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최장수 학회인 대한기계학회(회장 유홍희)가 통일 준비에 발 벗고 나섰다. 학회 산하에 통일준비위원회(위원장 임현준)를 구성한 것. 임현준 위원장을 만나 포부를 들었다.
“통일 논의에서 소외돼 있던 과학기술계가 더욱 적극적으로 통일 준비에 나서야 합니다. 기계 분야의 격차를 줄이지 않으면 남북한 산업의 현격한 간극을 메울 수 없고 통일비용도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에 이를 수 있습니다.”
대한기계학회 임현준 통일준비위원장(홍익대 기계공학과 교수·사진)의 진단이다. 대한기계학회는 1945년 ‘조선기계기술협회’로 출범한 국내 최장수 학회로 꼽힌다. 회원 수만도 2만 명에 달하고 기계공학과 관련한 대학, 정부 출연 연구소, 기업 등이 총망라된 단체.
기계학회는 2014년 5월 통일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난 11월 22일 ICC제주컨벤션센터에서 개최된 창립 70주년 기념 학술대회에서 통일 준비 세션을 별도로 열었다. 세션에선 최진욱 통일연구원 원장, 랄프 슈텔처 독일 드레스덴공대 학장, 폴커 슈피겔베르크 독일 조선 분야 전문가의 기조연설이 진행됐다.
세션에는 예상보다 많은 300여 명이 몰려 주최 측이 준비한 자리가 부족해 선 채로 토론과 발표를 지켜보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기계학회는 동서독 기술계의 통합 과정 등에 대한 강사 섭외를 위해 무려 1년간 공을 들이는 등 통일 문제에 지대한 관심을 표명하고 있다. 기계학회의 이 같은 움직임은 공학계 최초의 실질적이고 구체적인 통일 준비로 통일 분야 전문가들의 눈길을 끌고 있다.
“남북한이 경제·사회적으로 동등한 수준을 유지해야 진정한 통일의 완성이 가능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남북한의 제조업 수준이 비슷해야 하는데, 지금은 격차가 너무 큽니다. 학회 차원에서 제조업의 기간산업인 기계 분야의 남북한 동질성 연구에 들어가자는 공감대가 형성됐고, 구체적인 실천 방안의 하나로 통일준비위원회를 구성했습니다.”
대한기계학회 통일준비위는 지난 12월 2일 국회에서 세미나를 개최했다. 이날 세미나를 공동 주관한 국회 과학기술혁신포럼 의장인 서상기 의원은 “정치색이 적은 과학기술 분야는 남북관계에 숨통을 트이게 하고, 교류와 협력을 촉발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중요한 분야”라며 “과학기술 분야가 우리나라 통일을 앞당기는 첨병 역할을 할 수 있다”고 기대감을 표명했다.
통일준비위는 전문가 초청 특강도 다섯 차례 가졌다. 비공개였지만 학회 구성원들의 열띤 호응 속에서 치러졌다. 앞으로 통일 분야 전문가 그룹과 함께 통일포럼과 같은 네트워크 구축, 남북한 용어 정비, 백서 발간 등을 추진할 예정이다. 엔지니어 출신의 통일 전문가를 양성하고 남북한 과학기술 통합 등을 향한 실질적 통일 대비 활동, 유관기관과의 협력 등 원대한 포부를 갖고 있다.
<사진>임현준 위원장은 “정부 당국과 협력해 북한 연구자들과 기술 분야 교류를 추진하고 싶다”고 밝혔다.
북한 기계학은 군사 분야 외에는 열악한 수준
현재 북한의 기계학 수준은 군사 분야를 제외하고는 매우 열악한 상황으로 알려졌다. 김정은 집권 이후 희천련하기계종합공장, 락원기계연합기업소 등을 준공하고 과학기술전당 신축, 미래 과학자 거리 조성 등으로 과학기술자에 대한 예우에 각별한 관심을 쏟고 있으나 대부분 군사 분야에 편중돼 있다. 특히 독일 통일 과정에서 동독의 기계 분야 기술이 낙후돼 결과적으로 서독 기업인들이 동독 제조업을 완전히 장악했던 사례는 큰 시사점을 던져주고 있다.
“독일의 경험을 분석해보면 통일에 대한 준비가 절대적으로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기계 분야의 일방적인 획일화는 부작용을 낳을 수 있습니다. 서로 배려하면서 양측의 시스템을 적절하게 조화시켜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게 중요한데 독일의 경우 통일 과정에서 서독의 일방적인 밀어붙이기로 감정적인 문제까지 야기했습니다. 통일이 되면 과학기술자의 비전과 역할이 매우 중요합니다.”
임 위원장이 현 단계에서 주목하는 것 중의 하나가 북한의 농업기술 분야. 군사 목적 외에 농업 생산성 증대를 통해 북한 주민들의 실생활에 도움을 줄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기계 분야는 무기 개발과 연관돼 있기 때문에 기술 이전 등이 매우 조심스럽습니다. 통일부 등 정부 당국과 긴밀한 협력 아래 북한 연구자들과 교류하고 이를 통해 적정한 기술 분야의 협력을 추진하고 싶습니다.”
임 위원장은 “오랜 기간의 단절과 상이한 체제로 과학기술 분야의 이질성이 매우 크다. 따라서 처음부터 욕심을 내기보다는 남북한 기술용어비교사전 편찬 등 비교적 쉬운 일부터 시작할 예정”이라며 “통일준비위 등에 과학기술 분야 전문가들의 참여가 적은 상황에서 자료 확보, 남북한 전문가 교류 등에 한계가 있는 만큼 정부의 적극적인 관심과 협조가 필요하다”고 밝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