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의 길을 묻다

5월 24일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 핵실험장의 핵실험 관리 지휘소 시설이 폭파되며 목조 자재와 돌멩이들이 하늘로 솟구치고 있다. 이날 지휘소 시설 7개 동이 폭파됐다(위). 다목적실용위성 아리랑 2호가 2006년 10월 16일 촬영한 북한 핵실험 추정 지역인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의 영상. 작은 사각형의 위쪽이 만탑산, 아래쪽이 장욱천. 어두운 부분은 산지, 흰 부분은 건물밀집 지역이나 땅이 파헤쳐진 곳으로 보인다(오른쪽). “우리 모두는 또 하나의 탈북자…
억압에 저항하는 민중 담고 싶었다”

지난 6월 22일부터 24일까지 서울의 연극 메카 대학로 ‘정미소’ 극장에 눈길을 끄는 무대가 펼쳐졌다. 배우들의 면면부터 남달랐다. 한국, 대만, 말레이시아 국적의 배우들이 무대에서 각자 자신의 모국어로 연기했다. 각국 표준어 외에도 대만에서 쓰는 방언, 광둥어와 민난어(중국 푸젠성 등지서 쓰는 방언)까지 구사했다. 한국어를 제외한 언어를 사용할 때는 관객들을 위해 자막을 보여줬다. 퍼포먼스, 비디오아트, 실험음악 등을 아우른 형식도 한편 낯설고 한편 충격적이었다.

한국을 주목한 이유

연극 ‘탈북자(The North Defectors)’는 이렇게 남다른 ‘그릇’에, 그보다 더욱 남다른 내용을 담아냈다. 바로 아시아 근현대사를 관통해 한국, 대만, 말레이시아 등 도처에서 벌어진 학살과 그로 말미암아 상처받은 민중들에 대한 이야기다. 아직도 신자유주의의 폭압과 이데올로기로부터 온전한 자유를 찾지 못한, 그래서 여전히 ‘탈출’을 꿈꾸는 개인들의 이야기다.이 묵직하고도 뜨거운 이야기를 연극이라는 형태로 빚어낸 이는 대만의 연출가이자 비평가인 왕모림(王墨林) 선생. 대학로 공연을 앞두고 일시 방한한 왕 선생을 만나 그가 이 작품을 통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를 물었다.

이번에 공연하는 작품 ‘탈북자’를 소개해주십시오.

“한국과 마찬가지로 이데올로기 때문에 분단을 겪은 대만인으로서 자연히 탈북자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많은 탈북자 관련 자료를 읽고 탈북자를 만들어낸 역사적 원인이 과연 무엇인지 고민했죠. 그런 고민의 결과 갖게 된 생각은, 비단 북한을 탈출한 사람뿐 아니라 어떤 의미에서 우리 모두가 ‘탈북자’가 될 수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국가로부터, 체제로부터 억압을 받고 부자유를 느껴 그 울타리를 떠나고자 하는 이, 스스로 자기가 생활하던 공간으로부터 탈출하고자 하는 이. 그들 모두가 결국 탈북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형상화한 작품이 ‘탈북자’입니다.”

그의 설명처럼 이 작품은 ‘탈북’이라는 단어에 갇혀 있지 않다. 셰익스피어 ‘리어왕’의 텍스트를 통해 국가와 국민 사이에 일어나는 ‘충성’과 ‘배반’에 관해 이야기하고, 황석영의 소설 ‘손님’을 통해 6·25전쟁 당시 황해도 신천군에서 일어난 양민 학살사건을 드러내 보인다.

황석영의 ‘손님’은 다시 대만 작가 황진수, 진영진의 작품과 만나 전후 냉전체제에서 발생했던 대만과 말레이시아의 학살을 보여준다. 작품은 또한 한나 아렌트와 카뮈의 텍스트를 인용하면서 전쟁이 끝난 뒤에도 여전히 보이게, 안보이게 우리 사회에서 국가와 체제의 학살이 진행되고 있음을 설파한다.

왜 특히 한국을 주목하게 된 것입니까?

“한국의 전후 사회운동에 천착했던 선배이자 스승 천잉전(陳映眞) 작가의 영향으로 한국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일본에서 약 2년간 거주할 당시 만난 재일 조선인들을 통해서도 한국에 대해 많이 알게 됐고요. 한국과 대만은 유사한 점이 많습니다. 분단과 그에 따른 체제의 억압, 민중 학살 등이 그것입니다. 한국에 박정희 대통령이 있었다면 대만에는 장개석 총통이 있었고, 한국에 4·3과 광주항쟁이 있었다면 대만에는 2·28과 백색테러가 있었습니다. 자연히 ‘왜 이 두 나라가 이렇게 역사적으로 유사한 맥락에 놓여야 했을까’를 많이 궁금해했습니다.”

왕 선생이 언급한 ‘2·28’ 사건은 1947년 대만 본토민과 대륙의 공산화로 대만에 이주해온 국민당 정권이 충돌한 사건이고, ‘백색테러’는 1950~60년대 대만의 우익이 좌파에 행한 폭력을 일컫는다.

그가 분단이나 냉전 문제에 이끌린 데는 개인적 이력도 한몫했다. 그의 부친은 국공내전(중국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에 벌어진 내전)에서 국민당이 패배했을 때 대만으로 강제 이주한 ‘외성인’이었다. 1947년 태어난 왕 선생 자신도 1960년대 말 대만의 군사학교인 ‘정치작전학교’에 진학해 장교로 오래 복무하며 1970~80년대 대만을 지배한 냉전 분위기를 몸으로 체험했다.

왕모림 선생이 연출한 연극 ‘탈북자’의 한 장면. 왕모림 선생이 연출한 연극 ‘탈북자’의 한 장면.

전역 후엔 일본으로 건너가 바로 연극계에 뛰어들었다. 당시 일본에서 전개되던 소극장 운동을 2년간 보고 배운 후 귀국해 1980년대 대만 소극장 운동의 기수가 됐다. 잡지기자로도 일하며 수많은 정치, 문화 및 사회 평론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그는 한국과 두 나라 민중들이 현대사에서 사뭇 비슷한 궤적을 밟은 이유를 ‘냉전’과 ‘계엄’ 그리고 ‘미국과의 관계’ 등에서 찾는다. 체제 유지를 위해, 공산화를 막는다는 이유로 행해진 국가의 통제와 민주화운동 탄압, 그리고 특히 대만에서는 지금까지도 ‘형님 나라로 모시는’ 미국에의 의존 등이 두 나라 민중을 억압했다는 것이다.

“억압에 저항하는 것이 자유”?

그런 관심이 1970년대 노동법 개정을 요구하며 분신한 전태일과 그의 어머니 이소선 여사 이야기를 다룬 ‘엄마, 안녕’ 연출(2010년 연극놀이터 ‘쉼’, ‘굴링 아방가르드 시어터’ 공동제작)로 이어졌습니까?

“예. 한국의 노동운동에 관심을 갖고 공부해나가면서 한국과 대만 민주화운동의 차이점을 발견하게 됐습니다. 상대적으로 빨리 민주화를 이룬 대만의 경우 이미 냉전이나 계엄, 반공 등의 역사를 잊어버린 사람이 많은 반면, 대만보다 더 열악한 노동 환경에서, 좀 더 치열한 노동운동과 민주화운동을 했던 한국은 아직도 과거를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습니다. 이를 전태일을 통해 알게 됐고요. 또한 한국의 민주화운동은 대만과 달리 북한의 사회주의와 미국의 식민주의라는 주제를 다뤄왔다는 점에서도 차이가 있습니다.”

왕 선생의 지적처럼 1980~90년대 한국 학생운동의 일부 계열은 미국을 신식민국가로 규정하고 치열한 반미운동을 펼쳤다. 광주항쟁 학살 책임자이자 한반도 통일을 가로막는 세력으로 지목했다. ‘가자 북으로, 오라 남으로’라는 구호 아래 남북 학생 교류를 외치며 통일운동을 전개했다. 이 같은 1980~90년대 ‘반미, 통일운동’의 ‘올바름’에 대한 평가는 일단 차치하고, 그 같은 문제의식을 갖고 민주화운동을 전개했다는 사실 자체에 왕 선생은 의미를 부여했다.

탈북자를 바라보는 시선, 혹은 탈북자 인권은 한국 사회에서도 복잡하고 민감한 문제입니다. 북한 인권, 탈북자 인권 문제 제기를 특정 정파가 독점하다시피 해오다 보니 보편적 인권 문제로 바라봐야 할 북한과 탈북자 인권이란 화두가 자칫 이데올로기적 이슈로 변질되기도 했고요.

“그런 복잡한 문제에 대해서는 저도 인식하고 있습니다. 탈북자에 대해 스스로 잘 안다고는 얘기할 수 없으며, 중국에서도 탈북자는 금기시된 단어입니다. 사실 탈북자 자신이 복잡한 존재이죠. 중요한 것은 그렇게 체제를 탈출한 사람이 자신의 선택 결과 이전보다 더 자유로워졌는지, 혹은 오히려 더 자유롭지 못하게 됐는지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탈북으로 더 자유를 잃었다고 봅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탈북 문제가 특정 이데올로그들에 의해 악용되는 것도 그중 하나겠죠.

하지만 개인이 자유를 찾는 주체가 되고자 하는 것, 자신을 부자유스럽게 만드는 억압에 저항하는 것 그 자체가 곧 자유라는 생각을 합니다.”

왕모림 선생은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나 화해의 악수를 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역사를 진정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민중이 어떻게 역사를 만들어가느냐다”라고 말했다. 왕모림 선생은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나 화해의 악수를 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역사를 진정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라며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민중이 어떻게 역사를 만들어가느냐다”라고 말했다.

현재 한반도에는 탈냉전의 훈풍이 불고 있습니다. 평화 정착의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지고 있습니다. 이런 시점에서 ‘탈북자’란 화두는 어떤 의미를 가질까요?

“아시아가 신자유주의 시대로 접어들면서 한국, 대만 등 아시아에 큰 변화가 발생하고 있습니다. 현재로서 이런 흐름이 세계사적으로 더 긍정적인 방향으로 나아갈지, 부정적인 방향으로 전개될지 단언할 수는 없지만, 저는 미래를 바람직한 쪽으로 전망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저는 지금 아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핵 문제도, 남북문제도 아니라고 봅니다.

트럼프와 김정은이 만나 화해의 악수를 했다는 사실 그 자체가 역사를 진정으로 새롭게 만드는 것은 아닙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런 상황에서 (그의 표현에 따르면 누구나 ‘탈북자’가 될 가능성이 있는) 민중이 어떻게 역사를 만들어가느냐입니다.”

“역사적 메시지 녹여내는 데 집중”

이는 소수 정치인들의 타협이나 대화도 중요하지만 역사가 잘못된 방향으로 흘러갈 때 이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저항하는 자’로서의 민중에 주목하자는 의미로 해석된다. 그는 “지금 뭔가 새로운 역사가 창조돼가고 있긴 하지만, 민중들은 오히려 저항의 가능성을 잃고 표류하는 느낌이 든다”며 “이렇게 냉전이 해체되는 과정 속에서 오히려 역사에 대해 허무주의에 빠질 수 있는 민중들을 다시 저항의 세력, 역사의 희망이 될 수 있도록 자극하고자 이번 연극을 만들었다”고 설명한다.

이번 작품은 여러 나라 배우와 스태프(배우들의 다양한 국적에 더해 스태프 중에는 일본인도 포함돼 있다)가 작업하며 어려움도 많았을 듯합니다.

“복잡하고 묵직한 역사적 메시지를 어떻게 녹여내는가가 어려운 과제였습니다. 앞서 말했듯 이미 대만에서는 냉전이나 반공, 학살이 많이 잊혀져가고 탈역사화된 상황이라 배우들이 이런 역사를 어떻게, 얼마나 받아 안고 작품화하는가가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그에게 이번 연극은 2010년 ‘엄마 안녕’과 2013년 국가 계엄하에서의 아시아 민중들 이야기를 그린 ‘안티고네’, 2016년 대구에서 상연한 ‘햄릿기계의 해석학’에 이어 한국 무대에 올린 네 번째 작품이다. 한반도의 냉전이 민중의 삶에 미친 영향을 꾸준히 주목하고 극화한 그에게, 새롭게 다가오는 탈냉전의 한반도 상황과 이를 마주한 민중들의 모습은 또 다른 예술적 화두가 될 것임에 틀림없다. 그의 다음 작품이 기다려지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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