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통일의 길을 묻다

2007년 남북 정상회담 수행원으로 활동한 후 지난 10년간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평화통일에 대해 강연을 해온 배기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고문.

2007년 남북 정상회담 수행원으로 활동한 후 지난 10년간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평화통일에 대해 강연을 해온 배기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고문.

배기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고문 북한에 압축적 성장 청사진 제시해야
일괄적 · 단기적 비핵화 가능

통일은 단순히 남과 북이 합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과정이다. 2008년 통일코리아협동조합을 설립하는 등 오랫동안 통일운동을 벌여온 배기찬 국가안보전략연구원 고문(2018 남북 정상회담 자문위원)이 제시하는 ‘압축적 통일’의 길을 들어보았다.

2007년 10월 2일. 노무현 대통령과 수행원들을 태운 여러 대의 차량이 청와대에서 출발해 자유로를 지나 개성으로 향했다. 당시 나는 정상회담 수행원 역할을 했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예성강의 푸르고 깊은 강물이었다. 개성~평양 간 고속도로 주변에는 산과 마을이 보였다. 큰 나무를 모두 벤 산은 자그마한 관목(灌木)들만 있었고, 멀리 보이는 마을들은 보수되지 않아 낡아 보였다.

평양에 도착하자 한복과 양복을 차려입은 수십만 명의 시민들이 꽃술을 흔들며 우리 일행을 환영했다. 나는 인도에서 우리를 환영하는 시민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았다. 북한에서 가장 잘산다는 평양 시민조차 대부분 얼굴이 수척하고 새까맣게 탄 모습이었다. 노 대통령을 태운 차량이 문화시설인 4·25문화회관 앞에 도착했을 때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기다리고 있었다. 따가운 햇살 아래 레드카펫 위에 서 있는 김 위원장의 모습은 힘이 없고 매우 지쳐 보였다.

새 코리아, 통일 코리아

그 10년 전인 1997년 봄. 나는 미국에서 ‘북한 체제의 변화를 위한 국제 협력’을 연구하고 있었다. 학교 세미나에서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온 미국 사람들로부터 북한 사람들이 심각한 식량난에 굶어 죽어가고 있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다. 북한 젊은이들은 제대로 먹지 못해 키가 어린아이만 하고, 수십만 명의 아사자가 발생하고 있다는 얘기였다. 1982년 대학 1학년 때 통일을 위해 헌신하겠다고 결단한 후 이 길을 걸어온 나에게 당시 북한 상황은 충격이었다. 나는 연구기간을 단축해 일찍 한국으로 귀국했다. 국내 청년단체와 함께 ‘북한 동포를 위한 한 주 한 끼 금식운동’을 전개했다. 매주 금요일마다 점심을 금식하고 그 비용으로 북한 동포를 도우며, 그 시간에 북한 동포 돕기 캠페인을 벌였다.

그로부터 10년이 흐른 2007년 가을. 나는 노 대통령을 모시고 평양에 가 있었다. 남북 정상이 두 차례 만난 뒤 ‘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을 합의했다. 합의문(10·4 남북 공동선언)의 작성·발표와 설명 자료 작성작업에 참여한 나는 이 합의가 지켜진다면 10년 안에 남과 북이 ‘남북연합단계(대한민국 정부의 공식 통일 방안의 두 번째 단계)’에 진입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이명박 정부 등장 이후 지난 10년간 기존의 남북 합의는 모두 파기됐다. 북한의 핵·미사일 능력은 날로 강화됐고, 군사적 충돌이 벌어졌으며, 개성공단이 폐쇄됐다.

2008년 이후 지난 10년간 나는 전국 각지를 순회하며 시민을 대상으로 한 평화통일 강연을 펼쳤다. ‘새 코리아, 통일 코리아’를 핵심 주제로 삼았다. 통일은 단순히 남과 북이 합치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나라’를 만드는 과정이다. 북한에서 정변이 일어나거나 북한이 무너진 뒤 통일을 위해 노력할 게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에서 새로운 나라, 모든 인간이 존엄하게 살아가는 나라를 만들어가는 것이 통일 코리아를 만드는 것이다. 600년 세종대왕이 꿈꾼 ‘하늘백성(天民)의 나라’, 70년전 김구 선생이 꿈꾼 ‘성인(聖人)의 나라’, 대한민국 헌 법 제10조에 있는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누리는 나라’가 바로 새 코리아이자 통일 코리아다. 나는 우리 민족의 비전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배기찬 고문이 설립한 통일코리아협동조합에서 발간하는 계간지 ‘통일코리아’. 배기찬 고문이 설립한 통일코리아협동조합에서 발간하는 계간지 ‘통일코리아’.

“이러한 가치에 기초한 새 코리아, 통일 코리아는 더 이상 고래 싸움에 등 터지는 새우가 아니라 돌고래와 같은 나라가 될 것이다. 또한 주변 강대국의 원심력에 사분오열되는 나라가 아니라 사두마차에 올라탄 기수와 같은 나라가 될 것이다. 지난 150년간 동아시아 전쟁의 진원지였던 코리아가 평화의 발원지가 되는 그런 나라가 될 것이다. 코리아의 통일은 동아시아를 통일하고 세계를 통일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이것이 우리의 간절하고 생생한 꿈이다.”

이러한 비전을 이루려면 5000만 대한민국 국민이 힘을 모아야 한다. 좌와 우, 동과 서, 여와 야를 구분할 것 없이 힘을 모아야 오늘날의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 미·중·일·러 강대국이 자국 중심의 제국적 정체성을 강화하고, 남과 북 사이에 적대와 증오가 만연한 상황에서 국민마저 분열된다면 결코 영구 분단과 전쟁 위기를 극복할 수 없다. 특히 대통령을 비롯한 중앙정부뿐만 아니라 지방정부(광역, 기초, 교육청 등)와 민간이 삼두마차가 되어 남북 간의 협력과 평화통일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

압축적 체제 인정, 압축적 평화, 압축적 성장

2007년 남북관계가 급속히 발전할 때 나는 중앙정부가 남북관계를 독점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10·4 선언에 따라 남북관계가 발전하면 수많은 지방자치단체가 대북 협력사업을 전개하려 할 것이다. 남북 지방 단체들 간의 협력을 위한 원칙과 지침이 없다면 자칫 평양 등 일부 지역에 편중되거나 무질서하게 전개될 수 있다. 남북 지역이 체계적이고 질서 있으면서 편중되지 않게 협력할 수 있는 방법을 고민했고, 남북 지역을 일관된 원칙에 따라 1 대 1로 연합(결연)하는 방법을 찾아냈다.

남과 북, 각 지역의 역사성과 접근성 그리고 산업적 유사성 등을 모두 고려하면 휴전선을 기준으로 한반도 지도를 반으로 접었을 때 남북이 서로 만나는 지역이 협력 파트너가 된다. 휴전선 아래 남강원도는 북강원도와 연합하고, 강원도 아래 위치한 대구·경북은 북강원도 위에 위치한 함흥·함남과 결연한다. 경남·부산·울산은 함북·청진·나선, 한라산이 있는 제주도는 백두산이 있는 양강도, 전남·광주는 평북·신의주, 전북은 자강도, 충남은 황해남도, 충북은 황해북도, 서울은 평양, 수도권인 경기는 북한 수도권인 평안남도다.

2007년 광역 단위 연합(결연)을 추진한 후 2010년에는 시·군 등 기초자치단체 단위로 연합하는 구상을 마련했다. 그리고 이것을 손수건에 새겨 시민들에게 배포했다.

사단법인 희망레일이 주관한 행사에서 배기찬 고문이 ‘기다리다 목빠진 역장’으로 변신한 모습. 사단법인 희망레일이 주관한 행사에서 배기찬 고문이 ‘기다리다 목빠진 역장’으로 변신한 모습.

2013년 나는 ‘이미 온 통일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임인 통일코리아협동조합을 설립하고 이 단체의 이사장이 됐다. 계간지 ‘통일코리아’와 인터넷 신문 ‘유코리아뉴스’를 만들어 통일에 대한 국민들의 인식을 고취시켰다. 국토 분단 70주년이던 2015년에는 전국 순회강연을 시작했다. ‘새 코리아, 통일 코리아’를 외치는 한편 지역별 연합을 이야기했다. 북한의 파트너 지역을 염두에 두고 지금부터 교류협력을 준비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4월 정상회담은 역대 정부의 합의를 압축적으로 계승해 발전시켜야 한다. 7·4 남북 공동성명(1972), 남북 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1992), 6·15 남북 공동선언(2000), 10·4 남북 공동선언(남북관계 발전과 평화 번영을 위한 선언, 2007) 등이 남북관계 발전의 토대다. 이들 합의문의 공통점은 남과 북이 서로의 체제를 인정하고 존중하며, 그 위에서 평화를 이루고 번영을 도모하며, 우리 민족이 힘을 합쳐 자주적이고 점진적으로 통일을 이뤄간다는 것이다.

북핵 문제 해결을 위한 해법도 밑그림이 그려진 상태다. 역대 북·미 간 합의는 제네바 합의(1994)와 북·미 공동 코뮈니케(2000) 그리고 미국과 북한이 참여해 6자회담이 이뤄진 9·19 공동성명(2005)이다. 이들 합의문은 북한이 핵과 장거리 미사일을 포기하는 대신 미국과 북한이 적대관계를 종식하고, 국교를 수립하며, 평화 체제를 수립한다고 밝히고 있다. 국제사회가 대북제재를 해제하고 경제 지원으로 북한 경제가 발전할 수 있도록 한다는 내용도 언급돼 있다.

핵·미사일을 포함한 북한 문제는 결국 ‘북한과 미국’, ‘북한과 남한’이라는 두 개의 관계를 풀어야만 해결된다. 3월 5일 대북특사단이 김정은 국무위원장을 만나 합의한 내용은 “북한의 체제 안전이 보장된다면 핵을 보유할 이유가 없다”라는 것이다. 3월 26일 김 위원장은 시진핑 중국 주석과의 회담에서 “남조선과 미국이 선의로 우리의 노력에 답해와서 평화·안정의 분위기를 만들고 평화 실현을 위해 단계적, 동보(동시)적 조치를 취한다면 (한)반도 비핵화 문제는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결국 북한은 체제 보장과 비핵화를 ‘단 계적이고 동시적’으로 진행하자고 주장한다. 이에 우리는 ‘일괄 타결과 단계적 실행’을 주장하고, 미국은 ‘일괄적이고 단기적’인 해법을 추구한다.

여기서 우리는 동시적, 단계적, 단기적이라는 시간과 관련해서 ‘압축’이라는 개념을 고려할 수 있다. 체제 보장 내용과 관련해선 ‘체제 인정을 통한 평화와 성장’을 제시할 수 있다. 즉 압축적 비핵화와 압축적 평화, 압축적 상호 인정과 압축적 성장이라는 개념이다.

청소년을 대상으로 평화통일에 대해 강연하는 배기찬 고문. 청소년을 대상으로 평화통일에 대해 강연하는 배기찬 고문.

비핵화 단계 압축하려면…

4월 27일 남북 정상회담과 5월로 예측되는 북·미 정상회담의 공통 주제는 결국 ‘압축적 체제 인정’과 ‘압축적 평화’ 그리고 ‘압축적 성장’이다. 북한은 핵·미사일 개발, 즉 체제 안전을 위해 오랫동안 경제적으로 어려움을 겪어왔다. 북한이 ‘비핵화의 단계’를 압축하게끔 끌어내려면 ‘체제 인정과 평화와 성장의 프로세스’ 역시 압축해야 한다.

북한이 1단계 핵·미사일의 질적 동결(실험 중단), 2단계 핵·미사일 양적 동결(공장 폐쇄), 3단계 핵·미사일의 공동 관리, 4단계 핵·미사일 완전 폐기를 압축적으로 이룰 수 있도록 남북이 기존 합의를 존중해 평화 공존을 제도화하고, 북한과 미국이 국교를 수립하며, 정전 체제를 평화 체제로 전환해야 한다.

아울러 김 위원장에게 북한이 압축적이고 비약적으로 성장할 수 있다는 청사진을 보여줄 때 비로소 일괄적이고 단계적이며 단기적인 비핵화가 추진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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