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재인 정부는 평화통일 외교를 추진하기에 매우 어려운 여건을 물려받았다. 사실 김대중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을 실현해 남북한 화해·협력 기조를 정립하고 남북 경협을 진흥했으며, 노무현 정부는 2차 북핵 위기가 발발하자 6자회담에서 핵을 동결시키고 불능화까지 90% 가까이 진척시켰으며 본격적인 남북 경협 방안도 남북 정상회담에서 합의해 넘겨주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는 ‘상생과 공영의 대북정책’을 지향한다면서 실제로는 ‘비핵·개방 3000’이라는 대북 강경 기조와 대미 일변도 외교를 펼쳤고, 박근혜 정부는 널뛰기 외교 끝에 위안부 합의, 개성공단 전면 중단과 사드 배치 결정으로 일본에는 수세에 몰리고 남북관계를 전면 중단했으며 한·중관계도 악화시켰다. 또한 두 보수 정부는 2008년 12월 이후 북핵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을 한 번도 개최하지 못하고 오히려 각각 두 차례의 핵 실험을 용인했다. 한국이 북한보다 40배의 경제력을 가진 상황에서 북한을 통제·관리하는 데 모두 실패했다.
문재인 정부는 우선적으로 한미동맹을 확고히 다지기 위해 한미 정상회담에서 정상 간 신뢰를 쌓고, 한반도 문제에서 한국의 주도권을 인정받았다. 트럼프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통일 환경 조성을 위한 한국의 주도적 역할과 남북대화에서의 한국의 자율성을 지지했고, 연합방위 주도에 필요한 한국의 핵심 국방력 강화를 인정했다.
| 위기에 처한 정부의 평화통일 외교·안보
이어 주요 20개국(G20) 정상회담이 개최된 독일에서 문 대통령은 먼저 ‘신한반도 평화비전’에 관한 베를린 구상을 발표했다. 남북 간 평화 공존과 상호 존중에 입각해 대화를 재개하고 인도주의적인 교류를 하며 군사적 긴장 완화를 추구할 뿐 아니라 남북 기본협정을 체결하고 한반도 신경제지도 구상에 따라 호혜적인 경협을 증진하자고 제안했다. 메르켈 독일 총리와 시진핑 중국 주석은 한국의 새로운 대북정책 기조를 지지했다. 아베 일본 총리와는 위안부 문제나 과거사 문제가 한일 간 미래지향적 협력을 방해하지 않도록 하며 셔틀 외교를 부활하자고 합의했다.
문 대통령은 9월 초 블라디보스토크에서 푸틴 러시아 대통령을 만나 북한의 참여 없이도 한·러 협력을 증진해 결국 북한을 다자협력체제 안으로 끌어들이고 북핵 문제도 해결한다는 신북방정책 구상에 대해 러시아의 전폭적인 지지를 얻었다. 박근혜 정부가 유라시아 이니셔티브를 제창하고도 북핵 문제와 북한의 불참을 이유로 한·러 경협을 방기한 것을 상기하면 전향적이고 진취적인 정책 구상을 내놓은 것이다. 제재, 압박과 별개로 대북 인도 지원을 추진하는 것도 장기 국가전략에 부합하는 정책이다.
한국이 세계 13위 정도의 경제 강국이 됐지만 주변 강대국들보다는 국력이 열세이므로 현상 변경을 의미하는 통일을 평화적으로 달성하려면 이들 강대국 중 어느 하나라도 반대하면 이를 달성하기 어렵기 때문에 문재인 정부는 일단 평화통일 외교의 기반은 잘 마련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문제는 한반도 평화통일의 조건으로 주변 강대국 모두가 한반도 비핵화를 내세우는데, 북핵 문제가 더 심각해지고 있다는 데 있다. 북한은 7월 4일과 28일 미 본토를 타격할 수 있는 대륙간탄도탄 수준의 미사일을 고각 발사했다. 이에 대해 유엔 안보리가 북한의 석탄, 철광석, 수산물 수출 금지를 포함한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고, 맥매스터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예방공격의 가능성을 언급하고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이 ‘화염과 분노’에 직면할 수 있다고 압박하자 북한은 미 해외 영토인 괌에 대해 포위사격을 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또한 8월 29일 일본 영토를 넘어 태평양으로 중거리 미사일을 발사하더니 9월 3일 수소폭탄에 준하는 6차 핵실험을 감행했다. 9월 12일 안보리가 섬유 수출까지 금지하는 제재 결의안을 채택하자 북한은 3일 뒤 또다시 일본 영토 너머로 중거리 미사일을 발사하고 향후 대륙간탄도탄 핵 실전능력을 갖출 때까지 핵 개발을 계속할 것임을 공언했다.
9월 7일 오전 사드(THAAD·고고도미사일방어체계) 1개 포대가 임시 배치에 들어갔다.
한국이 주도하는 평화통일 구상이 궤도에 오르기는커녕 자칫 북한의 도발이나 미국의 선제공격으로 한반도에 전쟁이 벌어질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려운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에 문재인 대통령은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한반도에서의 전쟁은 한국 정부만이 결정할 수 있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북한이 괌이나 미 본토를 향해 군사 공격을 감행하거나 공격한다고 미국이 오인할 경우 미국은 정당하고 필요한 선제공격이라고 주장하면서 북한을 공격할 수 있고, 이는 한국 정부도 막기 어려울 가능성이 있다.
또한 북한이 사실상 미 본토를 핵무기로 타격할 능력을 갖추면 미국은 심각한 안보 위협을 해소하고 더 큰 안보 위협인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핵 확산을 막기 위해 북한과 전격적으로 타협할 수 있다. 이 경우 북한의 핵 확산과 추가 생산 자제의 대가로 미국은 북한의 기존 핵을 묵인하고 한미동맹의 변화마저 받아들일 가능성을 배제하기 어렵다. 북한의 핵 개발로 이제 우리는 핵공격에 의한 재앙적 피해, 전면전 위험과 함께 북한의 통미봉남과 한미동맹 약화를 당할 수도 있는 위기에 처한 것이다.
이에 더해 북한의 핵 공격 억지에는 큰 기여를 하기 어려운 사드 배치가 진척되는 과정에서 중국의 각종 보복과 한중관계 악화가 행해지고 있어 대북 압박 국제 공조나 북핵 문제 해결, 그리고 한국의 평화통일 외교가 방해받고 있다.
| 평화통일 안보·외교의 과제
정부가 이 같은 안보·외교적 난관을 슬기롭게 극복하고 한반도 문제 해결의 주도권을 행사하려면 합리성에 입각해 국가 전략을 재정립하고 창의적인 사고와 능동적인 자세로 전방위 외교를 전개해야 한다.
먼저 한국 국민의 생존과 국가 안보가 걸려 있는 북한의 핵 공격에 대한 억지력이 미국의 확장 억지에 대한 구두 보장뿐이라는 점을 심각하게 재인식해 먼저 북한의 핵 공격에 대해서는 미국이 자동적이고 즉응적으로 핵 보복을 가해줄 것임을 약속하는 한미 핵안보조약을 체결해야 한다. 대북 핵 억지력 확보와 핵 협상 재개를 위해 1991년 철수한 미 전술핵의 조건부 재배치도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다. 북한이 이미 오래전 한반도 비핵화 선언을 파기했으므로 사정 변경의 원칙이 적용될 수 있고, 북한이 핵을 포기하면 사드와 함께 재철수할 것임을 약속하는 조건부로 재배치함으로써 중국과 러시아의 반발을 상당 수준 완화할 수 있다.
미국의 부담을 덜어주기 위해 전술핵 관리·운용 비용 일부를 분담할 수 있다는 용의를 보여줄 필요도 있다. 전술핵 재배치로 일본으로의 핵 도미노가 이뤄질 수 있다는 우려는 과도한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북한의 핵 능력 증대를 미국이 행동으로 억지하지 않을 때 일본의 핵 무장 가능성이 커진다. 1975년 구소련이 동독 등 동유럽에 650기의 SS-20 중거리 핵미사일을 배치하자 서독 사민당의 슈미트 총리가 미국의 퍼싱-II 중거리 핵미사일 108기를 배치해 안보 위협에서 벗어나 자신 있게 동방정책을 펼친 결과 평화통일을 달성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조건부 전술핵 재배치는 평화통일 외교의 기반이 될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추진을 공약한 ‘한반도 신경제지도’ 개념도.
이렇게 대북 핵 억지력을 확보한 뒤 정부는 자신감을 가지고 북핵 문제 해결을 주도하면서 평화통일 외교를 본격화해야 한다. 공포의 균형이 이뤄지면 북한은 갑자기 핵무기의 무력함을 느낄 수밖에 없을 것이다. 구소련이 핵무기 1만 기를 가지고도 공포의 균형 때문에 서방을 협박하지 못했고 체제 붕괴도 막지 못했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고 허탈감을 느낄 것이다. 북한은 그때서야 비로소 핵 포기 협상에 진지하게 나설 것이다.
이를 기회로 삼아 정부는 남북대화를 통해 관계를 정상화하고 미국에도 북한과의 대화를 적극 권유하는 동시에 상호 안보와 동시 행동 원칙에 입각한 북핵 포기 보상안을 주도적으로 만들고 미국과 중국의 동의를 얻어 북한에 제시함으로써 북핵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 결국 북핵 포기와 함께 한반도 평화체제가 동시에 구축되게 되는데, 전술핵 재철수와 사드 철수, 북·미관계 정상화, 대북 제재 철회 및 경제 지원, 그리고 한반도 평화에 대한 미·중의 보장, 동북아 평화협력체제 구축 논의 등이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 통일 비용 최소화도 고려
끝으로 통일은 반드시 평화적으로 이뤄져야 한다는 것이 가장 중요하지만 통일 비용의 최소화도 반드시 고려돼야 한다. 북한의 급격한 붕괴나 급변사태 발발을 통한 통일에는 천문학적인 통일 비용이 소요된다. 따라서 남북 평화 공존과 공동 번영의 기조 속에서 호혜적인 경협이 진흥돼 북한이 개혁·개방정책을 추진하는 와중에 평화적으로 통일이 달성되는 방향으로 대북정책을 추진해야 한다.
이 과정에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신경제지도 비전과 신북방정책 구상, 그리고 평화 공존과 공동 번영을 주창하는 동북아 평화협력체제 구상 등이 동시 병행적으로 가동돼 상호 시너지 효과를 발휘하도록 해야 한다. 창의적이고 진취적이며 자주적인 사고에 입각해 실용적이고 전방위적인 평화협력 외교를 펼치면 국가 안보 위기도 민족 중흥의 기회로 전환시킬 수 있다.
세종연구소
수석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