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27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과 6·12 싱가포르 북·미 정상회담을 계기로 한반도의 정전·군사대결 체제에 대전환이 시작되고 있다. 이 전환은 ‘완전한 비핵화를 통한 핵 없는 한반도’의 실현을 포함하는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향한 것이다. 판문점 선언을 통해 남북 정상은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을 것이며 새로운 평화의 시대가 열리었음을 8000만 우리 겨레와 전 세계에 천명”했다. 북·미 두 정상은 싱가포르에서 사상 첫 정상회담을 가진 후 평화체제, 한반도 비핵화와 더불어 ‘새로운 관계’로의 전환을 약속했다.
상상한 것 이상의 일들이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과거와 비교할 때 남북, 북·미 정상은 어느 때보다 진정성 있는 자세로 문제 해결을 위해 머리를 맞대고 있다. 탈냉전 이후 지난 30년 안팎의 시간 동안 남·북·미 3자가 이토록 진지하게 서로에 대한 신뢰를 표명하면서 협상에 집중했던 적은 없었다.
대결에서 평화로, 한반도의 대전환
4·27 판문점 선언이 가져온 가장 중요한 변화의 하나는 남북대화의 일상화라 할 수 있다. 판문점 선언 이후 남북 당국 간 직통전화를 개설하고 각급 회담을 개최하는 것은 물론, 필요시 정상회담도 곧바로 개최하고 있다. 남북대화의 일상화는 우발적 상황에 의해 위기가 확대되는 것을 예방할 최소한의 안전판으로 작용할 뿐 아니라 산적한 과제들에 관해 수시로 상의할 소통 창구로 기능한다. 이 소통 창구는 6월 12일 싱가포르에서 열린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그 효과가 이미 입증됐다. 북·미 간 협상이 단절될 위기에서 긴급하게 개최된 남북 정상회담이 북·미 대화를 소생시키는 결정적 역할을 했던 것이다.
대화와 교류는 남북 당국에만 한정되지 않는다. 판문점 선언은 당국 간 대화와 더불어 민간을 포함한 다양한 층위의 남북 협력과 교류를 촉진할 것을 명시하고 있다. 이제 서로 만나고 대화하고 협력하는 일은 정부뿐만 아니라 남과 북의 시민들의 일상이 되고 있다. 우리는 이 전환을 어떻게 맞을 것인가?
우선 냉전 대결 시대의 고정관념과 금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상상력을 발휘해야 한다. 이미 언급했듯 상상한 것 이상의 변화가 현실에서 일어나고 있다. 지금까지 현실주의라는 이름으로 제시돼온 적대와 불신, 군사적 대결과 압박은 문제의 해결 대신 악화를 초래해왔다. 한편 낙관적이고 평화 지향적인 접근법이 도리어 효과를 발휘하고 있다. 진정성 있는 대화, 신뢰 구축을 위한 노력, 선제적인 평화적 행동들이 이런 접근법에 해당한다. 과거에는 이런 접근법은 지나치게 순진하고 비현실적이라는 오해와 비판을 받아왔지만, 이제는 문제 해결을 위해 지극히 현실적이고 불가피한 처방임이 입증되고 있다.
평화 공존이 곧 안보라는 인식의 전환이 한반도 대전환의 열쇠다. 지금이야말로 냉전시대의 고정관념을 넘어 한반도 평화체제를 향한 진정성 있는 노력들이 가까운 미래에 남과 북에 가져다줄 수많은 가능성과 기회를 상상하고, 그 꿈을 반드시 현실로 만들겠다는 낙관적 의지를 정부는 물론 시민 모두가 함께 키우고 발휘해야 할 때다.
둘째, 일방적이고 주관적인 태도를 경계하고 북한뿐 아니라 우리가 어떻게 변화하고 무엇을 포기해야 할지 성찰해야 한다. 북한을 대하는 일방적 태도의 대표적인 사례는 ‘핵을 포기하면 고기 먹여주겠다’ 또는 ‘채찍과 당근을 골고루 사용해야 한다’라는 식으로 상대를 우리 측 의도에 따라 동물적으로 반응하는 존재로 업신여기는 태도다. 지난 30여 년간 실패가 입증된 접근법이다. 상대를 존중하는 태도와 상대의 입장에서 살펴보는 역지사지의 태도가 필요하다. 가장 중요한 출발점은 남과 북 모두 상호 위협이 될 수 있음을 인식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진정성을 발휘하는 일이다. 우리 측의 공격적이고 압도적인 군사력과 군사훈련에 대해서는 눈감은 채, 상대 측의 군사적 굴복만을 강요해서는 협상을 이어갈 수 없다.
예를 들어 남한의 군대는 냉전 해체 이후 지난 30년간 매년 북한의 국내총생산(GDP)을 상회하는 군사비를 지출해왔다. 주한미군의 군비 지출은 제외한 수치다. 이러한 군사적 불균형이 북한 군부로 하여금 핵·미사일 등 싸고 파괴력 높은 비대칭전력을 개발하고자 하는 동기를 일부나마 제공해왔음을 인정하는 태도가 바람직하다. 그런데 각종 언론·방송이나 토론회에 등장하는 대개의 군사 분석가들이나 안보 전문가들 사이에서 북한의 비핵화 의지가 진정성이 있는 것인가에 관한 논쟁은 활발한 반면, 북한의 변화를 유도하기 위해 우리 스스로 어떻게 변화하고 어떤 변화를 선도할 것인지에 대한 토론은 크게 부족한 형편이다. 소위 전문가들이 못 한다면 이제 시민들이 스스로 평화 전문가, 협상 전문가, 갈등 해결 전문가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
탈분단의 상상력과 시민 참여의 중요성
여성시민단체들로 구성된 용천돕기여성행동이 2004년 진행한 북한 용천의 여성과 어린이들을 돕기 위한 ‘북녘 용천에 새 희망을’캠페인.
셋째, 정부나 안보 전문가가 아니라 시민이 문제 해결의 주체이자 주역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 한반도를 터전으로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이야말로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가장 큰 이해 당사자이다. 지금 다뤄지는 주제들은 우리의 생명과 안전, 행복한 삶과 직결돼 있다. 게다가 이번 정상 선언은 정부 스스로도 인정하듯이 촛불혁명의 결실이기도 하다. 촛불혁명을 통해 남한의 시민들 스스로 사회적 난제를 평화적이고 민주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역량을 지니고 있음을 전 세계에 과시했다. 즉, 촛불혁명이 한반도 문제 해결의 운전대를 남한 정부와 시민이 잡을 수 있도록 촉진하는 원동력으로 작용했다.
이제는 평범한 이들의 참여와 성역 없는 개방적인 토론을 통해 정책의 우선순위와 실행의 완급이 민주적으로 결정되고 통제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정부를 향해 남북관계에 관한 정보를 이데올로기나 정치적 이해 득실에 따라 윤색되지 않은 상태로 최대한 공개하고, 주권자인 시민 스스로 모든 쟁점을 금기나 성역 없이 자유롭게 숙의할 수 있는 여건을 제공하도록 촉구해야 한다. 더불어 지금까지 우리가 미치지 못했던 이해와 상상의 영역을 확장하기 위해 평화교육, 통일교육, 상생과 관용을 위한 교육 등 탈분단 교육을 장려하고 우리 스스로 적극 참여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남북 당국이 이미 합의한 다방면의 교류협력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이를 새로운 단계로 발전시 켜야 한다. 모름지기 듣는 것보다 직접 보는 것, 나아가 몸으로 행하는 것이 실질적인 변화를 가져오는 첩경이다. 남과 북의 민간이 직접 만나고 서로 대화하고 협력하는 것이 중요한 이유다.
남북 민간 교류에서 가장 기초적인 것은 인도적 지원과 개발협력이다. 이 분야는 앞으로 비약적으로 확대될 것이 예상되는데, 정치적 조건에 구애받지 않고 지속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지금까지 인도적 지원의 일부로 인식돼온 민간 긴급구호 활동 등은 점차 민간 차원의 개발협력이라는 보편성을 가지고 좀 더 일상화되고 다방면으로 확대돼야 한다. 지속 가능한 농업, 보건·의료, 환경생태 복원, 친환경적이고 자립적인 에너지 생산 등 다방면에서 정부뿐 아니라 민간이 참여하고 협력해야 할 과제들이 무수히 많다. 지방자치단체 등의 역할도 중요하다.
인도적 지원 혹은 개발협력과 관련해 그동안 제기돼온 쟁점이 ‘투명성’ 문제다. 지원된 구호물자 등이 필요한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되는지 확인돼야 한다는 의미다. 투명성 확보는 매우 중요하고 앞으로도 개선돼야 할 문제이지만, 민간 개발협력에서 투명성 이외에 현지 당사자의 주도성(Local Ownership) 보장, 개발협력 효과의 지속 가능성(Sustainability), 개발 목표가 실현 가능한 환경(Enabling Environment)의 조성 등도 중요한 원칙이자 기준임을 유념해야 한다.
2015년 평화누리길 걷기 대회에 참가자들이 밝은 표정으로 경기 파주시 일원의 반구정길을 걷고 있다.
남북 민간 교류협력의 바람직한 방향
사회문화 분야 교류협력은 본질적으로 민간 협력이라는 점에서 독립적이고 자율적으로 이뤄지는 것이 바람직하고 정부의 부당한 간섭은 배제돼야 한다. 하지만 교류의 다른 주체가 북한 체제의 구성원들, 즉 우리와는 다른 체제의 구성원들이라는 특수성에 유념하고, 북한 내부의 준비 정도를 고려해 당분간 남북 정부 당국과의 긴밀한 소통을 거치는 것이 불가피하기는 하다. 이 과정에서 남북 민간 대화가 사전에 상호 조율된 수준에 제한될지라도 이런 활동을 한반도 갈등 완화와 평화 정착으로 나아가기 위해 필수적인 남북 민관 협치 활동으로 이해하고, 민간 스스로 고도의 인내심과 목적의식성을 발휘해 의제와 범위를 단계적으로 확장해나가야 한다.
더불어 민간 교류협력을 국제화·다자화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남북 민간 대화에 한정하지 않고 북·미 민간 대화, 남북·미·중 민간 대화, 국제 평화대화 등으로 다변화하는 것이 그것이다. 세계의 여성 평화활동가들이 2015년 북한을 방문한 후 비무장지대(DMZ)를 통해 남한을 방문하면서 한반도 평화를 염원했던 세계여성평화걷기(Women Cross DMZ) 행사, 6자회담 주최국의 민간단체들이 몽골의 비정부기구(NGO)와 더불어 한반도 평화를 위한 민간 6+1 대화를 2015년부터 매년 개최하고 있는 ‘울란바토르 프로세스’가 그 사례가 될 수 있다.
참여연대 정책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