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탈북자의 세계
‘먼저 온 통일미래’와 하나 되려면,
중국 내 탈북자 인권부터 보호해야
북한을 떠나온 탈북 여성들은 인신매매의 대상이 된다. 이들을 구렁텅이에 빠지지 않게 보호하며 안전하게 한국으로 보내온 것이 개신교 선교사들이었다. 북한은 이들을 눈엣가시로 여기고 있다
지금도 우상으로 떠받드는 북한의 최고지도자 김일성의 사망과 자연재해로 야기된 1994년의 기근은 북한 주민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1995년 ‘고난의 행군’이 시작되자 북한 주민들은 고통스러운 굶주림을 피하기 위한 노력에 나섰다. 그들이 찾은 길은 두만강과 압록강 건너에 있는 중국 땅이었다.
두만강에서 중국은 코앞의 나라이다. 그 강에서 북한과 중국의 아이들이 겨울에 함께 썰매를 탔다. 북한의 경제가 넉넉했던 시기 북한인들은 생존을 위해 탈북하지 않았다. 단순 호기심에 의한 월경(越境)과 비자를 받아 관광, 공무, 사업 등 합법적인 목적으로 중국을 찾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런데 1995년을 전후한 고난의 행군 시기부터는 달라졌다.
북한 주민들은 말이 통하는 재중동포(조선족)를 통해 일자리를 얻어 식량 문제를 해결하고자 중국으로 넘어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30m에 불과한 두만강 건너에서 만난 ‘실제의 중국’은 북한에서 생각했던 중국과 달랐다.
반복해서 인신매매를 당하는 탈북 여성들
일자리를 미끼로 한 덫이 곳곳에 즐비했기 때문이다. 탈북한 여성들이 주로 그 대상이 되었다. 북한에는 ‘중국에 가면 일자리를 구하고 먹을거리를 해결할 수 있다’는 이야기를 해주고 다니는 브로커들이 있었다. 그 말을 믿고 몰래 도강해 중국으로 들어가면, 대기하고 있던 미니 승합차가 그들을 태워 어디론가 달려갔다. 이 일은 거의 대부분 밤에 이뤄지니 탈북자들은 어느 곳으로 가는지 알 수가 없다.
머지않아 이들은 재중동포와 한족의 노총각에게 팔려갔다는 것을 알게 된다. 장애인 노총각에게 강제 결혼을 당하는 경우도 허다했다. 소위 인신매매를 당한 것이었다. 원치 않은 임신과 출산을 하며 그들은 일자리가 아닌 지옥을 경험하게 된다. 다행인 것은 배고픔은 해결됐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법 월경자와 무국적자 처지라 억울해도 호소할 데가 없었다. 늘 중국 공안에 신고하겠다는 협박을 받으니 중국 측 가족의 노예로 지낼 수밖에 없었다.
탈북 여성이 중국에서 겪어야 하는 고통은 북한에서 그의 가족이 해체됨으로써 겪는 고통보다 훨씬 심각하다. 더러 처녀인 경우 중국 남자와 결혼하고 정이 들어 행복하게 사는 경우가 있으나, 극히 드물다.
한 탈북 여성이 중국의 어느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는 가정에 들어갔다. 결혼식이라는 것도 없이 팔려간 날부터 모르는 남자의 여자가 된 것이다. 얼마 후 임신을 하고 출산하고, 노예와 같은 삶을 시작했다. 이런 삶을 두세 번 반복하는 여성도 있다. 인신매매의 악순환이 꼬리를 문 경우이다.
중국 가족들은 ‘시키는 일을 하지 않으면 공안에 신고해 북한으로 쫓아보낸다’고 위협한다. 탈북자라면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지 잘 안다. 중국으로 올 때는 다시 북한에 돌아갈 줄 알았는데, 와서 보니 다시 북한으로 돌아간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곧 깨닫기 때문이다.
북한으로 돌아간 이들이 북한 보위부에 체포돼 고문과 투옥 등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으면 차라리 중국에서 노예 생활을 하는 게 낫다고 여기게 된다. 그리고 대한민국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로에 서게 된다. 같은 민족이 있는 남한으로 가자는 결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북한에서 중국으로의 탈북을 안내하는 브로커가 있듯이 중국에도 한국행을 안내하는 브로커가 있다. 그런데 인신매매를 당한 경험이 있으니 대한민국으로 가려 할 때는 브로커를 신중하게 접촉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꾼에 걸려 다시 팔려 가는 경우가 허다하다.
대한민국에 가려면 경험이 많고 믿을 수 있는 브로커를 만나야 한다. 탈북자들이 종종 ‘선(Line)’이라는 말을 하는데, 선은 남한으로 가게 해주는 안전한 브로커를 의미한다.
안전한 브로커를 찾을 때 부딪히는 문제는 돈이다. 돈을 많이 쓰면 상대적으로 안전한 브로커를 만날 수 있다. 탈북자들은 무리해서라도 돈을 마련하든지 아니면 한국에 입국해서 받게 되는 정착지원금을 후불로 주기로 약속한다. 3만여 명의 탈북민 가운데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고 입국한 이는 거의 없을 것으로 본다. 인신매매로 겪은 노예 같은 삶에 이어 한국으로 가기 위해 고가의 비용을 준비하는 것이 중국에서 시작되는 또 다른 탈북의 여정이다.
최근에는 탈북이 생계형에서 성취욕구형으로 변화했음을 보게 된다. 북한에서 중국을 경유해 바로 한국으로 오는 ‘직행’이 늘어난 것이다. 이들은 대개 한국에 먼저 온 가족이 있는 탈북민들이다. 한국에 와 있는 가족 덕분에 인신매매를 당하지 않고 바로 한국으로 오는 이들이 있다.
김정은 시대 탈북자가 줄어든 이유
탈북자에 대한 김정일과 김정은 정권의 조치에는 차이가 있다. 김정일 시기에는 단속은 해도 ‘조국을 배신한 자들은 버려라’ 하는 경향이 있었다. 반면 김정은 정권은 아예 국경을 넘지 못하게 삼엄한 경비를 펴는데, 이는 체제 결속을 위한 조치로 보인다. 이 때문에 두만강과 압록강을 건너는 탈북 비용이 천정부지로 오르게 되었다.
김정일 시대 중국을 통해 남한에 도착하는 데 한화로 300만 원 정도가 들었다. 지금은 탈북하는 데만 700만 원, 아이를 대동하면 1000만 원 이상에 이른다. 그리고 중국에서 한국으로 오는 데 150만~300만 원 정도가 더 들어간다. 김정은 시대의 삼엄해진 경비가 브로커들의 생명수당을 올린 탓이다. 그래서 김정은 등장 후 한국으로 들어오는 탈북자의 수는 그 전보다 50% 가까이 줄었다.
김정은 정권은 중국에 있는 탈북자 색출에도 열을 올리고 있다. 공포심을 조장해 더 이상의 탈북을 막으려는 조치일 것이다. 이를 위해 북한 보위부 요원이나 협조자를 탈북자로 위장시켜 중국으로 내보낸다. 이들은 직접 탈북자를 색출하거나, 다른 탈북자를 포섭해 또 다른 탈북자를 추적하기도 한다.
협조자를 포섭할 때 쓰는 가장 일반적인 방법이 북한에 있는 가족에 대한 위협이다. 이 메시지를 던지면 대부분의 탈북자는 다른 탈북자의 은신처를 불게 된다. 그러나 그 또한 잡혀가는 신세로 전락한다. 보위부는 중국 공안과 연결돼 있기 때문이다.
탈북 브로커의 존재는 더 이상 흥미롭지 않다. 돈을 버는 직업으로 자리를 잡았다. 한국에 온 탈북민 가운데도 브로커를 직업으로 하는 이가 더러 있다. 이 가운데는 소명감을 갖고 이 일을 하는 사람도 있다. 돈을 거의 받지 않고 탈북자를 돕는 이들이 있는데, 이들은 주로 종교인들이다. 특히 개신교 교회의 활동이 활발하다.
얼마 전 순교한 장백교회의 고 한충렬 목사와 교회가 대표적이다. 장백교회는 북한에서 눈으로 보일 만큼 북한 가까이 위치하고 있다. 이 때문에 브로커를 통하지 않은 적잖은 탈북자들이 이 교회에 들러 도움을 받았다. 교회에서는 식량과 옷가지를 챙겨주며 건강 상태를 점검해주고, 성경 공부와 상담을 통해 정서적인 안정도 도모해주었다. 필요한 경우 한국행도 주선한다.
북한인권법 바로 개정해야
이러한 일을 하는 교회들은 북한의 지하교회를 돕는 일도 한다. 북한에서는 이런 교회를 최대 걸림돌로 판단할 것이다. 한 목사의 순교는 그런 바탕 위에서 일어났다. 탈북자들에게는 매우 안타까운 사건이었고, 한국 교계에도 충격이었다.
중국에서 탈북자를 돕는 이들 개신교인들은 대부분이 재중동포, 한족 그리고 한국이나 미국 등 제3국 출신이다. 탈북자들은 이러한 ‘선’을 만나면 가장 좋아한다.
국정원이나 하나원에서 만난 탈북자들은 선교사나 개신교회를 통해 한국에 온 경우를 매우 부러워한다고 한다. 경비도 거의 들지 않고, 성경 공부와 상담을 통해 한국 사회에 대해 적지 않은 정보를 받고 올 수 있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도 이들은 교회와 건전한 한국인을 만날 수 있으니 심리적인 안정을 찾고, 취업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받는다.
지난 3월 북한인권법이 재적 236명 중 찬성 212명, 기권 24명으로 국회를 통과했다. 그런데 이 법안에는 중국 내 탈북자들에 대한 인권 조항이 빠졌다. 북한인권법 통과를 주장해온 시민단체의 법안에는 이 항목이 존재했는데 여야 합의 과정에서 빠져버렸다. 시민단체들은 20대 국회에 중국 내 탈북자들의 인권 문제가 포함된 개정안을 발의해줄 것을 요청하려고 한다.
이 법이 북한 주민의 인권을 당장에 바꾸지는 못한다. 그러나 북한 정권의 북한 주민에 대한 인권 탄압, 탈북자 인권유린에 대한 범죄 자료를 지금부터 수집할 수 있게 했기에, 통일 후 발생할 수 있는 북한 정권에 대한 북한 주민의 분노를 법으로 통제할 수 있게 된다. 그러나 중국 내 탈북자들의 인권유린에 대해 아무런 조항이 없다는 것은 문제이다.
중국에서 인권유린을 당하는 탈북자를 재외국민으로 보고 보호해줄 수 있어야 한다. 헌법상 우리 영토는 한반도 전역과 부속도서이므로 북한에서 나온 이도 우리 국민이다. 그러한 논리로 북한인권법에 중국 내 탈북자 보호가 명시된다면 탈북자들은 중국에서부터 보호를 받을 수 있고 대한민국에 좀 더 수월하게 정착할 수 있을 것이다.
탈북자는 ‘먼저 온 통일 미래’이다. 이들이 한국으로 들어오면서 우리는 실질적인 통일의 삶을 시작하게 되었다. 한국 사회가 탈북민을 포용하는 역량을 높이는 교육과 캠페인을 벌인다면 통일은 어려운 과제가 되지 않는다. 이 과업이 한국에 온 탈북민들로부터 시작되니 우리는 인권유린을 당하고 있는 중국 내 우리 탈북 동포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김영식 남서울은혜교회 통일선교 지도담당
경남대 북한학 석사. 북한사역목회자협의회 사무총장 역임. 현재 한국대학생선교회(CCC) 통일연구소 객원연구원, 쥬빌리통일구국기도회 감사, 북한사역목회자협의회 부회장, FOTA Missions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