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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동경비구역(JSA). 남측 경비구역에서 헌병들이 북측을 바라보고 있다.

공동경비구역(JSA)의 모든 것 대립과 불신의 현장을
평화와 공존의 상징으로 만들자

지난 12월 13일 북한군 오창성 하사가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을 통해 목숨을 걸고 탈출함으로써 이곳이 전 국민적 관심 대상이 됐다. JSA가 언제 생겨 어떻게 운영되고, 남북 분단 현실에서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짚어보았다.

지난 12월 13일 오후, 북한군 병사 오창성 씨의 귀순은 한 편의 영화를 떠올리게 하는 인상 깊은 사건이었다. 그의 북한 탈출이 세간의 주목을 받은 이유 중 하나는 그 통로가 일반적인 군사분계선(MDL)이나 비무장지대(DMZ)가 아닌 ‘공동경비구역(JSA)’이라는 특수한 공간이었기 때문이다.

오창성 씨 귀순은 마치 1961년 8월 15일, 당시 건설 중이던 베를린 장벽을 넘어 서베를린으로 탈출한 동독 병사 한스 콘라트 슈만을 연상케 하기도 했다. 오 씨는 귀순 중 북한군 추격조의 사격으로 40여 발의 총격을 입었음에도 대수술을 견뎌내고 살아남았다.

오 씨 사건은 2000년 인기를 끌었던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 이후 또 한 번 우리에게 ‘공동경비구역’이라는 용어를 각인시킨 계기가 되기도 했다. 사실, 남북한 분단 현실을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데 이 공간만큼 적절한 곳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곳은 1953년 7월부터 한반도에서 유지되고 있는 ‘정전협정’의 축소판이기 때문이다.

| 비무장지대와 공동경비구역, 그리고 판문점

1953년 7월 27일 체결된 정전협정은 ‘적대 상태의 재발을 초래할 수 있는 사건을 방지’하기 위해 군사분계선 남북의 각 2km씩을 ‘비무장지대’로 설정했다. 이 지역은 원칙적으로 무장이 허용되지 않는 곳이며, ‘민사행정 및 구제’ 즉 통상적 감시·관리 및 비전투원 구호 활동만이 보장된다.

이 지역 내에 출입할 수 있는 인원의 총합은 1000명을 초과하지 못하며, 무장의 경우도 ‘군사정전위원회’가 허가하는 규정에 의해 통제되도록 돼 있다. 1953년 10월 19일 체결된 ‘군사정전위원회 부속합의서’는 비무장지대 내에서 허용된 무장의 범위를 ‘보총(步銃)과 권총(Rifle and Pistol)’으로 한정하고 있다.

정전협정상 공동경비구역은 비무장지대의 특수한 일부이다. 6·25전쟁 당시 정전협상이 이뤄진 곳이 판문점 지역이었던 점에서 연유해 정전협정 체결 이후에도 이곳은 특수한 지위를 부여받게 됐으며, 이 때문에 보통 판문점으로 불린다. 또한 정전협정을 감시하고 그 위반사항을 협의·처리하기 위한 기구로 군사정전위원회를 규정했는데, 이 군사정전위원회의 소재지를 판문점 지역으로 정했던 것이다.

이 지역은 관할권이 남북으로 확연하게 나눠진 다른 비무장지대와는 달리 유엔군 측과 공산권 측이 ‘공동’으로 경비한다는 취지에서 ‘공동경비구역’이라는 명칭이 부여됐다. 따라서 굳이 경계 표지판을 설치하지 않았으나, 1976년 ‘8·18 도끼 살해 사건’ 이후에는 이 지역에서도 충돌 사태의 재발 방지를 위해 군사분계선이 분명히 그어지게 됐다.

오늘날의 행정구역으로는 한국의 경기 파주시 진서면과 북한의 개성시 판문군 판문점리에 소재하는 공동경비구역에는 남북한 공히 다양한 시설이 자리 잡고 있다. 우선 한국 측(정확히는 한국과 유엔군 측) 시설로는 ‘자유의집’이 있다.

현재 대한적십자사의 상설 연락사무소와 기자실이 설치돼 있는 등 남북 접촉 및 회담 시 우리의 기반 지원시설이다. 오창성 씨가 최초 탈출 목표 지점으로 설정했던 곳이기도 하다. 자유의집에서 130m가량 떨어져 있는 ‘평화의집’은 우리가 남북 회담을 할 때 사용하는 건물이다. 북한 측 시설로는 우리의 자유의집 용도와 유사한 ‘판문각’이, 평화의집과 비슷한 기능을 하는 ‘통일각’이 설치돼 있다.

공동경비구역 서쪽에는 사천(砂川)이 남과 북을 가로지르며 흐른다. 이 하천 위에 놓인 다리가 ‘돌아오지 않는 다리(옛 이름은 널문다리)’다. 1953년의 정전협정 체결 이후 남북 양측의 포로 송환이 바로 이 다리를 통해 이뤄졌는데, 명칭 역시 이로부터 기원했다.

1968년 푸에블로호 선원들이 한국으로 송환된 장소이기도 하다. 돌아오지 않는 다리는 북한군 측이 공동경비구역으로 진입하는 통로로도 이용됐는데, 1976년의 도끼 살해 사건 이후에는 ‘72시간 다리(3일 만에 건설됐다고 해서 붙은 이름)’를 새로 건설함에 따라 지금은 사용되지 않고 있다.

2017년 12월 13일 북한군 병사가 JSA를 넘어 남한으로 탈출하는 모습과 공동경비구역 지형도.

2017년 12월 13일 북한군 병사가 JSA를 넘어 남한으로 탈출하는 모습과 공동경비구역 지형도.

| 분단의 산증인

공동경비구역은 이미 설명한 바와 같이 한반도 분단사의 축소판과 같은 지역이다. 1953년 이후 수많은 군사정전위원회 회의와 남북 회담이 이곳에서 열렸으며, 일촉즉발의 군사적 긴장감이 흐르는 현실과 대화를 통한 해빙(解氷)의 희망이 공존하는 곳이기도 하다.

이곳에서 활발하게 회의가 개최되던 군사정전위원회는 1990년대에 들어 북한 측이 군사정전위원회 유엔 측 수석대표에 한국군 장성이 임명된 것(1991년)을 계기로 일방적으로 대표단을 철수함으로써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북한은 이어 공산권 측 중립국감시위원회 멤버들마저 철수시켰으며, 1994년에는 판문점 지역을 자신들이 직접 관할한다는 명분하에 ‘조선인민군 판문점 대표부’를 설치했다. 군사정전위원회의 공전 이후에는 대령급의 비서장 회의만 개최되고 있으며, ‘판문점 장성급 회담’과 ‘남북 장성급 회담’이 정전체제를 관리할 기구로 한시 가동되기도 했지만, 현재는 정전협정을 관리할 최고위급 군사당국 회담은 사실상 존재하고 있지 않은 것이 현실이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를 중심으로 수많은 군사적 긴장이 조성됐으며, 북한에 의한 정전협정 위반 행위 역시 빈번하게 발생했다. 공동경비구역 역시 예외가 아니다. 1996년에는 북한이 공동경비구역 내에 무장병력을 초과 투입(통상 대대급이지만, 이 당시에는 기준보다 200~300명을 증강 배치)하고 중화기를 반입함으로써 긴장이 고조되기도 했다. 1998년 2월과 2007년 9월에도 북한 군인이 공동경비구역을 통해 탈북한 경우가 있으나, 오창성 씨처럼 군사분계선을 넘어 총격이 이뤄진 것은 처음이다.

공동경비구역 역시 비무장지대의 일부이므로 이 지역의 군사적 활동에는 분명한 제한이 있다. 무엇보다 상대방 비무장지대를 향한 총격 행위는 교전을 유발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금지되며 명백한 정전협정 위반이다. 이번에 오 씨를 추격하던 북한 병사가 군사분계선을 넘은 것 역시 위반사항에 해당한다.

다만, 이 지역 내에서 ‘자동화기’를 반입한 것이 정전협정 위반사항인지에 대해서는 엄밀한 법리 검토가 필요하다. 애초 군사정전위원회의 부속합의서에서 ‘보총(이 용어는 당시 정전협정에 참여했던 북한군의 한국어 번역본을 그대로 인용한 것이므로 우리 측 용어로는 소총에 해당한다)’과 권총으로만 무장토록 제한한 가장 큰 취지는 개인의 자위권 확보를 위한 개인화기 수준을 넘는 무기를 반입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이었다.

당시의 보병용 소총은 남북한 공히 반자동 사격만이 가능한 수준이었다. 그러나 현대의 개인화기는 반자동뿐만 아니라 자동 사격 기능을 갖춘 것이 일반적이다. 따라서 기관총이나 박격포와 같은 공용화기가 반입되고 사용되지 않은 이상 소총의 자동 사격이 있었다고 하더라도 이를 정전협정 위반으로 볼 수 있는지 없는지는 법리적 다툼의 소지가 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에게 북핵 해결을 강하게 압박하는 형국이다.

| 한반도 평화와 비무장지대

오히려 우리에게 더 큰 시사점을 주는 것은 ‘비무장’지대로 규정돼 있으면서 사실 어느 지역보다 엄중하게 ‘무장’돼 있는 비무장지대의 현실이다. 공동경비구역은 예외이지만, 북한군은 1950년대 후반 이래 비무장지대 내에 ‘민경초소’를 설치해 기관총 등 중화기를 반입했고, 한국군도 대응 초소(GP·Guard Post)를 설치해왔다. 현재 비무장지대 내에는 한국 측 100여 개, 북측 280여 개의 GP가 설치돼 있다.

또한 남북한 양측 모두 비무장지대가 끝나는 지역에 대대급 지휘초소인 GOP(General Out Post·전방관측소)를 설치·운영하고 있다. 북한의 경우 비무장지대가 군사분계선을 기준으로 정확히 2km 범위로 설정되지 않은 지역도 다수 존재할 뿐만 아니라(많은 경우 군사분계선에 더욱 근접해 있다), 비무장지대 내에 폐기된 전차를 이용한 고정포대 역시 설치해놓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동안 비무장지대를 얘기할 때 상징성 측면의 ‘비무장’과 ‘자연생태계 보존’ 등에 초점을 맞춰왔다. 그러나 비무장지대가 존재하는 가장 큰 출발점은 ‘불신’이었다. 즉, 쌍방 간에 군사분계선이 설정됐음에도 상대방이 언제든지 이를 어기고 침해할 수 있을 것이라는 인식, 따라서 기습적인 공격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일정한 완충지대가 필요하다는 계산이 비무장지대 설정의 출발점이 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비무장지대가 상징하는 남북한 간 심리적 불신은 물리적 공간인 2km를 훨씬 뛰어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동안 비무장지대의 평화적 활용과 관련해 다양한 접근이 시도됐음에도 현실적으로 추진된 방안이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불신구조를 간과한 데서 비롯된다. 그렇기에 한반도의 평화와 남북한 간의 화해·협력을 이루려면 무엇보다 먼저 상대방을 타도와 불신의 대상으로 보는 인식부터 바꿔야 할 것이다.

차두현 차두현
아산정책연구원
객원연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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