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쿠바 경제 개혁의 상징 가운데 하나인 농민시장에서는 국영 협동농장이 정부 수매 때 팔고 남은 농산물을 주민들에게 직접 판매할 수 있다.
2016년 4월 열릴 예정인 쿠바 공산당 7차 당 대회는 라울 카스트로가 주관하는 마지막 당 대회가 될 것이 확실하다. 아울러 실용주의 정책이 부각될 것으로 예상된다. 2014년 12월 미국과 쿠바가 관계 정상화를 선언한 지 1년이 지난 쿠바의 현실을 분석하고 쿠바 모델의 북한 적용 가능성을 진단했다.
쿠바 수도 아바나에서는 거리를 달리는 1950년대 클래식 자동차에 가장 먼저 눈길이 간다. 말레콘 해변가를 따라 달리는 알록달록한 원색의 컨버터블 자동차는 아바나를 낭만의 도시로 그리는 데 일조한다. 저녁이 돼 거리를 노니는 수많은 쿠바노(쿠바인)의 흥겨운 음악 소리를 듣는 것도 익숙한 풍경이고, 정오의 뜨거운 햇살 아래에서 뻘뻘 흘린 땀을 닦으며 먹는 쿠바의 코펠리아 아이스크림이나 에스프레소 한잔은 열대를 즐기는 행복한 모습이다. 게다가 현지 화폐로 매겨지는 단돈 200~300원짜리 가격은 ‘가성비(가격 대비 성능 비)’ 최고의 만족감을 선사한다. 이 모든 것이 이미 우리에게 익숙한 아바나의 정경이다..
하지만 아바나의 일상으로 돌아가면 현실은 그리 녹녹하지만은 않다. 이미 시작된 빈부 격차 때문에 체 게바라의 나라로 알고 들어온 순례객들이 눈살을 찌푸리는 일은 다반사다. 현지 화폐로 거래되는 청과물 시장에서 과일을 사고 외국인 전용 화폐인 태환 페소(CUC)와 쿠바 페소(CUP) 간의 환율 차 때문에 가끔씩 눈속임을 당할 때는 실망감이 앞서기도 한다.
길거리 호객 행위를 하는 삐끼를 따라 들어가 쿠바 시가를 구경하다 보면 어디까지가 진짜이고 어디까지가 가짜인지 구분하기도 어렵다. 공식 시가 담배와의 가격 차이가 너무 크면 도리어 값싼 시가를 사기가 두려워 결정 장애만 되뇌며 빈손으로 돌아나오기 일쑤다. 어쩌다 기분 낸다고 엘 모로 요새가 보이는 해변가 레스토랑에서 와인을 곁들인 랑고스타(바닷가재) 요리를 먹다 보면 1인당 3만~4만 원을 훌쩍 넘는 가격표를 받게 된다.
무역적자 3분의 1 관광 흑자로 메꿔
밤거리의 쿠바를 느끼려고 쿠바의 유명한 모히토 칵테일 한 잔을 마시고 공연이라도 볼라치면 100달러는 내야 된다. 공연 내용을 즐기는 경우도 많지만, 취향이 맞지 않는 경우 2시간짜리 공연을 보고 허탈해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나마 인터넷이 되는 특급 호텔로 돌아와서는 울적한 마음을 달래고자 고향 땅에 두고 온 친구나 가족을 찾아 와이파이 접속을 시도하지만 시간당 5달러씩 하는 사용료를 내고도 신호를 잡으려고 복도를 헤매고 다녀야 하는 경우가 다반사다.
오비스포 거리 등 아바나 시내 명소를 찾아 돌아다니지만 쿠바의 혁명사나 헤밍웨이를 잘 모르는 사람이 많고 그나마 안다고 해도 반응이 시큰둥하다. 교통은 얼마나 불편한지, 일일이 비싼 택시를 타기도 그렇고 걷기에는 먼 듯하고… 이런 실망감은 200~300달러짜리 호텔에 묵으면서 그 수준의 가성비를 기대하며 2, 3일 만에 아바나에서 쿠바의 낭만을 만끽하려는 허욕의 대가일지도 모를 일이다.
아바나를 찾는 미국인 관광객이 연간 60만 명을 웃돌고 올해 들어서는 그 수가 50%까지 폭증했다. 전체 관광객 수는 지난해 이미 300만 명을 넘어 전체 인구 1100만 명의 섬나라를 헤집고 다녔다. 한마디로 쿠바는 이미 핫(hot)한 관광지가 됐다. 60억~70억 달러에 달하는 쿠바 무역수지 적자의 3분의 1을 관광수지 흑자가 메우는 현실이다. 나머지는 의료진 등 인력 수출에 따른 외화 수입과 미국으로부터의 해외 송금이 채운다.
<사진>1959년 혁명 직전까지 사용됐던 옛 쿠바 국회의사당 건물.
이런 나라를 제멋대로 평가하기엔 쿠바의 변화 속도는 너무 빠르다. 남한 크기의 1.1배에 달하는 쿠바를 2, 3일간의 짧은 아바나 거리 관광으로 이해하기란 애초부터 불가능할 정도가 됐다는 뜻이다. 아바나의 부패와 바가지요금에 짜증을 내기도 하지만 돌이켜보면 시장화 과정에서 부패와 지하경제가 공존했던 나라에 대한 경험과 실망의 사례는 많다. 과거 중국과 베트남이 비근한 예다.
그러나 급속한 변화를 거듭해온 지금의 중국이나 베트남은 이젠 우리가 만만히 보기 어려운 ‘센’ 나라가 돼버렸다. 아는 만큼 보이고 경험한 만큼 느낀다는 문화 체험의 진리는 아바나도 예외가 아니게 되었다. 이제 쿠바를 만끽하려면 우리 머릿속의 붉은 체 게바라를 지우고 쿠바노를 대면해야 할 때가 된 것인지도 모른다.
유럽인이나 아시아인에겐 쿠바가 체 게바라의 땅일지도 모르지만, 미국인에게 쿠바는 헤밍웨이의 섬이자 마이애미에 정착한 리틀 쿠바노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중부 도시 산타클라라 광장에 홀로 우뚝 서 있는 체 게바라 박물관을 굳이 찾아가는 관광객을 순례자라고 부르는 미국인들의 시선은 때로는 냉소적이기까지 하다. 필자가 거리에서 만난 쿠바노들이 체 게바라에게 보인 반응 역시 무덤덤하기만 했다. 사회주의자냐라는 물음에 애국자일 따름이라고 답한 아바나 의대생의 답 역시 현 상황에서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
2018년 카스트로 형제 완전 퇴진 선언
2016년 4월 쿠바 공산당은 7차 당 대회를 개최할 예정이고 이는 라울 카스트로가 주관하는 마지막 당 대회가 될 것이 확실하다. 라울 카스트로 국가평의회 의장은 2018년 모든 공직에서 퇴임할 것을 공언했다. 카스트로 형제를 대체할 리더십은 보이지 않고 있다.
이미 쿠바 공산당은 여러 가지 개혁 조치를 이행하고 있지만 시민들의 기대치를 충족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쿠바노들의 인터넷 열기는 뜨겁지만 접속은 제한적이고 비용이 많이 든다. 시간당 2달러의 쿠폰을 구매해 사용하는 공공 인터넷망용 핫스팟은 전국에 36개밖에 설치돼 있지 않다. IMO라고 불리는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젊은 쿠바노들은 세계인들과 소통하지만, 비용 때문에 성이 차지 않는다. 인터넷을 통한 시민 연대의 길은 무르익었지만 동시에 그 길은 멀고도 험하다는 얘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나 공산당은 사실상 이데올로기 지배를 벗어나 실용주의로 무장한 군부가 주도하고 있다. 당 대회가 열리지만 사회주의 이데올로기보다는 실용주의 정책이 부각될 것이라고 보는 이유다. 쿠바의 다음 5년을 결정할 7차 당 대회에 대한 기대를 버릴 이유가 없다는 논거이기도 하다. 권력을 군부가 장악하든 누가 장악하든 부가 창출되고 그것이 인민에게 잘 배분만 된다면 문제될 게 있겠는가라는 논리가 바로 보통 쿠바노들의 심정이다.
지금까지 쿠바의 개혁은 여전히 자영업 확대 조치를 중심으로 한 제한적 개혁안을 못 벗어나고 있다. 이농 현상의 대안으로 근교농업과 도시농업, 그리고 유기농 협동농장을 들고 나왔지만 한계는 여전하다. 식량은 여전히 수입에 의존해야 한다. 비싼 유기농 농산물을 수출하고 값싼 GMO 농산물을 대량으로 수입한다는 발상은 기름진 황해도 쌀을 팔아 대량의 옥수수를 수입해야 했던 북한의 자구책을 연상케 한다.
<사진>피델 카스트로 전 쿠바 국가평의회 의장(오른쪽).
중국과 베트남의 개혁을 성공으로 이끈 제조업은 쿠바에서는 잠재력이 제한적이다. 교육 수준이 높고 서비스업 비중이 70%에 육박하며 젊은 층 인구가 부족한 고령화 사회가 쿠바 개혁에는 역설적인 장애 요인이다. 쿠바에 대한 자본 투자가 제한적인 이유다. 관광업 수입이 미래를 이끌겠지만 기형적인 산업 특성상 관광업은 높은 외화 수요를 요구하게 돼 선순환의 고리가 조기에 가시화될 것 같지는 않다. 연간 4%대의 성장세 또한 지나치게 해외 의존형이다.
자영업 중심 개방, 제조업 한계 노출
쿠바의 이런 사정을 누구보다도 잘 아는 미국 정부는 쿠바와의 수교에도 불구하고 카스트로 정부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지 않고 있다. 오바마 정부는 국유화한 미국인 자산을 반환하라고 요구하며 카스트로 정부에 은밀한 압박을 계속하고 있다. 쿠바인들의 도미를 조장하는 ‘젖은 발, 마른 발(Wet Foot, Dry Foot)’ 정책(쿠바를 탈출한 보트피플이 해상에서 적발되면 국제법에 따라 송환하지만 일단 미국에 상륙하면 영주권을 부여하는 제도)을 변경할 태세는 없다. 쿠바의 제1교역국인 베네수엘라 선거에서 야당 압승 소식은 미국 정부에 쿠바 경제를 압박할 수 있는 호재다.
하지만 쿠바에서 ‘아랍의 봄’을 기대하는 미국 정부의 의도를 잘 아는 쿠바 정부의 대응 역시 단호하다. 쿠바 당국은 수교와 관계 정상화는 별개라며, 미국에 대한 과잉 기대를 단속하고 있다. 관계 정상화를 위해서는 50년의 경제 제재에 대한 손해 배상뿐 아니라 미국이 쿠바로부터 조차한 관타나모 기지를 반환해야 한다는 확고한 논리를 무기로 내세운다.
쿠바의 미래에 대해서는 다양한 전망이 교차되고 있다. 일부 쿠바 학자들 사이에서는 베트남 개혁론이 회자되지만 정작 쿠바노들은 베트남에 무관심하다. 학력 수준이나 산업구조가 베트남의 초기 조건과 너무 다르기 때문이다. 장기적으로는 미국 경제에 종속될 것이라는 우려도 있지만 오히려 하나의 히스패닉이라는 정체성은 쿠바노가 갖는 자신감의 배경이 되기도 한다. 쿠바의 서비스 산업이 히스패닉 공동체에서 적절한 분업 체계를 형성할 수 있다는 논리가 깔려 있기도 하다. 새로운 쿠바 모델의 배경이 되는 논리다.
같은 7차 당 대회를 준비하는 북한의 경우 쿠바와의 차이는 확연하다. 쿠바가 우호적인 히스패닉 공동체를 갖고 있다면, 북한에는 경쟁 사회인 한국에 대한 두려움이 앞선다. 쿠바가 중남미 최고의 교육 수준과 경제력을 갖고 있지만, 북한의 주변국들은 북한이 비교하기엔 너무나 초강국들이다. 오바마 정부는 100만 명이 넘는 쿠바 출신의 미국 시민권자들을 통해 쿠바를 속속들이 파악하지만, 북한에 대해서는 아는 것도 없고 편견의 벽도 높기만 하다. 마이애미의 쿠바노들이 오바마의 쿠바 정책을 찬성하지만, 3만 명을 채 넘긴 한국의 탈북자들은 김정은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득 차 있다. 이 모든 차이가 북한이 자기 체제를 꽁꽁 싸매고 핵무기를 놓지 않는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아직도 배급 체제가 살아 있고 이중 화폐 체제가 기능하는 쿠바는 북한에는 심정적으로는 마지막 의지처일지도 모를 일이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북한이 외부 세계에 손을 내밀 상황이 되면, 설익은 쿠바 모델이라도 북한에는 그것이 가뭄의 단비처럼 느껴질 것이다.
쿠바에서 북한의 미래를 보려면 아바나를 벗어나야 한다. 아바나를 벗어나 쿠바의 시골 땅과 골목길을 밟다 보면 배급소의 돼지고기와 쌓아놓은 배급 빵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비날레스의 어느 농가에 들어가 비닐에 싸놓은 진품 시가를 흥정하다 보면 설익은 시장 논리에 흐뭇해지기도 한다. 선선한 저녁이 되어 시골 마을의 광장에 발을 딛다 보면 비로소 쿠바노들의 유쾌한 템포와 낭만 어린 노래 리듬을 탈 수 있다. 광장 문화로 시작되는 쿠바 모델은 아바나에 있지 않다는 뜻이다.
이정철 숭실대 정치외교학과 교수
서울대 정치학 박사. 삼성경제연구소 경제안보팀, 조지워싱턴 대학교 시거센터 방문학자 역임. 현재 통일부 자문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