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 칼럼

문제는 신뢰다

신뢰는 사회적 관계의 기초다. 그래서 신뢰를 사회적 자본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한반도 신뢰 프로세스’를 대북정책의 간판으로 달았던 박근혜 정부는 남북관계에서도 신뢰가 중요하다는 점을 알았다. 그러나 본질은 제대로 꿰뚫었지만 과정과 결과는 낭패를 보았다. ‘신뢰’라는 말은 거창했지만 ‘구축’은 없었다. 실천 없는 신뢰 구축이었던 셈이다.

불신관계에 있는 거래 당사자 간에는 신뢰가 더욱 중요하다. 불신관계에 기초한 거래는 신뢰관계에 비해 시간도, 비용도 많이 든다.

이번 6·12 북·미 공동성명의 내용을 두고 이런저런 말들이 많다. 알맹이가 빠졌다는 비판부터 새로운 시대의 문을 열었다는 칭찬까지 다양하다. 비판자들은 공동성명에 CVID(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비가역적인 비핵화)가 빠지고, 비핵화 로드맵도 없으며, 비핵화 시한도 못을 박지 못했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지적한다.

비판자들의 지적은 일면 타당하지만, 현실적이지 못하다. 이들은 북·미관계의 오랜 적대와 불신관계를 도외시했다. 비판자들이 원하는 조치들은 불신관계에서 선뜻 동의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정전협정 체결 이후 65년에 걸친 적대와 불신관계를 한 번의 만남으로 신뢰관계로 돌릴 수 있을 것으로 기대했다면 그야말로 ‘희망적 사고’이다.

이번 6·12 북·미 정상회담의 최대 성과는 트럼프 대통령과 김정은 위원장이 본격적인 거래에 앞서 신뢰 구축의 중요성을 깨닫고, 북한과 미국 모두 ‘선의의 조치’를 취하기로 한 점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기자회견에서 “북·미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중단하겠다”는 의사를 밝혔고, 워싱턴으로 돌아와 한미 협의를 거쳐 공식 발표했다. 김정은 위원장은 풍계리 핵실험장을 공개적으로 폐쇄한 데 이어 미사일엔진실험장을 폐기하겠다고 선언했다. 또한 두 정상이 전화번호를 교환함으로써 일종의 정상 간 핫라인을 개설했다.

약속대로 두 정상이 통화를 하고, 북한이 미사일엔진실험장을 공개적으로 폐기하며, 고위급회담이 개최될 것이다. 이 과정에서 축적된 신뢰를 바탕으로 북한과 미국은 ‘새로운 북·미관계 수립’과 비핵화와 체제 안전보장을 교환하는 작업에 본격 착수할 것이다. 이미 양국 간에는 수차례의 고위급 접촉과 실무급 접촉을 통해 서로의 입장을 충분히 이해한 상황이므로, 여기에 정상 간의 신뢰가 뒷받침된다면 탄력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과정이 순탄치만은 않을 것이다.

상대방의 거래 의지에 대한 확인이 끝나면 더 어려운 교환물에 대한 확인 작업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신뢰 구축의 첫 단추가 잘 꿰어진다면 비핵화 등의 과제가 결국 해결되리라고 희망적 낙관을 조심스럽게 해본다.

이기동 이기동
국가안보전략연구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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