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년 2개월간 총 1만6000km를 달리기. 마라토너 강명구(62) 씨가 이 같은 도전에 나설 때 ‘과연?’ 하며 고개를 갸웃거린 사람이 적지 않았다. 하루도 빼지 않고 매일 마라톤 풀코스에 육박하는 40km를 뛰어야 달성할 수 있는 목표다. 게다가 쉬운 코스만 골라 뛰는 게 아니다.
유럽 대륙의 북쪽 끝인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시작해 독일, 헝가리, 세르비아, 불가리아, 터키, 이란, 우즈베키스탄, 중국 등을 이어 달린다. 산악지대도, 오지도, 혹한의 기후대도 있는 쉽지 않은 길. 자동차로 가는 것도 만만치 않을 유라시아 대륙 횡단을 시도한 것이다.
강명구 씨를 이처럼 험한 길에 뛰어들게 만든 것은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이다. 그는 이 기나긴 여정을 두 발로만 달려 판문점을 통해 귀국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그래서 프로젝트의 이름도 ‘평화마라톤’이다.
지난 9월 1일 유럽을 출발해 12월 19일 현재 107일째 달리며 터키 땅을 통과하고 있는 강명구 씨와 전화로 인터뷰를 했다.
“어려움요? 워낙 각오를 단단히 하고 준비한 덕에 견딜 만합니다. 처음 시작할 때는 언제, 어디까지 달릴 수 있을지 예상하지 못할 정도로 적은 경비를 손에 쥔 상태였는데, 시간이 지남에 따라 후원해주시는 분들이 늘어 오히려 갈수록 안정적으로 달릴 수 있게 되었죠.”
강명구 씨가 달리고 있는 유라시아 대륙 횡단 코스. 17개국 1만 6000㎞거리로 1년 4개월이 걸린다.
그랬다. 그는 지난 100여 일 동안 결코 ‘혼자’였던 적이 없다. 이 행사는 평화통일을 기원하는 수많은 이들의 후원과 협찬으로 이뤄졌다. ‘평화마라토너 강명구와 함께 달리는 유라시아 대륙 횡단 평화마라톤 조직위원회’에는 이창복 6·15 남측위원회 상임대표, 평화통일 시민연대 이장희 교수, 평화누리 김영애 대표, 고 장준하 선생의 장남인 평화협정행동연대 장호권 고문 등이 이끄는 3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참여하고 있다. 개인 후원회원도 계속 늘어나고 있어 12월 현재 500명에 이른다.
현지 응원도 뜨겁다. 교민들은 그를 초대해 간담회를 열고, 각종 지원을 아끼지 않는다. 불가리아에서는 온 가족 8명이 나서서 한 달 동안 차량으로 그와 동행하며 격려한 한인 가족도 있었다. 세계적으로 유례가 없는 그의 시도에 현지인들도 높은 관심을 보였다. 보스포러스TV, 불가리아 라디오 방송 등 현지 매스컴에서 그를 취재했다.
| 현지 매스컴과 민간인들 반응 뜨거워
그가 달리면 젊은 배낭족, 초등학생 어린이, 마을 주민 등이 궁금해하며 말을 걸었다. “당신은 왜 뛰는가?” 그는 대답했다. “한반도의 평화통일을 위해서”라고. 그의 취지에 공감한 마을 주민들이 즉석에서 술자리에 초대해 ‘러브샷’을 제안하며 한판 축제판이 벌어지기도 했다.
물론 애로도 적지 않았다. 험난한 지형과 혹한 때문에 애초 계획했던 코스를 변경하기도 했고, 길을 달리다 들개에게 물려 병원으로 향하기도 했다.
“가장 위험했던 것은 갓길 없는 도로를 달려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지나는 차는 많은데 이를 피해 달릴 만한 공간이 확보되지 않은 길을 ‘차가 알아서 피해주길 바라며’ 달려야 했죠. 그런 코스는 건너뛰고 차량으로 이동할 수도 있었겠지만, 이를 악물고 고집스레 전 구간을 달렸습니다.”
그가 평화와 통일을 위해 달리는 것은 ‘일회적 이벤트’가 결코 아니다. 1990년 미국 뉴욕으로 이민한 뒤 생업 전선에서 고군분투하던 그는 자신감을 찾기 위해 달리기에 취미를 붙였다. 2015년에는 미 대륙 횡단에도 성공했다. 대륙 횡단을 할 때는 유모차를 개조해 ‘혈한마’라는 이름을 붙인 수레에 짐을 싣고 다녔는데, 그때 혈한마의 머리에 통일 메시지를 붙일 생각이 떠올랐다.
“왜 통일이냐고요. 분단은 우리나라가 가진 가장 큰 지병입니다. 이 병이 치유되지 않는 한 우리는 환자이고, 이 병만 고치면 우리나라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가 해소될 수 있다는 게 제 신념입니다. 지구상 마지막 분단국인 한반도에 영구적인 평화가 정착되면 세계평화의 초석이 될 것이요, 한국이 평화의 성지 역할을 해줄 것입니다.”
마라톤으로 유라시아를 횡단하던 중 만난 터키 병사들과 함께 .
이런 신념을 갖고 2015년 7월 영구 귀국한 그는 지난해 3월, 사드로 갈등을 빚고 있던 경북 성주군 소성리부터 서울 광화문까지 270.5㎞를 뛰는 ‘평화마라톤 순례’에 참가했다. 이어 6월에는 제주 강정마을을 출발해 성주까지 달리고 다시 광주에서 서울까지 달리기도 했다. 통일을 이루되 평화가 원칙이어야 한다는 그의 신념을 이렇게 달리기로 표현했다. 명실상부한 ‘통일마라토너’로서의 행보였다.
그런 그의 진심이 북한에도 전달돼 이 긴 여정이 끝나는 올 10월, 중국 단둥에서 북한 땅의 문을 두드릴 때 과연 그 문이 열리게 될 것인가.
“그저 하루하루 달리기에 집중할 뿐입니다. 하지만 그동안 이렇게 함께해주시는 분들이 늘어가고 뜻이 모이고 있는 것을 보면, 처음에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습니다.”
그의 낙관, 그의 희망, 그리고 그가 길에서 얻고 있는 감동적인 만남의 이야기는 ‘유라시아에서 들려주는 사랑과 모험, 평화 이야기’라는 이름으로 그가 페이스북과 다음 카페 등에 올리고 있는 일지에서 계속 확인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