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 광주 남한산성
포곡식 산성의 전형이자
삼배구고두의 치욕을 안긴 땅
유네스코는 인류의 보편적 가치를 지닌 자연유산과 문화유산을 발굴·보호·보존하기 위해 1972년에 ‘세계 문화 및 자연유산 보호협약’을 채택했다. 우리나라는 1995년 석굴암·불국사, 종묘, 해인사 장경판전 등재를 시작으로 모두 12점의 세계유산을 보유하고 있다. 이들 유산을 차례대로 소개한다. <편집자>
| 양영훈 여행작가 |
남한산성은 북한산성과 함께 한양 도성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였고, 나라의 존망을 좌우하는 마지막 보루였다. 특히 조선 16대 임금 인조에게는 축성과 몽진(蒙塵), 항전을 모두 겪었던 아주 각별한 곳이었다. 요즘에도 “남한산성”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인조와 병자호란을 먼저 떠올린다.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강화도로 건너가지 못한 인조는 급히 남한산성으로 발길을 돌렸다. 당시 성 안에는 군사 1만3000여 명과 최대 50일쯤의 식량이 준비돼 있었다. 남문을 통해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는 성문을 굳게 닫고 항전했지만 결국 45일 만에 항복했다.
1637년 1월 30일, 인조 임금은 남한산성의 서문을 나와 삼전도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청 태종 앞에 무릎을 꿇고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찧은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예를 올리며 치욕적인 항복 의식을 치렀다. 당시 인조를 무릎 꿇게 한 것은 청나라 군대가 아니었다. 지독한 추위와 굶주림이었다.
남한산성은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인근 위례성에 도읍을 정한 백제 온조왕이 처음 축성한 이후로 한 번도 함락된 적이 없다. 고려시대에는 몽골군의 침입도 막아냈다. 해발 400∼500m대의 산등성이에 둘러쳐진 12km 길이의 성벽 안팎은 전혀 다른 느낌을 준다. 안쪽은 완만하고 순한 반면, 성벽 바깥은 범접하기 어려울 만큼 가파르고 위압적이다.
남한산성은 전시에만 활용됐던 방어요새가 아니다.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은 산성도시였다. 평시에도 백성과 관리, 병사와 승려가 함께 살던 터전이었다. 병자호란 당시에도 4000여 명이 생활하고 있었다. 성 안에는 왕의 임시 거처인 행궁(사적 제480호)도 들어서 있었다. 조선시대 20여 곳의 행궁 가운데 유일하게 종묘와 사직을 모두 갖췄다.
옛 광주군청도 1917년에 경안리(지금의 광주시 경안동)로 이전되기 전까지 10년 동안 이곳에 있었다. 이처럼 많은 사람들이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풍부한 물 덕분이었다. 무려 80개의 우물과 45개의 샘터가 있었다고 한다.
남한산성은 행정구역상 경기 광주시 남한산성면(옛 중부면) 산성리에 위치한다. 1963년에는 국가사적 제57호, 1971년에는 경기도의 도립공원으로 지정됐다. 2014년에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남한산성의 성곽 길이는 총 11.7㎞에 이른다. 그중 본성은 9㎞, 나머지 2.7㎞는 외성이다. 주봉인 청량산(497.9m)을 중심으로 북쪽의 연주봉(467.6m), 동쪽의 망월봉(502m)과 벌봉(515m), 남쪽의 이름 없는 봉우리 몇 개를 연결해서 쌓았다.
<고려사>와 <세종실록지리지>에는 백제를 건국한 ‘온조왕 13년(서기전 6)에 산성을 쌓고 남한산성이라 부른 것이 처음’이라고 기록돼 있다. 그 뒤로 신라 문무왕, 조선 선조와 광해군 등의 재위 때에 개축했다고 전해온다. 그러다 인조를 공주 공산성까지 피신케 한 이괄의 난을 계기로 인조 2년(1624)부터 2년 동안 대대적으로 개축해 오늘날의 남한산성이 되었다.
남한산성은 전형적인 포곡식(包谷式 : 골짜기를 포함한 축성 방식) 산성이다. 성 안에 골짜기가 있어 물 걱정이 없는 성이다. 높고 긴 성곽은 자연적인 지형과 지세를 거스르지 않고 완만하게 오르내리거나 구불거린다. 그 성곽을 따라가는 길이 아주 상쾌하다. 걷는 내내 마음도 발걸음도 날아갈 듯 가뿐하다.
남한산성에는 동서남북 네 곳에 성문이 있다. 성곽을 따라서 한 바퀴 도는 일주 트레킹은 서문에서 시작하는 것이 좋다. 서울 지하철 5호선 마천역과 가까운 데다 황홀한 해넘이와 서울 야경을 감상하며 트레킹의 대미를 장식할 수 있다.
‘우익문(右翼門)’으로도 불리는 서문은 남한산성에서 가장 전망이 좋다. 서울 한복판을 굽이쳐 흐르는 한강과 서울 시내를 병풍처럼 에워싼 북악산, 인왕산, 관악산, 북한산 등이 한눈에 들어온다. 시야가 좋은 날에는 봉긋한 남산 너머로 인천 앞바다가 은빛 비늘처럼 반짝거린다. 여기서 바라보는 해넘이와 서울 야경은 오래도록 잊히지 않을 장관이다.
남한산성은 숲이 좋다. 남문에서 서문을 거쳐 북문에 이르는 탐방로 주변에는 아름드리 소나무가 울창하다. 길을 걷는 내내 솔숲 특유의 청신한 기운이 머릿속까지 맑게 해준다. 북문(전승문)을 지나면 사람 발길이 부쩍 줄어든다. 때때로 적막강산 같아서 사색하며 걷기에 아주 좋다.
동장대 옛터와 동문 사이에는 장경사 신지옹성(長慶寺 信地壅城)과 장경사가 있다. 옹성은 성벽을 기어오르려는 적을 측면에서 공격해 성문을 보호하는 방어시설이다. 본성의 성벽 아래에는 은밀히 옹성으로 통하는 암문(暗門)이 설치돼 있다.
장경사는 고즈넉함과 호젓함이 돋보이는 사찰이다. 인조 때 남한산성 개축 공사를 전담한 팔도 승병들의 거처로 활용하기 위해 장경사와 국청사, 개원사, 한흥사, 동림사, 천주사, 남단사를 새로 지었다. 신라시대에 창건된 망월사와 옥정사까지 포함해 모두 9개 사찰이 승병들의 거처로 쓰였다. 공사가 끝난 뒤에도 승병들은 성곽 방어에 필요한 훈련을 받으며 성 내의 사찰에 머물렀다.
남한산성 내의 9개 사찰 가운데 지금까지 온전하게 보존된 곳은 장경사뿐이다. 서문 근처의 국청사는 일제에 의해 파괴됐다가 1968년에 중창되었다. 남한산성의 제일 명당 터를 차지했다는 장경사는 6·25전쟁을 비롯한 전란 속에서도 거의 피해를 보지 않고 건재할 수 있었다.
장경사를 지나면 금세 동문에 도착한다. 몹시 가파른 산비탈에 세워진 동문 옆으로는 남한산성을 관통하는 산성로(342번 지방도)가 지난다. 고즈넉한 숲길을 걸어오다가 갑작스레 만나는 자동차들의 소음이 낯설게 느껴진다.
동문과 남문 사이의 1.7km 구간에는 다섯 개의 암문과 세 개의 옹성이 있다. ‘지화문’으로 불리는 남문은 남한산성의 4대문 가운데 가장 크고 웅장한 중심 문이다. 남문에서 비탈진 오르막길을 0.9km 오르면 수어장대에 도착한다.
병자호란 당시 총지휘부가 자리했던 곳이다. 남한산성의 4장대 중 유일하게 남았다. 청량산 정상(482m)에 자리 잡고 있어서 성내뿐만 아니라 인근의 서울, 양주, 양평, 용인, 고양, 북한산 등이 모두 시야에 들어온다.
수어장대에서 0.6km를 더 가면 출발지였던 서문에 도착한다. 일부러 해질 녘에 맞췄다면 멋진 해넘이와 야경을 기대해 볼 만하다. 설령 날씨가 좋지 않아서 해넘이를 보지 못해도 아쉬움은 없다. 이곳에
서 바라보는 일망무제(一望無際)의 서울 전경은 화려한 해넘이와 저녁노을보다도 긴 여운을 가슴에 안긴다.
여행 정보
숙식
국가 지정 문화재인 남한산성(산성리) 내에서는 호텔, 모텔, 리조트 등의 대규모 숙박업소는 운영할 수 없다고 한다. 농가 민박만 가능해서 한옥 체험(010-9783-5664) 민박이 1곳 있다.
산성리에는 완도집(031-746-7127), 산성대가(031-743-6559) 등 60여 곳의 닭요리 전문점이 성업 중이다. 어른 3, 4명분의 닭볶음탕이 5만 원, 백숙이 5만5000원 선이다. 집집마다 메뉴와 맛과 값의 차이가 크지 않다.
로터리 근처의 고향산천(031-742-7583)도 닭요리 전문점 중 하나지만, 남한산성마을의 전승음식인 효종갱(曉鐘羹)도 맛볼 수 있는 집이다. 효종갱은 ‘새벽종이 울릴 때 먹는 국’이라는 뜻으로 송이, 표고버섯, 소갈비, 해삼, 전복 등을 넣고 끓인 ‘양반 해장국’이다. 그밖에 백제장(산채정식·숯불불고기, 031-746-4296), 오복순두부(순두부·두부전골, 031-746-3567), 산성손두부(손두부, 031-749-4763), 반월정(산채정식, 031-743-6562) 등도 소문난 맛집이다.
찾아가기
대중교통 서울 지하철 5호선의 마천역 1번 출구에서 남한산성 서문까지는 등산로를 따라 1시간쯤 걸린다. 8호선 산성역의 2번 출구에서 정차하는 52번 버스 종점이 남한산성 로터리이다 .
승용차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송파나들목(342번 지방도)→산성역 사거리(좌회전)→남한산성
입구 삼거리(좌회전)→산성터널→남한산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