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고지신(溫故知新), 즉 과거의 역사에서 새것과 미래를 터득하듯이 한반도 안보가 어느 때보다 위중한 이때 고려시대 서희(徐熙)의 외교 담판술을 회고하는 것은 시의적절하다고 본다. 오늘날의 북한 핵 위협은 1993년 3월 12일에 불거진 북한의 유엔 핵확산금지조약(NPT) 탈퇴와 1994년 판문점 남북회담장에서 북한 측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고 협박한 발언이 그 시발점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의 핵카드 위협을 해소하려는 노력은 지난 24년간 북·미 양자회담, 미·중·러 3자회담, 한반도를 둘러싼 남북한과 미·중·러·일 6자회담 등 다양한 외교 채널로 진행됐지만 우리의 외교력 부재와 주변국의 이해관계 갈등으로 성과는커녕 북한의 핵보유국 입지만 키워주었을 뿐이다. 반면에 작금의 대한민국은 북한 핵·미사일로 촉발된 한반도 위기 국면을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 주인 노릇을 하지 못함은 물론, 북한의 핵위협에 대응해 미국이 군사 옵션이라는 국지 전쟁 방안을 언급하고 있을 만큼 한반도 안보 위기가 극단에 처해 있는데도 속수무책이다.
| 국제 정세에 대한 통찰력
서희(942∼998)는 고려 전기의 문신이다. 960년(광종 11년) 3월에 갑과(甲科)로 과거에 급제한 뒤 983년(성종 2년) 군정의 책임을 맡은 병관어사(兵官御事)가 되고, 태보(太保)·내사령(內史令)의 최고위직에까지 이르렀다가 부친 서필(徐弼)의 뒤를 이어 재상 자리에 올랐다. 서희는 이처럼 정치적으로 중책을 맡아 활동했으며 외교적으로도 많은 업적을 남겼다. 대표적으로 972년에 십수년간 단절됐던 송나라와의 외교관계를 회복하기 위해 직접 사신으로 가 큰 성과를 거둔 바 있다.
그러나 역사상 많이 회자되고 있는 가장 큰 외교적 활약은 993년에 대군을 이끌고 온 거란의 1차 침략 시 장수 소손녕(蕭遜寧)과 담판해 이를 물리친 일이다. 그 배경을 살펴보면, 고려의 일방적인 북진정책과 친송 외교에 불안을 느낀 거란이 소손녕으로 하여금 고려를 침공하게 했다. 거란군은 고려 땅 봉산군을 격파한 뒤 “대조(大朝, 거란)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차지했는데 지금 너희가 강계(疆界)를 침탈하므로 이에 정벌하겠다”는 등의 위협을 했다.
당시 고려에서는 항복하자는 견해와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 우세했다. 그러나 서희는 홀로 이에 반대했다. “할지론은 당치 않소! 태조 대왕께서 나라 이름을 ‘고려’라 한 것은 우리가 고구려의 뒤를 잇는다는 뜻이오. 우리의 땅을 함부로 점령하고 있는 것은 거란인데, 그들의 주장을 받아들여 우리 땅을 내어줄 수는 없소!” 봉산군을 쳤을 뿐 적극적인 군사행동을 취하지 않고 위협만 되풀이하는 적장의 속셈을 간파한 서희는 할지론을 반대하고 싸울 것을 주장했다.
마침내 성종(成宗)도 서희의 결기 넘치는 의견에 찬성했다. 당시 소손녕도 안융진(安戎鎭)을 공격하다가 중랑장 대도수(大道秀)와 낭장 유방(庾方)에게 패해 고려의 대신과 면대하기를 청해왔으므로 여기에 응하게 되었다.
전쟁기념관에 전시된 소손녕과 외교 담판을 벌이는 서희의 모습을 그린 그림.
서희는 거란의 군영에 도착해 상견례를 할 때 소손녕으로부터 뜰에서 절할 것을 요구받자, “뜰에서의 배례란 신하가 임금에게 하는 것”이라며 단호히 거절하는 등 당당한 태도로 맞서 결국 서로 대등한 예를 행하고 대좌하게 되었다.
소손녕이 먼저 침입의 원인을 “그대 나라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의 땅은 우리가 소유했는데 당신들이 그 땅을 침식하였다”는 것과, “고려는 우리나라와 땅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건너 송나라를 섬기고 있기 때문에 이번의 공격이 있게 되었다”고 두 가지를 들었다. 서희는 침입의 근본적인 이유가 후자에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 있었다. 이에 “우리나라는 곧 고구려의 옛 터전을 이었으므로 고려라 이름하고 평양을 도읍으로 삼은 것이다.
만약, 지계(地界)로 논한다면 상국(上國, 거란)의 동경(東京, 지금의 선양)도 모두 우리 경내에 들어가니 어찌 침식이라 말할 수 있겠는가. 이뿐만 아니라 압록강 안팎도 역시 우리 경내인데 지금은 여진이 그곳을 장악하고 간사한 짓을 하므로 도로가 막히고 어려움이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심하다. 상호 통하지 못하게 된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에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땅을 되찾게 하여 성보(城堡)를 쌓고 도로가 통하게 되면 자유 왕래가 용이하지 않겠는가!”라고 반박하며 설득했다.
서희의 이와 같은 언사와 기개가 강건함을 보고 거란은 마침내 철병했고, 그 결과 고려가 994년부터 3년간 거란이 양해한 대로 압록강 동쪽의 여진족을 축출하고 장흥진, 귀화진, 곽주, 귀주, 흥화진 등에 강동 6주의 기초가 되는 성을 쌓고 생활권을 압록강까지 넓히는 데 크게 공헌했다. 이로 미뤄보아 국제 정세에 대한 그의 통찰력, 당당한 태도, 조리가 분명한 주장 등이 외교적 승리를 가져온 것이라 할 수 있다.
| ‘고구려=고려’ 인정
오늘날 서희의 외교 담판술을 재조명하는 것은 10세기 중·후반 고려가 거란과 송이라는 강대국 사이에서 자주와 실리에 근거한 외교 노선을 취해 나라의 안전을 지켰다는 점을 되새기고 그 교훈을 북핵 문제를 둘러싼 한반도 위기 타개책 모색에 원용함에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당시 거란과 송의 틈바구니 속에서 서희는 972년 송에 먼저 사신으로 가게 됐는데, 그때 송의 대거란관이 어떠했는지를 정확하게 확인하게 된다.
한편 993년 거란은 고려를 침략해 자신들만을 받들고, 자신들의 영역을 침식하지 말 것을 강요한다. 당시 고려 대신들은 땅을 떼어주거나 투항해 사태를 해결하고자 했는데, 이와 달리 거란의 침략 원인을 간파하고 있었던 서희는 민족의 운명을 짊어지고 적장 소손령을 만나게 되었던 것이다.
거란과의 외교 담판에서 서희는 고려가 거란의 왕조를 받들 수 있고, 또한 후방에서 위협이 되지 않겠다고 강조하고, 고려가 거란의 요구를 받을 수 있다고 했으니 거란 역시 고려의 요구를 수용해야 함은 당연하다고 설득했다. 주지하듯 그 요구는 첫째, 고려가 고구려의 정통을 계승했으며 둘째, 압록강 유역에 거주하고 있던 여진족들을 내쫓고 그 지역을 고려가 차지할 수 있도록 인정하라는 것이었다. 담판 이후 고려가 역사상 처음으로 국경선을 압록강으로까지 뻗칠 수 있었던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고구려=고려’라는 사실을 거란으로부터 인정받았다는 것이다.
서희가 획득한 강동 6주 위치.
오늘날 중국은 ‘동북공정’을 통해 고구려가 중국의 일부라고 주장하며 과거 거란도 인정했던 ‘고구려=고려’라는 역사적인 사실을 부정하고 있다. 서희는 외교 담판에서 “우리나라(고려)는 바로 고구려의 구지(舊地)이다. 그러므로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을 정한 것이다. 만약 경계를 가지고 말하면 거란의 동경도 우리의 경역 안에 있으니 어찌 침식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주장했는데, 이 사실을 통해 중국의 패권적인 동북공정의 ‘논리’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중국의 고구려 역사 왜곡으로 ‘역사 논쟁’이 벌어지고 있지만, 1000여 년 전 서희는 이미 우리에게 이에 대처하고 극복할 수 있는 중요한 교훈적 예시를 보여주었다. 서희의 외교 담판 기록에서 보듯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이며, 고구려 땅이 곧 우리 땅’임은 당시 거란도 인정한 역사적 사실임이 분명하며, 동시에 중국 동북공정의 허구성이 더욱더 확실하게 드러났다고 하겠다.
지금까지 알려진 서희의 안융진 협상은 협상 전개 과정이나 화법에 초점을 맞춰 분석된 내용이다. 기존 연구자들은 서희와 소손녕의 외교 담판에 초점을 맞춰 쇠도 녹인다는 서희의 ‘세치 혀’를 통해 말의 힘만을 강조한 경향이 있다고 본다. 그러나 서희의 외교 담판이 성공할 수 있었던 고려 왕조의 정치 환경과 서희의 화법을 새롭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 전쟁 피하고 강동 6주까지 획득한 지혜
당시 수십만의 거란 대군이 집결해 항복을 요구해오는 급박한 위기 상황에서 고려의 성종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그 문제를 의논하게 했고 거기서 다양한 의견이 속출했다.
서희의 현명한 계책은 바로 그런 회의 분위기에서 나왔으며, 그의 탁월한 협상 능력도 고려의 활발한 어전회의 전통에서 형성됐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좋은 의견에 곧바로 힘을 실어주었던 국왕 성종과, 자신의 제안을 실천하기 위해 목숨을 내걸고 적진에 들어갔던 서희의 책임의식과 애국심이 있었기에 고려는 대규모 전쟁을 피하고 강동 6주까지 획득하는 놀라운 외교적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최근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으로 한반도의 안보 위기가 점차 증대돼가고 있는 상황에서 주변국들은 자국의 이해타산에만 급급하고 있는 데 반해 우리 정부의 대응책에는 미래가 보이지 않고 국민들의 불안감이 고조돼가고 있는 실정이다. 1000년 전 서희의 외교 담판술 즉, 쇠도 녹인다는 서희의 ‘세치 혀’를 복제해 오늘날 불러올 수는 없지만, 고려시대의 정치 메커니즘 환경과 성종의 리더십, 그리고 적의 상황과 의도를 정확하게 간파한 서희의 지혜와 용맹은 오늘날 북핵 위협의 외교 해법으로서 남북관계 개선은 물론 미·중·일·러와의 협상에도 그대로 원용됐으면 한다.
특히 정치외교의 결집된 국력과 서희 외교 담판술로 한중관계의 걸림돌인 사드(THAAD, 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문제는 중·미 정상 간에 풀도록 하고, 북핵과 FTA 재협상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에서는 한·중·미가 최선의 공동 의지와 목표를 이끌어낸다면 실제 외교 현장에서도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을 것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