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대륙이 무궁한 변화의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세계 경제의 주도권과 강대국 간 힘의 균형에 막대한 영향을 미치는 중요 지역이라는 사실에 이견을 제시하는 사람은 별로 없을 것이다. 중국의 BRI(Belt and Road Initiative·최근 중국 정부는 일대일로를 BRI로 공식 개명했다) 정책과 군사 영역에서의 영향력 확대는 앞으로 전개될 중앙아시아 차원에서의 유라시아 대륙의 강대국 다이내믹스(역학관계)를 예고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동안 우리는 학술 연구는 물론 정책 영역에서도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자락에 위치한 러시아 극동지역(RFE·Russian Far East)에서 전개되고 있는 러시아와 중국, 일본, 한국, 미국 간의 협력과 경쟁 양상을 중앙아시아에서의 강대국 간 거대게임과 연결해서 보는 시각이 부재했다. 지난 정부의 ‘유라시아 이니셔티브’ 정책에 대한 핵심적 비판 가운데 하나도 중앙아시아를 포함한 유라시아 영역을 포괄하는 물류와 에너지 협력을 의제로 제시하면서도 정작 실질적 추진 정책은 한·러, 남·북·러 간 극동지역 개발에 국한됐다는 점이었다.
‘유라시아’라는 지리적 개념에 대한 이러한 혼돈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유라시아 대륙 안에서의 물류와 에너지 이슈가 유럽~중앙아시아~러시아 극동지역으로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된다는 점을 간과했다. 유럽과 중앙아시아 쪽의 유라시아 물류·에너지 거대게임과 극동 쪽 유라시아 물류·에너지 거대게임의 본질과 차이점을 규명해 정책적으로 한국이 중앙아시아 쪽 유라시아에서 중·러와 협력할 부분과 극동 유라시아에서 중·러와 협력할 부분을 분명히 했어야 했는데 이에 대한 인식과 전략이 부족했다.
| 문재인 정부의 극동 개발 정책
문재인 정부는 ‘신(新)북방정책 구현’을 국정과제로 선정하고, 북방경제협력위원회를 설치했다. 또한 지난 9월 6, 7일 문재인 대통령이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열린 제3차 동방경제포럼에 참석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갖고, 한·러 간 협력 및 북한과의 경제적 연계 등 북방경제 협력 강화 방안을 논의했다. 이에 현재까지 드러난 문재인 정부의 신북방정책은 중국, 러시아, 중앙아시아, 몽골 등 북방국가들과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고 있는지, 앞으로의 과제는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문재인 대통령은 동방경제포럼 기조연설에서 한·러 간 ‘9개의 다리’를 놓는 것을 골자로 하는 신북방정책을 발표했다. ‘9개의 다리’는 가스, 철도, 항만, 전력, 북극항로, 조선, 일자리, 농업, 수산업 등의 분야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협력하는 것을 말한다. 특히 가스관과 전력망, 한반도종단철도(TKR)와 시베리아횡단철도(TSR)를 연결하는 철도망 구축을 강조하면서 이를 통해 동북아 국가 간 상호 의존도를 높이고 공동 번영을 추구하는 동북아 에너지 공동체의 가능성을 제시했다.
이러한 제안의 의미는 유라시아라는 무대에서 펼쳐지는 강대국의 거대게임이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변방인 러시아 극동지역으로 확대돼 중국, 러시아, 일본, 미국이 향후 극동 개발에 직간접적으로 에너지와 물류를 중심으로 협력과 경쟁을 벌일 것이기 때문에 한국으로서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것이라는 의지의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지난 6월 27일 서울 소공동 롯데호텔에서 제2차 유라시아 국회의장회의가 열렸다.
문 대통령이 “동북아 국가들이 협력해 극동 개발을 성공시키는 일은 북핵 문제를 해결하는 또 하나의 근원적 해법”이라고 강조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문 대통령은 또한 “그동안 극동 개발은 남·북·러 삼각협력을 중심으로 추진돼 남북 협력의 진도가 안 나가면 한·러 협력도 지체됐다”면서 “이제는 순서를 바꿔야 한다. 한·러 협력이 먼저이고 그 자체가 목표”라고 강조했다. 한·러 협력을 먼저 하고 이후 북한을 참여시키는 방향으로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의미이다.
최근 러시아 극동지역을 둘러싼 몇 가지 변화의 추세에 근거해 문재인 정부의 극동 개발 정책은 다음과 같은 몇 가지 핵심적 이슈를 중심으로 세밀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
10~20년 전과 비교했을 때 글로벌 에너지 상황이 많이 바뀐 것을 감안해야 한다. 국제 천연가스 거래 가운데 70%는 여전히 가스관(PNG)을 통해 거래되며, 30% 정도만이 액화천연가스(LNG) 형태로 거래되고 있다. 하지만 10년 전과 비교해 LNG의 비중이 크게 증가하고 있다.
2016년 2월 미국이 저유가체제하에서도 LNG 수출을 시작했으며, 주로 남미지역으로 수출하다가 2016년 말부터 아시아 지역으로도 수출하고 있다. 2017년 5월 미국 상무부는 중국에 LNG를 수출키로 했다고 발표한 바 있다. 국제 유가가 60달러대로 진입하면 본격적으로 LNG 수출이 확대될 것으로 보인다. 미국은 2018년부터 2020년 사이 아시아와 유럽으로 80bcm(billion cubic meter)의 LNG 수출을 예상하고 있다. 특히 한국과 중국에서 러시아 가스와 경합할 것으로 예상된다.
| 러시아 PNG 가스 對 러시아 LNG, 미국 LNG
문제는 러시아가 ‘PNG로 할 것이냐, LNG로 할 것이냐’인데 현재 푸틴은 가스 전략을 수정하고 있으며, 우선적으로 LNG를 확대하겠다는 전략이다. 지금은 정치적으로 PNG가 안 맞는 데다, 시베리아 이르쿠츠크 인근 코빅타와 극동 야쿠티야공화국의 차얀다 등 2개 대형 가스전에서 10년 후에나 가스 생산이 가능해 중·러 가스관 협력 사업이 연기되고 있다.
또한 저유가 탓에 길이만도 4000km에 이르는 이르쿠츠크~야쿠티야~하바롭스크~블라디보스토크를 연결하는 가스관 사업인 ‘시베리아의 힘(Power of Siberia)’ 가스관 라인1(동부라인)과 라인2(서부라인) 건설이 진전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2014년 5월에 체결된 동부라인 가스 공급은 2018년 수출을 시작해 2024년이면 최대 38bcm에 달할 것으로 예상했지만, 수출 개시 시점이 2024년으로 늦춰졌으며 최대 공급량인 38bcm도 2031년에나 달성될 것으로 수정됐다.
‘시베리아의 힘’ 가스관 노선도 변경됐다. 원래 계획은 코빅타와 차얀다 가스전에서 시작해 블라고베셴스크를 거쳐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로 이어질 계획이었으나 2015년 2월 러시아 에너지부 발표에 의하면 하바롭스크와 블라디보스토크는 제외된 것으로 알려졌다. 한국으로 올 가스 공급 계획 노선 자체가 없어지게 된 것이다.
그동안 극동 물류 협력의 초점은 나진·하산 개발을 통해 한국의 물류를 TKR~TSR로 유럽까지 운송하는 방안에 있었지만, 앞으로는 철도 물류 연결보다는 북극 해상 운송 물류 연결점으로서의 극동 항만 개발에 초점을 맞춰야 할 것이다. 중국은 최근 동북 지역의 Primorie-1과 Primorie-2 루트를 각각 러시아 자루비노항 및 블라디보스토크항과 연결할 계획을 발표한 바 있다. 북한의 나진항이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러시아 연해주 블라디보스토크항 전경.
러시아 LNG는 사할린과 북극 LNG가 옵션이 될 것이다. 북극 야말 LNG 프로젝트가 2017년 10월 첫 수출을 시작하게 된다. 주로 가스관으로 수출을 해온 러시아에 LNG는 다소 생소한 분야다. 지금까지 러시아의 LNG 수출은 2009년 이후 운영해온 사할린 남부의 960만 톤 규모 LNG 수출 프로젝트가 유일하다. 야말은 규모도 1650만 톤으로 대규모이며, 북극에서 생산된 LNG라는 점이 특별하다.
야말반도 건너편 기단반도에 플랜트를 조성할 예정인 ‘북극(Arctic) LNG-2’ 사업에 일본 지분 투자가 결정됐다. 장기적으로 한국도 사업 참여를 고려해볼 수 있을 것이다. 동북아 가스 트레이딩 허브 구축 차원에서 러시아 LNG까지를 포함하는 플랫폼 형태를 구상해볼 수 있으며, 추후 중·러·북한·한국 파이프라인 연계를 포함하는 PNG 협력을 추가해 동북아 전체 천연가스(파이프+LNG) 허브를 완성할 수 있을 것이다.
| 동북아 전력망 연계
중국, 몽골, 러시아 간에는 이미 양자 간 전력 거래 등 에너지 연계 협력이 이뤄지고 있다. 중국과 러시아는 2013년 러시아 전기를 연간 3만~5만GWh까지 중국에 수출할 수 있도록 하는 전력망 연계 사업에 합의했으며, 2016년 러시아는 중국에 중국 총 전력 소비의 0.05%에 해당하는 3320GWh를 수출했다. 몽골은 커다란 재생에너지 수출 잠재력을 보유하고 있음에도 중국과 러시아로부터 전기를 수입하고 있는데, 2012년 434GWh에서 2016년 1760GWh로 국가 전력 소비의 20%에 해당하는 수준까지 수입량을 늘렸다.
한편 중국 시진핑 주석은 2015년 9월 유엔 ‘지속가능발전 정상회의’에서 대담한 ‘글로벌 전력망 연결(GEI)’ 비전을 제시했다. 이 구상은 2050년까지 50조 달러를 투입해 북극의 바람과 적도의 태양자원까지 통합적으로 연계함으로써 일대일로(一帶一路) 전략에 이어 에너지 실크로드로 대변되는 글로벌 초연결망을 구축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한국, 중국, 일본, 러시아 4국의 전력회사들은 2016년 3월 ‘글로벌 에너지 연계 콘퍼런스’를 계기로 ‘동북아 전력계통 연계 공동연구와 협력을 위한 양해각서(MOU)’를 체결하고 상호 협력하기로 했다. 이 MOU에는 우리나라의 한전(KEPCO), 중국의 국가전력망(SGCC), 일본의 소프트뱅크, 러시아의 로세티가 참여·서명했으며, 동북아 슈퍼그리드 설치 타당성 조사에 합의했다. 특히 한국과 일본, 중국은 사업 구상을 구체화하기 위한 공동 연구에 착수하고 구체적 연구 추진을 위한 회의를 가졌다.
2016년 10월 러시아는 아시아 국가 간 전력 거래를 논의하기 위해 한국, 중국, 일본, 몽골, 카자흐스탄, 러시아 등이 참여하는 ‘아시아 에너지 고리 사업(Asian Energy Ring Project)’을 제안했다.
한양대 국제학부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