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화를 외치다 떠난 광주의 임들이 이곳에 묻혀 있다.
광주 사람들은 그곳을 망월동이라 부른다. 달을 바라보는 ‘망월’이라니…. 태양계를 사는 우리에게 달은 음지·죽음을 뜻하고, 태양은 양지·삶을 의미한다. 죽은 이들의 원혼을 달래주려는 것일까. 사람들은 망월동이라 부르지만, 사실 이곳은 운정동이 맞다. 여기엔 국립5·18민주묘지가 있다.
국립5·18민주묘지로 가는 길은 슬프다. 광주에서 이곳으로 도달하기까지 여러 개의 길이 있지만, 주된 접근로는 광주교도소를 지나 도동고개를 넘어 호남고속도로 굴다리를 통과해 구부정한 농로 사이로 난 아스팔트 길을 따라 들어간다. 길 양옆으로 이팝나무 가로수가 서 있다. 하얀 소복을 입은 듯, 쌀 풍년을 자랑하듯 피어난 5월의 이팝을 따라가면 1980년 5월, 민주화를 외치다 떠난 광주의 임들을 만나게 된다.
탑과 문과 부조에 새겨진 그날의 기록
민주묘지에 들어선다. 묘지 전면부에는 우람한 두 팔이 하늘을 향해 시원스레 뻗어 있다. 두 손을 포갠 듯한 형상이다. ‘가만히 손을 모으기만 해도 기도하는 것’이라던 어느 시인의 말처럼, 저 두 손은 기도하듯 합장하듯 모아져 있다. 이 두 손 사이에는 타원형의 구조물이 있는데, 부활을 상징하는 계란이다. 추모 탑 아래엔 야만의 시대가 남겨놓은 아픔이 누워 있다. “기억하지 않는 역사는 반복된다”고 외쳤건만, 이 기억마저 지우려 했던 어리석은 이들의 면면이 지나간다.
1980년 민주화를 갈망하는 열망이 전국을 강타하던 시절, 다시 군인이 권력을 잡으려 한다는 것을 직감한 이들의 항전은 계속되었다. 광주도 그 중심에 있었다. 한데 잠시의 소강상태를 틈타 계엄령이 선포되고 광주에 계엄군이 들어왔다. 이들은 민주화 운동의 핵심 공간 중 하나인 전남대학교 캠퍼스를 차지했다. 5월 18일 학생들은 학교로 들어가고자 계엄군과 대치했고, 싸움이 벌어졌다. 학생들과 시민들을 폭도로 규정한 계엄군은 무자비했다.
이러한 항전 속에서 학생들은 광주의 상징인 도청 앞으로 몰려가 시민들과 함께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를 지속했다. ‘화려한 휴가’라는 작전명을 받고 진입한 계엄군은 유혈 진압을 서슴지 않고 발포했지만, 군부 독재를 종식하고자 하는 시민들을 꺾을 수 없었다.
도청을 탈환하고 시민들만의 대동세상을 만들었다. 하지만 중무장한 계엄군은 다시 재진입해 10일간 민주화와 통일을 갈망하는 시민들의 영혼을 거두어갔다. 항쟁 기간에 도처에서는 암매장이 이뤄졌고, 수습된 시신은 쓰레기차에 실려 바로 망월동에 매장되었던 것이다.
피로 물든 금남로에서 시민들이 외치고 불렀던 구호와 노래의 주제는 민주화와 통일이었다. 그 항쟁 이후 권력자들은 광주의 일을 쥐도 새도 모르게 감추고자 했지만, 하늘이 알고 땅이 알고 무등산이 아는 일이었다. 광주의 참혹함이, 광주 시민의 위대함이 세상에 알려질수록 독재 권력의 설 자리는 줄어들었다.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희생한 민주영령들을 추모하는 5·18추모관.
마침내 국민의 힘으로 대통령을 직접 뽑게 되는 날이 왔고, 군사정권이 물러가고 문민정부가 들어서면서 광주 시민은 폭도가 아니었으며, 민주화 운동의 선봉장이었고, 위대한 시민이었음이 입증되었다.
그 처절했던 역사의 기록이 저 탑과 역사의 문과 부조로 새겨져 있고, 저 위대한 죽음의 행렬이 오늘 무등산을 바라보며 새로이 써나가는 대한민국의 발전상과 통일로 가는 행보에 축복을 내려주는 것이다. 조심스레 묘비명을 읽으며 거니는 민주묘지는 무섭지 않다. 이들은 진즉에 세상에 촛불을 밝혔던 우리들의 아버지이자 어머니이고 누이고 형이었으니 말이다.
광주호 호수생태원은 댐이 만들어지면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습지를 습지식물과 다양한 야생화 등을 심어 인공 공원으로 가꾼 곳이다. 바로 인접해서 우리나라 최고 민간 정원인 소쇄원이 있고, 가사문학의 대표작인 성산별곡 탄생지 별뫼와 식영정이 있다. 어찌 보면 인공이지만 천연덕스러운 면모를 갖춘 공간이 호수생태원이 아닐까 싶다.
그곳에는 수상 데크로 조성된 산책로가 있어 즐비한 버드나무가 출렁거리는 여유로움을 만끽할 수 있으며, 들어찬 물을 따라 가물치가 유영하는 모습도 볼 수 있다. 메타세쿼이아 숲길 사이에 들어서면 마치 사열을 받는 듯하다.
광주호 호수생태원의 이색적인 정원
이런 생태원 한 자락에는 두 개의 정원이 있다. 그중 하나가 정원 해우소다. 여느 시골집이나 절집에서 만날 수 있는 재래식 화장실을 재현해놓았다. 이 작품은 3대 플라워 가든쇼의 하나인 영국 첼시 플라워쇼(Chelsea Flower Show) 가든 부문에서 최고상을 받았다. 한국인의 자연관이 고스란히 녹아든 작품으로, 가장 친환경적인 한국의 분뇨 처리 방법을 세계가 인정한 것이다.
이곳에서의 해찰을 마치고 눈을 들어보면 이번에는 심상치 않은 광경이 전개된다. 언덕처럼 보이는 초병의 감시초소가 눈에 띈다. 그리고 녹슨 철길이 있고, 길바닥에는 병사들이 흘렸을 법한 군복의 단추들이 나뒹군다. 조그마한 콘크리트 의자에는 군번이 새겨진 인식표가 타일처럼 다닥다닥 붙어 있다. 그 양옆으로 철조망을 둘러 분위기가 색다른 느낌을 준다.
마치 비무장지대(DMZ)의 어느 초소 앞에 있는 듯한 두려움이 몰려와 몸서리를 치게 된다. 이 또한 영국 첼시 플라워쇼 가든 부문에서 금메달을 받은 작품이다. 작품 이름은 ‘고요한 시간 : DMZ 금지된 정원’. 1980년 5월 이 땅의 민주와 통일을 열망하던 분들의 묘소를 참배하고 나서 인접해 있는 생태원에서 만난 비무장지대는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아야 할 곳이다.
비무장을 위해 무장해야 하는 철책 밖에 있는 우리를 돌아본다. 60년 넘게 출입할 수 없는 땅, 그리고 세계 유일한 분단국가. 이 비극 앞에서 이제 다시 시작된 남북대화가 새로운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을 마음에 새겨본다.
전남 담양군 지곡리에 위치한 소쇄원.
오래된 미래 - 소쇄원 정원
소쇄원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정원이다. 그 안에 담겨 있는 뜻을 헤아리며 걷다 보면 옛 사람들의 자연관과 삶의 지혜와 마주하게 된다. 소쇄는 가지고 있는 기운이 맑고 깨끗하다는 뜻이다. 이곳 소쇄원에서는 절로 몸과 마음이 청량해지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건물 중심을 관통하는 물줄기의 청량감이 사람을 정화시켜준다.
이 공간을 조성한 소쇄옹 양산보와 그의 벗 하서 김인후는 물줄기를 중심으로 공간의 의미를 강조했다. 물이 시원하게 담장을 투과하도록 하는 한편 이곳에 문을 만들어 그 문의 이름을 오곡문이라 붙였다. 물이 다섯 번 굽이친다는 의미가 있지만, 여기엔 양산보와 김인후가 존경하는 중국 송대의 철학자인 주돈이의 무이구곡이 담겨 있다.
일곡과 구곡의 중간 단계인 오곡은 무이정사를 짓고 공부를 하던 단계를 의미한다. 하니 소쇄원은 단순한 유희의 공간이 아니라 선비들이 모여 시대를 논하고 학문을 연찬하던 공간이었음을 알 수 있다.
지붕이 볏집으로 이어져 있는 정자 소쇄정.
오곡 담장 아래에는 외나무다리가 있다. 소쇄원으로 들어왔던 이들은 이 외나무다리 앞에서 숨을 고른다. 길이는 2m, 깊이는 1m에 불과하지만 위태로운 외나무다리를 보고 있으면 숙연해진다. 이쪽의 공간과 저 건너편의 공간 자체가 완벽하게 분리된다. 내부 공간은 장엄해 그 전율에 몸서리치게 된다.
계곡을 따라가다 보면 이런 장치가 또 나온다. 단단한 암반이 욕조 형태로 파여 있는데, 이곳은 선비들이 탁족을 하던 공간이다. 그 아래로 거문고를 연주하던 자리와 누워서 달을 감상하던 자리가 있다. 물줄기가 빙빙 도는 조그마한 홈통이 하나 있는데, 때로 술잔을 주고받던 유상곡수연이다.
바로 이곳에 홈통이 파인 나무 하나가 허공을 가로지른다. 벼랑과 벼랑 사이에서 물은 끊기지만, 이 홈통 덕분에 물이 벼랑을 건너 두 개의 연못을 채우게 된다. 홈통의 물이 넘치면 그 물줄기 때문에 아래 바윗돌이 부서지면서 벼랑 곳곳에 이끼가 자란다. 가뭄이 들어도 죽지 않는 바위벽의 푸른 이끼를 자연스러운 장치로 승화한 조상들의 지혜에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소쇄원 경내 초입에는 벽오동나무가 심어져 있다. 봉황이라는 새가 깃을 들이도록 벽오동을 심은 것이다. 봉황은 아무 곳에나 나타나지 않고 나라가 태평성대를 누릴 때에야 나타나는 상상 속의 새다. 양산보는 기묘사화로 스승 조광조의 왕도정치의 이상이 무너지고 난 뒤 참혹한 나날을 함께 버텨냈던 어린 제자였다.
양산보는 세상에 나가지 않는 대신 현자들을 이 공간에 불러 공부시키는 데 여생을 바쳤다. 석천 임억령, 면양정 송순, 하서 김인후, 송강 정철, 제봉 고경명, 고봉 기대승 등 수많은 이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맑고 청정한 마음으로 봉황이 날아다는 태평연월을 갈구했던 양산보. 그의 간절한 소망은 나무와 풀로 존재한다. 광풍각과 제월당이란 이름으로도 존재한다. 세상과의 불화를 자연으로 승화해 구축한 세계다.
오곡문을 통과하면 외나무다리 아래로 소쇄원 중심부를 흐르는 오곡류라는 계류와 만난다. 유상곡수연을 즐기던 선비의 풍류를 느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