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의 ‘전투’는 무엇인가
앞으론 달리고 뒤로는 새는 속도전
북한은 ‘브레이크 없는 고물차’인가?
노동당 7차 대회를 앞두고 펼친 70일 전투의 중요 성과물인 백두산영웅청년 3호 발전소에서 부실공사를 했는지 누수가 일어난다. 그런데도 새로운 조선속도를 강조해온 김정은은 만리마속도전을 외치고 있다.
| 지성림 연합뉴스TV 정치부 기자 |
북한의 사회과학출판사가 2007년 펴낸 <조선말대사전>은 ‘전투’라는 용어를 다음과 같이 두 가지로 정의했다. 첫째, 적과 직접 맞서서 하는 싸움, 곧 적아 쌍방의 연합부대, 부대, 구분대 또는 개별적 전투인원들에 의하여 벌어지는 조직적인 무장 충돌. 둘째, ‘혁명과업을 수행하기 위하여 혁명적으로 벌이는 활동’을 이르는 말.
북한이 노동당 7차 대회를 앞두고 벌인 ‘70일 전투’의 ‘전투’는 바로 두 번째 정의를 의미하는 것이다. 북한은 정치적 또는 경제적 목적 달성을 위해 주민과 군인 등을 동원하는 모든 행위를 ‘혁명’이나 ‘전투’라는 말로 포장한다.
북한은 36년 만에 열린 당대회를 앞두고 경제 분야 등에서 가시적 성과를 보여주기 위해 지난 2월 말부터 ‘70일 전투’라는 것을 벌였다. 2월 23일 평양에서는 당 중앙위 정치국 위원·후보위원, 도당 책임비서, 도 인민위원회 위원장을 비롯한 당·정·군의 고위간부들이 참석한 가운데 전체 노동당원에게 보내는 당 중앙위원회 편지를 전달하는 회의가 열렸다.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전달한 편지에서 노동당은 7차 당대회를 앞두고 ‘70일 전투’를 벌이자고 호소했으며, 누구보다도 노동당원들이 70일 전투의 앞장에 서자고 독려했다. 한마디로 전 주민 총동원령을 내린 것이다.
70일 전투는 속도전 운동의 한 형태로 일정한 기간에 생산 목표를 초과 달성하거나 정해진 과제를 예정 기간보다 앞당겨 끝내는 방식으로 진행됐다. 이 같은 사실은 북한 매체의 보도에서도 잘 나타났다. 70일 전투 막바지인 4월 30일 북한 조선중앙통신은 “4월 20일 현재 전국적으로 1640여 개 생산 단위들이 70일 전투 목표를 돌파했다”고 밝혔다. 특히 통신은 “560여 개 단위가 상반년 인민경제계획을, 70여 개 단위가 연간 인민경제계획을 완수했다”고 강조했다.
즉 70여 곳의 생산 현장에서는 70일 전투 기간을 포함한 4개월 만에 1년분 생산 목표를 달성했다는 얘기다. 이 보도가 사실이라면 해당 생산 현장에서는 70일 전투 기간의 하루 평균 생산량을 평소보다 최소 3배 이상 증가시킨 것이 된다. 단위 시간당 생산능률이 3배 정도 향상됐다면 근로시간을 줄여도 되겠지만 그렇지 않다면 근로시간을 늘려야 한다. 근로자들은 평일에는 밤늦게까지 연장노동을 해야 하고, 주말에도 생산 현장이나 건설 현장에 동원돼야 하는 상황이 벌어지게 되는 것이다.
주말과 휴일 없이 야간작업 강행
이번 70일 전투 기간에 이러한 현상들은 실제로 나타났다. 북한 사정에 밝은 대북 소식통은 지난 4월 초 “북한 근로자들은 매일 오전 7시에 출근해 저녁 9시까지 노동에 참여하고 있다”며 “70일 전투의 노동 강도가 점점 강해져 주민들의 불만이 팽배하다”고 밝혔다.
소식통은 또 “평양시내 근로자들도 휴일 없이 야간 노동을 한다”며 “평양의 전업주부들은 금요일부터 일요일까지 평양 주변 농장에 나가 농촌 일손 돕기를 한다”고 전했다. 이와 관련해 한 정부 소식통은 “70일 전투는 야간작업은 물론 주말, 휴일 없이 주민을 동원하는 개념”이라고 설명했다.
40여 년 전에도 ‘70일 전투’라는 같은 이름의 대중동원이 전개된 적이 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후계자로 내정된 직후인 1974년 10월부터 경제 분야의 치적 쌓기를 위해 70일 전투라는 노력동원을 발기하고 직접 지휘했다. 당시 70일 전투의 내용은 “대중을 동원해 경제 발전에 필요한 내부 예비를 찾아내고 기술 혁신을 통해 경제 분야에서 속도전을 벌이는 것”이었다.
북한에서는 1950년대 ‘평양속도’, 1960년대 ‘비날론속도’, ‘강선속도’ 등 ‘속도’를 강조하는 대중동원 운동이 벌어졌고, 1970년대엔 사회주의 건설의 기본 사업방식으로 ‘속도전’이 공식 채택됐다. 김정일은 1974년 2월 당중앙위원회 5기 8차 전원회의에서 “당조직들은 대중의 지혜와 창조적 열의를 적극 발양시켜 사회주의 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속도전을 힘 있게 벌이자”고 호소했다.
70일 전투와 같이 일정한 기간을 정해놓고 하는 속도전 운동의 시초는 1971년 1월부터 진행된 ‘100일 전투’였다. 김일성은 1970년 11월 5차 당대회에서 채택된 ‘인민경제발전 6개년 계획(1971∼1976년)’을 견인하기 위해 100일 전투를 발기했다. 1978년 정권 수립 30주년을 맞아 100일 전투가 또 벌어졌고, 1980년에도 6차 당대회를 앞두고 연간 생산계획을 앞당겨 달성하기 위한 100일 전투가 전개됐다.
북한은 1988년 정권 수립 40주년을 앞두고 예전보다 총동원 기간이 2배로 늘어난 ‘200일 전투’를 벌였으며,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의 성공적 개최를 목표로 1989년까지 2차 200일 전투를 이어갔다. 김정일 집권 시기인 1990년대 말과 2005년에도 각각 200일 전투와 100일 전투가 전개됐다.
김정은 후계자 내정 후 150일 이어 100일 전투 이어져
김정은을 김정일의 후계자로 내정한 2009년에는 ‘150일 전투’와 ‘100일 전투’가 연이어 이어지면서 북한 주민들은 1년 내내 ‘전투’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북한은 김일성 탄생 100주년인 2012년을 ‘강성대국의 문을 여는 해’로 규정하며 2009년이 중요한 분수령이라고 강조했다. 이 같은 주장은 150일 전투와 100일 전투에서 성과를 달성했을 경우 이를 후계자 김정은의 치적으로 포장하기 위한 포석이었던 것이다.
김정은은 부친인 김정일의 후계자 시절 행보를 모방해 1년 내내 ‘전투’라는 것을 벌였지만, 그 결과는 썩 시원치 않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해 11월 30일 단행한 화폐개혁까지 실패하면서 북한 주민들은 2009년을 최악의 해로 기억하고 있다.
김정은 집권 이후에는 ‘마식령속도’라는 새로운 속도전 구호가 등장했다. 김정은은 2013년 6월 ‘마식령속도를 창조해 사회주의 건설의 모든 전선에서 새로운 전성기를 열어나가자’라는 제목의 호소문을 발표해 경제 건설에 동원된 주민과 군인들을 독려했다.
김정은은 ‘새로운 조선속도 창조’도 독려했다. 마식령속도와 새로운 조선속도에 힘입어 마식령 스키장, 미림승마구락부, 문수물놀이장, 창전거리, 위성과학자주택지구, 미래과학자거리, 과학기술전당 등 많은 시설과 건축물이 잇따라 완공돼 김정은의 ‘업적’으로 기록됐다.
김정은 체제의 속도전 운동은 부작용을 낳기도 했다. 북한이 70일 전투의 성과로 자랑하는 백두산영웅청년 3호 발전소가 부실공사로 준공된 지 얼마 안 돼 누수 현상이 발생한 것이 좋은 예다. 지난해 10월 백두산영웅청년 1·2호 발전소 준공식에 참석한 김정은은 3호 발전소 건설을 2016년 청년절(8월 28일)까지 끝내라고 지시했는데, 건설에 동원된 북한 청년들은 70일 전투 기간 밤낮 없는 전투를 벌여 공사 기일을 4개월이나 앞당겼다.
백두산영웅청년 3호 발전소는 7차 당대회 직전인 4월 28일 준공됐고, 북한은 이를 70일 전투의 주요 성과로 자랑했다. 김정은도 7차 당대회 사업총화 보고에서 “우리 청년들은 당이 맡겨준 백두산영웅청년발전소를 훌륭히 건설하여 조선 청년의 불굴의 정신력과 자력자강의 힘을 만천하에 과시했다”며 청년들을 내세웠다.
그런데 연합뉴스가 입수한 백두산영웅청년 3호 발전소 위성사진(5월 8일 촬영)에서는 댐 곳곳에 균열이 발생해 누수 현상이 발생하고 댐 벽면의 일부는 붕괴된 것으로 나타났다. 저수지의 물을 긴급히 방류하는 정황도 위성사진에서 포착됐다. 전력 생산은 고사하고 댐 붕괴로 대형사고가 날 수도 있는 상황인 것이다.
7차 당대회 개막 전에 발전소를 완공하려고 무리하게 건설을 강행한 것이 이번 부실공사의 원인으로 꼽혔다. 이와 관련해 대북 소식통은 “영하 30도의 혹한 속에서 야외 콘크리트 작업을 하고 식량과 방한복, 장비를 제대로 갖추지 않고 공사를 추진하다가 수십 명의 인명사고가 발생하는 등 부실공사가 예견됐다”고 설명했다.
이 같은 속도전의 부작용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70일 전투가 끝나자 더 강한 속도전 구호를 제시했다. 북한 노동당은 7차 당대회 폐막일인 지난 9일 ‘전체 인민군 장병과 청년들, 인민들에게 보내는 조선노동당 제7차 대회 호소문’을 발표하며 ‘만리마 속도 창조 운동’을 전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노동당의 호소문에는 ‘하루에 1만 리를 달리는 말’이라는 뜻의 ‘만리마’가 무려 54회나 등장했다. 7차 당대회에서 주민 생활을 향상시킬 수 있는 ‘휘황한 설계도’를 보지 못한 북한 주민들에게 노동당을 뒤따라 하루에 1만 리를 달려갈 수 있는 희망과 체력이 남아 있을지는 미지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