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역사 탐방

여수 선소가 있던 자리.

전남 여수 충무공의 애국·애민 숨결을 느끼다

강산은 참혹한 꼴 그냥 그대로 물고기와 새들도 슬피 우누나. 나라는 갈팡질팡 어지럽건만 바로잡아 세울 이 아무도 없네. -이순신 ‘난중일기’중에서

김명천 여수시문화원 사무국장

나라가 위기에 처할수록 더욱 간절해지는 게 이순신(1545~1598) 장군의 리더십이다. 북한의 핵과 미사일 도발, 사드 배치로 빚어진 중국과의 갈등, 미국의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재협상 요구,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둘러싼 일본과의 갈등 등 국내외적으로 난해한 이슈가 실타래처럼 얽혀 풀리지 않는 요즘의 상황이 이순신 장군의 리더십이 주목받는 이유다.

이순신 장군은 1591년 2월 좌수사로 전라좌수영 본영인 여수에 부임한 이후 전남 여수에서 오랫동안 거처했다. 특히 임진왜란이 발발하기 전까지 돌산과 소포(여수 종화동) 사이에 철쇄형을 설치하고 판옥선 위에 상판 덮개를 만들어 돌격선 거북선을 만들어 왜군의 침입에 대비했다.

또한 전라좌수영을 5관 5포로 편성(5관 : 순천도호부, 낙안군, 보성군, 광양현, 흥양현, 5포 : 방답진, 사도진, 여도진, 발포진, 녹도진)하고, 장수와 수군을 정신 무장과 훈련을 통해 강병으로 육성했다. 아울러 여러 장군, 장수들과 함께 뱃길과 물길, 적의 움직임, 전력 규모, 지형을 분석해 7년여 동안 옥포해전을 비롯한 수많은 해전에서 백전백승할 수 있었다.

이처럼 전라좌수영 본영과 삼도수군통제영이던 전남 여수는 발길 닿는 곳마다 이순신 장군의 흔적과 숨결이 가득하다. 여수는 이 지역 민초들의 땀과 노력으로 건축한 성(城), 선소(船所) 등 다양한 문화유산을 보존하고 있는데, 몇 가지 소개하고자 한다.

| 진남관과 충민사

건축은 삶 그 자체이며, 그것이 지닌 형태와 구조에 따라 조상들의 생활상을 가늠해볼 수있다. 국보 제304호로 지정된 진남관은 목조건물로서 시대와 문화를 동시에 반영한 우수한 건축물로 손꼽힌다.

여수시의 중심지에 큰 목조건물이 남쪽 바다를 내려다보고 있는데, 이 건물이 진남관이다. 임진왜란 당시 우리나라를 지켜낸 전라좌수영 성내에 있던 많은 건물 가운데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로 정유재란 때 화재로 소실됐던 것을 1664년 이도빈 절도사가 70칸 규모로 다시 건축한 대규모 객사(客舍)다.

객사는 성의 가장 중요한 위치에 관아와 나란히 세워지는 중심 건물로 중앙에 정청(正廳)을 두고 양옆으로 동헌(東軒)과 서헌(西軒)을 두게 된다. 그만큼 객사를 중요하게 여겼음이 잘 드러난다고 하겠다.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최초의 사당인 충민사.

남쪽의 왜구를 진압해 나라를 평안하게 한다는 의미에서 ‘진남관(鎭南館)’이라고 한 이 목조건물은 1716년 화재로 소실돼 1718년 이제면(李濟冕) 수사가 다시 신축했고, 이후에 크고 작은 수리를 했으나 1718년 중창된 건물이 오늘날의 진남관의 뼈대가 되었다.

조선 후기 전라좌수영 성내에는 600여 칸으로 구성된 78동(棟)의 건물이 있었다는 기록이 있지만 지금 유일하게 남아 있는 건물은 진남관으로 정면 15칸(54.5m), 측면 5칸(14m), 면적은 793㎡(240평)의 대형 건물로 합천 해인사에서 팔만대장경을 보관하는 장경판전과 함께 몇 안 되는 우리나라의 대표적 목조건물이다.

진남관은 지방 관아 건물 중에서 가장 규모가 크다. 1963년 1월 보물 제324호로 지정된 이후 2001년 4월 17일 국보 제304호로 승격됐다.

여수 덕충동 충민사(忠愍祠) 입구에는 높이 1.4m, 너비 42cm, 두께 10cm 크기의 작은 비가 하나 서 있는데 ‘하마비(下馬碑)’라 새겨져 있다. 하마비는 말 그대로 말(馬)에서 내려 걸어가야 한다는 의미다. 주로 궁궐이나 종묘, 문묘, 성현의 탄생지나 묘 앞에서 경의를 표하게 한 하마비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중요한 곳임을 나타낸 것이다.

충민사는 호남 순천부 수군 전라좌수영 동쪽의 마래산(385.2m) 아래에 위치하고 있다. 처음에 전라좌수영 본영의 오랜 교리(校吏) 박대복이 충무공 이순신 장군 밑에서 7년간 종사하다가 전쟁이 끝난 뒤에 충무공의 충절에 감격해 두어 칸 사당집을 세웠던 것이다.

여수 오동도에 있는 거북선과 이순신 장군의 명언 ‘약무호남시무국가(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 표시석.

그 후 선조 34년(1601년) 오성(鰲城) 부원군(府院君) 이항복이 왕명을 받아 임진왜란이 끝난 뒤의 민심을 살펴본 후 여러 장수들과 함께 사당을 세울 것을 의논했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시언이 왕명을 받아 사당을 세우는 일을 맡아 충민사가 건립되자 우부승지 김상용이 임금께 사우(祠宇)의 명칭을 지어달라고 해서 선조가 직접 명칭을 짓고, 그것을 현판(懸板)으로 받아 이순신 장군을 기리는 최초의 사당이 되었다.

여수 충민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위패를 봉안한 통영의 충열사(忠烈祠)보다 62년, 숙종 30년(1704년)에 세워진 아산의 현충사(顯忠祠)보다 103년 전에 건립됐다. 그 후 고종 5년(1868년) 충열사가 통영에 있다는 이유로 충민사와 현충사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의해 충민단만 남기고 모두 철거됐다.

고종 10년(1873년) 지역 유림들의 진정으로 건물을 다시 건립해 판서 윤용술이 쓴 충민사 현판을 걸었으나 1919년 일제에 의해 강제 철거됐고, 1947년 두 칸 집으로 명맥을 유지해오다가 지역주민들의 노력으로 다시 세워져 1993년 6월 1일 국가 사적 381호로 지정됐다.

충민사는 초등학생, 청소년 및 해군 간부, 공직자들이 단체로 관람하며 충무공의 충절을 기리고 있고, 여수시는 매년 공직자 청렴교육을 이 장소에서 행하고 있어 의미가 있다고 하겠다.

| ‘일석이조’ 효과 돌산둔전

여수 돌산도에는 둔전(屯田)이라는 지명이 있다. 이곳은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피난민과 전라좌수영 본영의 병사들이 농사를 지은 국둔전(國屯田)이 있던 곳이다. 마을에는 국둔전의 이름을 딴 둔전제(屯田提)가 있다. 마을의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592년(선조 25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경상도는 온통 왜군의 발아래 짓밟히게 되어 난을 피해 경상도 주민들이 전라좌수영 좌수사인 이순신 장군이 근무하는 본영을 찾는다.

영남 피난민들 가운데 본영 경내에 들어와 사는 사람들이 약 200가구 되었다. 모두 임시로 거처를 마련해 그해 겨울을 지냈으나 계속해서 그들을 구제할 길은 없고 비록 전란이 끝난 뒤에는 각자 고향으로 돌아갈지라도 당장에 굶주리게 된 형편인지라 그 대책을 세우느라 이순신 장군은 고심했다.

이순신 장군은 조정의 중신인 풍언부원군 류성룡과 그의 친구 분들에게까지 서신을 보내어 백성들의 딱한 사정을 알렸다. 이에 따라 비변사라는 관청에서는 농사를 지을 만한 땅이 있는 여러 섬으로 피난민들을 들여보내 살 수 있도록 하되 그 실정이 백성들에게 유리하도록 잘 판단해서 하라는 영(令)을 내렸다.

전라좌수영 진남관.

이때 이순신 장군은 피난민들이 거처할 곳으로 돌산도를 정해 1553년(선조 26년) 1월 26일 전라좌수영 본영의 경내에 거처하던 경상도 피난민 200가구를 좌수영 남쪽 지역의 목마장(牧馬場)이던 돌산도에 이주시켜 농사를 짓도록 허락해주기를 청하는 장계(狀啓)를 조정에 올렸다.

돌산도는 본영과 방답진(防踏鎭) 사이에 있어, 보통 백성들의 출입이 금지돼 있었기 때문에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은 피난민들을 돌산도에 이주시켜 농사를 짓게 함으로써 피난민들이 살아갈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한편으로는 군량을 확보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노렸던 것이다. 그 후 조정에서는 이순신 장군의 간곡한 청을 받아들여 이순신 장군의 계획대로 실행토록 했다.

| 거북선을 건조한 선소 유적

여수 선소(船所) 유적은 시전동에 있는 대표적인 역사 유적으로, 1995년 4월 20일 사적 제392호로 지정됐다. 고려시대부터 배를 건조하던 장소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 장군이 해전에서 승리하게 된 원동력인 거북선을 만들던 곳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거북선은 세 척으로 전라좌수영 선소(진남관 아래), 순천부 선소(시전동), 방답진 선소(돌산 군내리) 세 곳에서 건조했다.

이순신 장군의 초상.

전라좌수영 선소는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고, 순천부 선소는 복원을 해서 벅수(석인), 거북선을 매어두던 기둥인 계선주 등 다양한 유물들이 남아 있다. 방답진 선소는 적의 침입으로부터 전선(戰船)을 보호하거나, 비상시 즉시 출동시킬 수 있도록 인공적으로 깊게 판 굴강(掘江)이다.

<호남읍지>에는 전선 2척, 병선 2척, 협선 4척 및 군인들로서 군관 50명, 기패관 25명, 진무 45명, 군노 25명, 기수 50명, 사령 25명, 사생 50명, 화포장 22명, 포수 68명, 사공이병 18명, 승노군 302명 등 전선 8척과 수군 705명이 배치돼 있었다고 기록돼 있어 그 규모를 알 수 있다.

카카오톡 아이콘 페이스북 아이콘 트위터 아이콘 카카오스토리 아이콘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