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이라는 것이 있을까? 역사는 민족의 존재 유무를 떠나 민족이라는 이름을 앞세운 이데올로기의 부정적 효과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고 말해왔다. 근대사회에서 강력하게 작동한 민족주의 대부분은 타자에 대한 폭력과 배제로 이어진 바 있기 때문이다. 물론 식민을 거친 상당수의 피식민자들은 민족주의에 기대어 자신들의 정체성을 강화하고, 식민자의 수탈에 반기를 들어 독립을 쟁취하기도 했다. 하지만 민족은 그 거대한 범주 아래 있는 각 개인의 차이와 특성까지 억압하는 기제로 작동하거나 민족 밖에 존재하는 난민, 외국인, 소수자 등을 구별해내는 결과를 초래했다.
다문화 사회로 진입한 지 이미 오래된 한국 사회에서 민족이라는 용어는 그만큼 생소할 수 밖에 없다. 지난 평창동계올림픽에서 갑작스레 구성된 남북 단일팀에 대해 상당수의 국민이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했는데, 그 근간에는 사람들의 마음속에서 ‘민족’만을 앞세우는 것이 그리 큰 감흥이 되지 못했음을 의미한다. 게다가 지난 십여 년간 계속돼온 남북의 대치 상황과 이에 따른 북한에 대한 반감이 강화되면서 남북이 같은 ‘민족’임을 실감할 수 있는 기회 또한 극히 제한된 것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만큼 한반도에서의 ‘민족’이라는 것은 마치 사라지는듯 했다.
하지만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남과 북이 다시 조금씩 교류와 만남을 계속해나가면서 북에 있는 ‘사람’들이 우리와 참 많이 닮았다는 것을 확인하게 되었다. 남북의 문화예술인이 만나 함께 춤추고 노래할 때 여타 다른 공연을 볼 때와는 다른 진한 감흥이 존재하며, 그 공연에 참여한 예술인들도 알 수 없는 감정에 휩싸여 눈물을 흘린 것이 말해주듯 말이다. 어쩌면 같은 언어와 비슷한 문화를 공유해온 남북의 사람들은 ‘민족’적 감각과 감정을 마음속 깊이 간직해 왔으며, 그것은 세대를 넘어 전수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이토록 쉬운 것을 이제야’
지난 4월 27일 남북의 정상이 세 번째로 마주 앉아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에 대해서 논의하면서 ‘판문점 선언’을 공표했다. 핵과 미사일, 역사상 가장 강력하다는 대북제재 등 수많은 갈등과 대립의 파고를 넘어 드디어 두 정상이 만나 일정 부분 합의에 이른 것이다. 군사분계선을 가운데 두고 손을 맞잡은 그들이 지금까지 한반도를 두 동강 내온 경계선을 오가는 것을 보면서 눈시울이 뜨거워진 사람이 어디 한두 명일까. ‘이토록 쉬운 것을 이제야’라는 탄식과 함께 ‘저 아무것도 아닌 경계선을 그리도 두려워하며 살아왔구나’ 하는 깨달음에 다다르기까지 한다.
그뿐만이 아니다. 남북의 정상 또한 단순히 적대해온 국가의 수장이 화해와 평화를 논의하는 것과는 질적으로 다른 깊은 감정적 교류를 나눈 것으로 보인다. 그것이 ‘민족’이라는 것인지는 정확히 판단하기는 어렵지만, 적어도 남북 사이에는 쉽게 끊어질 수 없는 연결선이 심연에 깊게 자리하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한반도는 근대국가가 성립된 이래로 ‘한민족끼리’ 자신들의 역사를 만들어갈 수 없는 상황에 놓여왔다. 수많은 독립운동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결국 일본 식민의 역사는 미국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자폭탄 투하로 종결됐으며 연이은 미국과 소련의 분할 통치, 6·25전쟁,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되고 있는 정전 체제까지 동북아시아의 복잡한 국제정치 질서가 그대로 투영돼 있는 것이 바로 한반도의 분단이기 때문이다.
한반도를 둘러싸고 있는 강대국들은 자신들의 이해관계에 따라 분단을 ‘관리’하는 데 중점을 두었지, 결코 분단된 남과 북이 하나가 되는 것 에는 관심이 없었다. 게다가 분단에 기대어 권력을 얻은 남과 북의 기득권 세력은 말로는 ‘통일’을 외치고 있지만, 속마음에서는 분단 종식을 결코 원하지 않았던 것이 지금까지의 한반도의 역사임에 분명하다.
폭력적인 분단 체제 아래에서 고통 받는 것은 남북의 사람들이었음에도, 분단 이데올로기는 우리 모두의 눈을 가려 분단 너머를 상상하지 못하게 했다. 서로에 대한 알 수 없는 적대감과 경계심, 분단이라는 비정상적인 상태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게 하는 분단 이데올로기의 작동, 거기에 신앙심에 비견될 수 있는 한미동맹에 대한 지나친 맹신 등이 뒤엉켜 분단을 유지하고 강화해왔던 것이다.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담을 기점으로 남북은 대결과 긴장을 종식하고 한반도의 평화 정착을 위해 전면적인 협력을 해나갈 것을 약속했다. ‘판문점 선언’에서 밝히고 있듯이 “우리 민족의 운명은 우리 스스로 결정한다”는 민족 자주의 원칙을 재차 확인했으며, 이를 바탕으로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 서로 노력하기로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남북은 고위급회담을 비롯한 정부간 대화를 이어가고, 동시에 민간 교류와 협력을 진행하기로 했다. 더 나아가 개성에는 양쪽 의 당국자가 상주하는 남북공동연락사무소를 설치하기로 합의하면서 이제 남북 사이에는 상시적으로 소통할 수 있는 채널이 구축됐다
또한 계속돼온 군사적 긴장을 완화하기 위해 모든 공간에서의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서해북방한계선 일대를 평화수역으로 만들어 우발적인 군사적 충돌을 사전에 방지하기로 했다. 지금까지 주변국의 정세에 따라 혹은 국내외 정치적 환경 변화에 따라 대립과 대치를 계속해 온 남북이 좀 더 체계적으로 긴장을 완화하기 위한 방안을 마련한 것이다. 만약 어떠한 우발적 상황이 만들어지더라도, 상시적인 대화 채널이 존재한다면 분명 불필요한 충돌은 막아낼 수 있을 것이며, 좀 더 많은 교류와 협력은 결국 남북 사이의 이질감을 줄이고 동질감을 강화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할 것이다.
2018 남북 정상회담이 열린 4월 27일 경기 파주시 판문점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북한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사열을 하고 있다.
물론 여전히 ‘한민족끼리’ 할 수 있는 것은 제한적이다. 한반도의 평화 안착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비핵화의 문제는 결국 남북 간의 합의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판문점 선언’의 말미에서 남북이 “한반도 비핵 화를 위한 국제사회의 지지와 협력을 위해 적극 노력”하기로 합의한 것은 비핵화의 주요 주체가 남북에서 머물지 않음을 의미한다. 경제적으로나 군사적으로 심각한 열세에 봉착한 북한이 핵무기 개발을 통해 미국으로부터 체제 안전을 보장받기 위한 것이 북한 핵의 역사라고 할 때, 결국 한반도의 비핵화 문제는 미국과의 협상 에서 결정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남북 정상이 합의한 종전과 평화 체제 구축 또한 미국과 중국의 협력 없이는 제도적으로 가능하지 않다. 특히 지금껏 남북 분단의 제도 적 장치였던 ‘정전 체제’는 1953년 7월 27일 체결될 당시 그 협정의 당사자가 유엔과 북한 그리고 중공이었기 때문에 남북 사이에 아무리 종전을 선언하고 정전 체제 종식을 합의한다고 해도 국제법상의 효력을 얻기 어렵다. 문재인 대통령이 자신의 역할을 북·미 대화를 위한 ‘길잡이’로 표현한 것이 바로 이런 맥락 때문이다
그렇다면 관건은 앞으로의 북·미 대화의 성공 여부다. 한반도의 비핵화와 평화 체제는 결국 북한이 핵을 포기하고, 미국은 북한 체제를 보장해주는 것의 맞교환의 과정이 될 것이다. 물론 그 과정에서 불신의 벽이 높은 북·미 사이에는 상당한 진통이 예견된다. 미국은 지금까지 줄곧 완전하고, 검증 가능하며, 불가역적인(CVID · Complete, Verifiable, Irreversible Dismantlement) 북핵 폐기를 요구해왔고, 북한은 단계적 핵 폐기와 함께 북·미 수교 등 외교 관계를 공식화함으로써 북·미 간의 상호불가침 조약과 북한 체제 안전을 보장할 것을 주장하고 있다.
문재인 대통령과 부인 김정숙 여사, 김정은 국무위원장과 부인 리설주 여사가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환담하고 있다.
한반도 평화 정착 위한 주춧돌
결국 북·미 간 입장 차이의 근간은 핵과 체제 안전 보장 중 무엇을 먼저 실행할 것인가의 문제와 상호 간의 합의사항을 되돌리지 못할 만큼의 국제적 합의가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로 압축되는 듯하다. 서로 불신하고 있는 미국과 북한이 과연 이러한 입장 차를 좁힐 수 있을지, 특히 제네바협약이 파기된 경험이 있는 북한이 다시금 미국의 약속만을 믿고 핵 폐기를 이행할지는 여전히 미지수이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과 ‘판문점 선언’이 중요한 진전을 이뤄냈음에도, 한반도에서의 평화 정착을 위해서는 앞으로의 북·미 회담이 결정적 분수령이 될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만큼 이번 남북 정상회담은 한반도 평화 정착을 위한 주춧돌의 성격이 짙다. 제도적이며 체계적인 평화 구축을 위한 하나의 작은 시작점을 만들어냈다는 말이다. 그동안 거친 말을 일삼아온 양쪽 정상이 만나 손을 잡고 서로 부둥켜안았다는 것만으로도 큰 의미가 있다.
서로 협력하고 소통하는 남북은 이제 한반도의 주변국에서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로 탈바꿈하고 있다. 상시적으로 소통하며 한반도 평화라는 공동의 가치를 추구하고 있는 ‘하나’의 민족은 적어도 다시금 대결과 충돌의 시간으로 돌아가지 않으리라 다짐하고 있다.
그것만으로도 작금의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정치의 동학에 균열을 만들어내는 작은 동력이 된다. 남북이 만나, 사실은 함께 했었어야 했다고, 그리고 이제는 조금씩 함께 만들어가자는 그 다짐만으로도 지금껏 남북을 가로막아온 경계를 넘어 평화와 화합의 새로운 역사 쓰기를 시작할 수 있다. 평화를 향한 한반도의 위대한 여정은 이제부터다.
북한대학원대학교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