 장단역 인근에 멈춰 서 있던 경의선 증기기관차 1량이 보존 처리 과정을 거쳐 전시돼 있다. 비록 멈춰 서 있지만 관광객들을 위해 기관차의 경적 음향을 설치해 마치 열차가 달리는 듯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최근 임진각 관광지는 연간 수백만 명의 국내외 관광객이 찾아오는 국내의 대표적 관광지로 탈바꿈했다.

제3땅굴 앞에 조성된 조형물

임진각에서 바라보이는 임진강 통일대교를 건너면 민통선과 비무장지대(DMZ) 구역이다. DMZ는 6·25전쟁 후 남북이 합의한 완충지대로 서로 무장을 할 수 없는 지역을 말한다. DMZ의 구역범위는 군사분계선으로부터 양쪽 2km 구간으로 현재의 남방한계선과 북방한계선 사이의 구역을 말하는데 이 구역은 6·25전쟁 이후 약 60년간 모든 것이 정지돼버린 곳이다. 시간과 공간이 정지돼버린 듯한 DMZ는 수많은 동식물이 살아 숨 쉬는, 세계에서 찾아보기 드문 생태계의 보고로 변모했다.

DMZ 구역을 코앞에 둔 도라산리에 경의선 최종 종착역인 도라산역이 있다. 2002년 2월 20일 부시 미국 대통령이 방문해 세계적으로 눈길을 끈 바 있다. 민통선 북방 남방한계선 철책 30m 지점에 자리 잡고 있는 경의선 남측 최북단 역으로 장차 개성, 평양, 신의주를 거쳐 대륙으로 연결되는 실크로드의 중추 역할을 하게 될 것이다.

도라산역을 뒤로 두고 솟아 있는 도라산 정상에는 도라산 전망대가 있다. 해발 167m의 비교적 낮은 고지이지만 주위 지역이 평탄해 사방을 내려다볼 수 있는 곳이다. 도라산 전망대에 오르면 전방으로 개성 송악산을 비롯해 개성 시내가 한눈에 조망된다. 또한 전망대 왼쪽 전방으로는 최근 문을 닫은 개성공단 건물들이 손에 잡힐 듯 가깝게 보인다.

| 분단으로 멈춰버린 시공간

도라산 전망대에서 동북쪽으로 약 1km 전방 DMZ 내에 제3땅굴이 있다. 6·25전쟁 이후 북한은 계속적인 무력 침략 정책으로 각종 도발을 일삼아왔다. 대표적인 북한의 무력 도발책 중 하나가 남침용 땅굴이다.

1978년 6월 10일에 발견된 제3땅굴은 폭 2m, 높이 2m, 총길이 1635m로 제2땅굴(철원 소재)과 거의 같은 규모이며 판문점 남방 4km 지점 비무장지대 안에서 발견됐다. 아치형으로 1시간에 3만여 명의 무장 병력을 이동시킬 수 있는 규모로 이전에 발견된 제1, 2땅굴보다 훨씬 위협적이다.

자유의 다리.

위치가 임진각에서 서북쪽으로 4km, 통일촌 민가에서 3.5km밖에 안 되는 곳으로 서울까지는 불과 44km 지점이다. 현재는 파주시에서 개발한 대표적 안보 관광지로 하루 1000여 명의 관광객이 찾고 있다.

제3땅굴에서 동북 방향 숲속으로는 판문점 건물이 보인다. 판문점은 남북 분단의 아픔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내주는 대립의 현장인 동시에 통일을 향한 화해와 대화의 창구이기도 하다. 한반도의 허리를 가로지른 남북분계선 위에 위치한 ‘공동경비구역(JSA)’인 이곳은 남북을 가로막은 휴전선 155마일의 장벽 중 유일하게 남북을 연결해주는 ‘열린 땅’이기도 하다.

선사시대로부터 고대국가 시기, 고려와 조선,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파주는 역사의 중심 무대였다. 남북을 잇는 중요 교통로이면서 수도 방비의 요충지인 만큼 치열한 전장(戰場)이기도 했다. 이로 말미암아 오늘날까지도 파주는 전쟁과 분단의 상처를 고스란히 안고 있다. 그러나 분단된 남북한의 경계를 흐르는 임진강이 한강을 만나 서해로 흐르듯이 통일의 그날 대동(大同)의 꿈을 품고 세계평화로 나아가는 출발지도 분명 파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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