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군에 의해 줄타기 북방외교가 성공적으로 이뤄졌으나,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실각하자 조선은 눈먼 대외관계를 펼치다가 화를 자초했다는 게 병자호란에 대한 공식화된 정치외교 평론이다. 하지만 병자호란의 발발은 결코 단순화된 해석으로 평가할 일만은 아니다. 그 까닭은 특히 정치외교는 살아 있는 생물과 같이 천변만화(千變萬化)하기 때문이다.
광해군의 북방외교를 결과론적으로만 본 기존의 해석은, 오늘날의 역사가에게 오히려 오판의 빌미가 될 가능성이 높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 경술국치와 함께 조선시대 전체를 관통하는 거시적 역사관을 통해 조명할 필요가 있다.
조선 왕조는 창업기였던 태조, 정종, 태종, 세종 시기를 빼고는 병약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조선 왕조의 창업기는 문자 그대로 영웅시대였다. 당시의 조선은 감히 쉽게 넘볼 수 없는 약동하는 국력을 갖고 있었다. 단군 이래 가장 찬란한 역사를 창출한 때가 확실하다. 외침 걱정이 아니라 북방 경략으로 힘이 넘쳤다.
| 영웅시대를 망친 위정자들
태조, 정종, 태종, 세종의 영웅시대가 없었다면 조선은 일찍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말았을지 모른다. 평안도와 함경도가 없던 고려시대의 작은 강역은 상상하기도 끔찍하다. 찬란했던 세종대왕 시대가 없는 한국사는 가정하기도 겁이 난다. 우리는 광해군과 인조반정에 묶인 미시적 안목으로만 역사 해석을 하지 말아야 옳다. 영웅시대의 특징은 무엇인가.
첫째, 많은 인재를 폭넓게 받아들이며 사람을 열심히 키운 시기였다. 고려 말은 세칭 권문세족에 의해 부패한 시대였다. 몽골, 왜구, 홍건적이 벌떼같이 엄습해온 최악의 국난 시기였다. 권문세족들이 득세하며 나라가 허약해진 때라 외적이 많이 내습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조선 초기는 권문세족을 극복하고 다양한 인재를 포용해 막강한 힘을 갖게 되었으며 영웅시대로 역사 전환을 이룩했다.
둘째, 토지개혁을 통해 민간 경제력을 대폭 육성했다. 권문세족의 독점경제와 부패를 극복하고 민생경제를 육성한 것이 영웅시대를 만든 원동력이 되었다. 유리걸식하던 수많은 민초들에게 자력 성장의 토대를 만들어준 것이 주효했다.
셋째, 문예 부흥에 진력해 인재 육성의 토대를 탄탄히 쌓았다. 학문과 과학에 힘써 국가 경영의 질적 수준을 고양했다. 당시의 천문과학은 세계 최고 수준이었던 사마르칸트 천문대와 맞먹을 정도였고, 오늘날 고궁박물관에 남아 있는 천상열차분야지도나 여러 천문 기구는 당대 최고를 구가하고 있었다.
넷째, 국방력을 강화해 대외 팽창정책을 강력히 추진했다. 삼국시대 이후 유일하게 만주 고토 회복은 물론이고, 대마도를 정벌하며 남방정책을 편 빛나는 시대였다. 벌떼같이 달려들던 외적이 얼씬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다섯째, 특히 강력한 정치적 리더십이 정립돼 있었다. 태조는 물론이고 정종의 정치적 업적도 재음미돼야 한다. 태조와 정종이 토대를 놓은 업적이 있었기에 태종이 힘을 쓸 수 있었고, 세종의 르네상스가 가능했다. 정치는 결코 하루아침에 쉽게 리더십이 창출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광해군은 실패한 리더십으로 내치에 실패했다.
조선 초기의 영웅시대는 앞으로 좀 더 연구돼야 하며, 한국사의 내일에 주는 큰 교훈으로 삼아야 한다. 이 시기의 가장 큰 특장점은 국력을 키우고 모을 수 있어서 영웅시대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사람을 찾아 키우고 힘을 북돋아주며 하나로 뭉치게 하는 것이 리더십의 핵심이다. 영웅시대는 그것이 살아 있었다.
하지만 잘 지어놓은 밥상을 완전히 뒤집어엎은 패륜아 수양대군에 의해 모든 것을 망쳤다고 봐야 한다. 더구나 수양대군이 패륜정치를 일삼은 후유증으로 연산군이 등장하며 동서붕당이 나타났다. 영웅시대를 망친 것은 수양대군과 그의 손자였던 연산군이다. 수양대군과 연산군 이후의 조선시대는 사실상 되는 일이 없을 정도였다.
수양대군과 같은 몹쓸 패륜아가 세종대왕에게서 나와 권력을 휘두를 수 있었던 것은 리더십의 감각 상실일 수도 있다. 세종대왕이 태평성대를 구가하며 후계 리더십 창출에 실패한 탓이다. 이는 세종대왕의 최대 실책일 수 있다. 태종이라면 수양대군을 그대로 두었겠는가? 그러한 점은 세종이 태종에 못 미쳤다.
수양대군은 영웅시대의 정반대 리더십을 택했다. 사람을 찾아 키우지 않고 본인에게 찾아와 교언영색을 하는 엽관 인맥을 주로 택했다. 그리고 본인에게 과잉 충성하는 사람들만 등용하니 썩은 인재들이 모이고 유능한 인재가 사라지게 되었다. 특히 유용한 인재를 대거 죽음으로 내몰며 파당을 짓게 만들었다.
| 역부족이었던 ‘구국의 리더십’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자초한 원흉은 사실상 수양대군과 연산군이라 할 수 있다. 연산군 이후의 중종, 인종, 명종은 거의 권력 결핍 상태에 있었다. 4대 사화가 잇따르며 쓸 만한 인재가 모아질 수 없었다. 온갖 모략, 음해, 암투, 모함, 흑색선전이 이어졌고, 급기야 정여립 사건이 일어나 공식적으로만 1000명 이상이 죽음으로 내몰렸다. 인재를 너무 많이 잃었다.
4대 사화로부터 이어진 온갖 어둠의 정치싸움으로, 수많은 인재를 죽이고 초야로 내몰며 권력 공황이 온 때가 임진왜란의 시기였다고 보는 큰 눈이 절실하다. 의주까지 몽진한 선조가 명나라에 원병을 청했을 때, 그 요청이 거짓말인 줄 알았을 정도였다. 선조가 왜군과 짜고 하는 잔꾀라고 오해할 정도로 무인지경의 패주였다. 그런 상황에서 이순신 같은 위대한 인물이 나라를 구하고, 온 국민이 구국의 대오에 동참하며 왜적을 물리친 것이다.
선조의 뒤를 이어 광해군이 구국의 리더십을 구축하려고 했지만, 병든 나라를 수습하기에는 역부족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폐허의 나라를 물려받은 권력 빈곤 속에서 고군분투하는 가운데 북방외교를 하며, 여진족과 명나라 두 세력 사이에서 균형외교를 잘했다는 것이 기존의 공식적 해석이다. 그런데 인조반정으로 인조가 등극하며 외교를 잘못해 병자호란을 자초했다고 누구나 말한다.
하지만 광해군에게 잘못은 더 있었고, 더 큰 잘못은 일찍이 수양대군과 연산군이 망쳐놓은 탓이라는 새로운 해석도 필요하다. 광해군은 영웅시대의 조상들에 대한 연구를 확실히 하며, 좀 더 신중한 국정 운영을 했어야 했다. 그러나 자만하며 방심했고, 인조는 별안간 집권해 현실 감각이 없었으니 헛다리 외교를 자행했던 것이다.
서울 도봉구 방학동에 있는 연산군 묘.
수양대군과 같은 희대의 패륜아가 만든 정치적 허공에다, 연산군이 정치판을 초토화해 정여립 사건까지의 온갖 참화가 일어난 것이다. 그런 정치판에서 광해군이나 인조나 무슨 힘 있는 리더십이 가능했을 것인가? 결과론적으로 인조의 헛다리 외교를 탓하지만, 이는 중환자실에 들어간 상태에서의 사후 논쟁에 불과한 것이다. 튼튼한 내치가 없는데 무능 외교 논쟁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광해군이 구국의 군주였다면 역(易)수양대군 정책을 펴고, 영웅시대를 벤치마킹했어야 했다. 많은 사람에게 포용력을 발휘하고, 따뜻한 정책을 과감하게 전개했어야 했다. 경제력과 국방력을 키우면서 다시금 영웅시대가 오게 했어야만 했다. 인조반정과 같은 일이 당연히 일어날 것이란 가정 아래 파당정치를 붕괴시키는 일에 추호도 게을리하지 말았어야 했다.
그렇지만 광해군이 실패한 리더십을 보여주고 말았기에 얼떨결에 옹립된 인조는 국정 철학이나 경륜이 준비되지 못했던 것이다. 인조는 주체적 외교를 펼칠 의지가 없었으니 아무 얘기에나 휘둘리게 돼 있었다. 그것은 광해군이 그렇게 만든 것과 같다.
| 영웅 리더십 만들어야
인조반정 이후에 별안간 병자호란을 맞은 인조는 사실상 로봇에 불과했을 것이다. 로봇 임금님을 상대로 등거리 외교나 헛다리 외교를 탓하는 게 무슨 소용일까? 그간 너무나 짜맞춘 공식과 같이 광해군만을 칭찬하는 글에 익숙했던 고정관념을 훌훌 털어내야 하겠다. 우리에게는 좀 더 거시적인 역사인식이 요망된다.
오히려 광해군이 잘못했다. 크게 보면 수양대군과 연산군이 모든 판을 다 깼는데, 인조에게만 돌팔매질을 하는 것은 너무 편향적인 듯하다. 조선시대 역사를 전체적으로 조망해볼 때 수양대군 이후에 벌써 경술국치 같은 국난이 잉태되고 있었다.
조선은 개국 초기에는 영웅의 시대였으나 수양대군 이후는 역사적 정당성을 잃어버렸다. 만약 조선 왕실이 부활된다면 아마도 정종 임금 계열이 왕위를 계승하는 것이 가장 타당할지 모른다. 세종대왕 붕어 후에 조선시대는 너무나 정당성을 상실했기 때문이다.
지도자는 모름지기 조선 초기 영웅시대 연구에 진력해야 하겠다. 널리 사람을 모아 따뜻한 포용정책을 펴며, 토지개혁으로 온 나라에 경제혁명을 이루고, 과학과 학문을 진작하며, 국방이 튼튼했던 영웅 리더십을 발휘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광해군의 균형외교에 대한 평가가 나와야 올바른 평가가 가능할 것이다. 병자호란은 인조 이전에 광해군에서 이미 비롯됐다. 결과론만을 생각하지 말고, 정치적 실패로 붕괴된 광해군의 겉면만 본 고정관념이 매우 부당함을 유의해야겠다.
서울교대 명예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