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27 판문점 선언이 이루어진 장소인 평화의 집.
그 땅은 바람만이 자유로운 곳이라고 했다. 비무장지대 DMZ. 무장은 안 되어 있다 하나, 한반도에서 가장 위태로운 땅이다. 누구도 함부로 들어갈 수 없고, 지나는 들짐승도 매복된 지뢰를 만나면 숨이 끊어진다. 남북 간에 갈등의 온도가 높아지면 이곳이 제일 먼저 위기를 느낀다. 이런 화약고 같은 DMZ에 숨통을 틔워주는 숨구멍 역할을 하는 곳이 하나 있다. 공동경비구역 JSA(Joint Security Area)다. 흔히 ‘판문점’이라고 불리는 곳이다.
판문점 길목에 위치한 통일대교.
더러는 남과 북의 약속이 어기어져 총성이 울리기도 했고, 억울하고 아까운 피가 땅을 적시기도 했지만, 올해 봄에는 그 어느 해보다 따뜻한 훈풍이 불었다. 4월 27일 판문점에서 열린 남북 정상회담. 북의 최고지도자가 최초로 대한민국 땅을 밟았다. 65년간의 ‘휴전 상황’을 종료하고 전쟁을 완전히 끝내자는 ‘종전’이 이야기되었다. 전 세계의 관심과 이목이 이곳을 뜨겁게 달궜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T2(군사정전위원회 회의실) 건물의 내부 모습. 중앙 책상에 놓인 마이크 선이 정확히 군사분계선(MDL) 위에 설치돼 있다. 선 뒤편으로는 북측 영토다.
작은 주막이 있던 마을 널문리
‘판문점’이라는 이름은 전쟁이 낳은 것이었다. 1951년 10월, 휴전협상 장소로 경기도 장단군 널문리가 물망에 오르면서다. 애초 유엔군과 북한, 중국은 개성에서 휴전을 협상하기 시작했으나, 북한 내부의 지역이었기에 중립성 문제가 제기됐다. 그 대신 택한 장소가 남과 북의 경계선상에 있는 마을, 널문리였다.
‘널빤지로 만든 문이 있는 마을’. 사천강에 널빤지 다리가 있어 지어진 이름이라고도 전해지고, 임금이 강을 건너려 할 때 마을 사람들이 대문을 뜯어다 다리를 놓아서 비롯된 이름이라고도 한다. 회담 장소로 꼽혔을 당시는 그저 초가 세 채와 주막 한 채가 덩그러니 놓인 작은 동리였다. 지역주민들은 “협정이 진행될 동안 한 달 정도만 마을을 떠나 있어달라”는 말을 듣고 간단한 옷가지만 들고 가벼이 집을 비웠다. 그렇게 잠깐 비우려 했던 집에 지금껏 돌아가지 못하고 있다.
마을에 그간 없던 한자 이름이 새로 붙었다. 회담 장소를 찾을 중국군의 편의를 위해서였다. ‘널빤지 판(板), 문 문(門)’자의 ‘판문’에 주막이라는 뜻의 ‘점(店)’자를 붙였다. 그렇게 ‘판문점’이 되었다. 그리고 65년 동안 많은 일이 이곳에서 일어났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됐다. 같은 해 8월 남북 포로교환이 이뤄졌다. 1976년 미루나무 가지치기를 하는 미군과 국군을 살해한 ‘도끼 만행사건’이 벌어졌다. 이 때문에 이전까지 경계선 없이 말 그대로 남북이 ‘공동경비’를 하던 JSA 안에도 군사분계선이 그어지게 됐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군법당인 무량수전(오른쪽 건물)과 평화의 종.
이곳을 통해 1989년 북한이 개최한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참가한 임수경이 걸어 돌아왔다. 1998년 정주영 전 현대그룹 회장이 1001마리의 소떼를 끌고 북으로 갔다. 목숨을 걸고 금지된 경계선을 넘어서 북한군 병사가, 소련인 관광객들이, 소련 기자가 망명했다
판문점은 갈등을 조정하는 협상의 공간이기도 했다. 1968년 북한에 나포된 푸에블로호 선원들의 송환 협상이 이곳에서 이뤄졌고, 이곳을 통해 송환됐다. 1971년 남북 적십자회담 준비 접촉도 여기서 처음 이뤄졌다. 이후 1990년대부터 남북 고위급회담을 위한 실무 접촉이 숱하게 진행됐고, 2018년 남북 정상회담 실무 준비가 꾸려졌다. 그 결실로 피어난 가장 큰 꽃이 바로 지난 4월 27일의 남북 정상회담이었다. 65년 전 작은 주막이었던 이곳에서 두 정상을 비롯한 남과 북 사람들이 권커니 받거니 문배주를 나눠 마셨다.
한반도서 가장 높게 국기들이 서 있는 곳
멈추어선 시계 바늘을 제 속도로 움직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할 듯싶다. 이곳은 아직, 제약이 많이 따르는 공간이다. 판문점은 일반인 단체 관람이 가능한 곳이긴 하다. 국가정보원 판문점 견학 안내 홈페이지를 통해 희망일로부터 60일 전 신청하면 관람할 수 있다. 하지만 지금은 관람 대기자가 대폭 밀린 상태다. 남북 정상회담 후 판문점이 세계적 ‘핫 스팟’으로 떠오르면서 관람 신청이 쇄도했기 때문이다.
긴 기다림 끝에 JSA에 들어서서도 ‘해서는 안 되는 금기사항’이 많다. 역내에서는 주어진 차량을 이용하는 것 외에 통행이 금지돼 있다. 차량 안에서 관람자들을 안내하는 헌병이 여러 가지 주의를 준다.
“아무 곳이나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됩니다. 북쪽 땅과 건물을 촬영하는 것은 허락되나, 남측 시설은 촬영이 허락된 곳만 찍을 수 있습니다. 북쪽에서 사람이 보인다 하여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서도 안 됩니다.”
현장 답사 전 JSA 내 안보관에서 간단한 슬라이드 교육이 먼저 진행된다. 판문점의 내력과 한반도에서의 의미를 설명하는 내용이다. 그런데 내레이션에서 북한을 ‘북괴’라 칭하고, ‘중국’을 ‘중공’이라 표현하고 있다. 어느새 슬라이드 밖 현실은 이렇게 빠르게 변해버렸는데, 교육 프로그램이 이를 미처 쫓아가지 못하고 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찾은 방문객들이 안보교육관을 둘러보고 있다.
안보교육관으로부터 판문점까지 향하는 차량 옆으로 펼쳐지는 풍경은 평범한 농촌 들밭의 그것이다. 다만 다른 것은 태극기다. 학교 건물 위로 치솟은 국기봉이 흔한 시골 학교의 그것보다 몇 배는 높다. 들에는 높이 100m짜리 국기대도 세워져 있다. 북측에도 마찬가지로 그렇게 높은 인공기가 세워져 있다.
판문점에서 가장 상징적인 랜드마크는 T2와 T3라 불리는 낮은 하늘색 건물 사이로 보이는 판문각일 터이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은 판문각에서 나와 T2와 T3 사잇길을 통해 남쪽 땅으로 넘어와서 문재인 대통령과 악수를 나눴다. 영화 ‘공동경비구역 JSA’에서 익히 본, 남북 병사가 마주 보고 경계를 서고 있던 장소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병사들이 상시적으로 마주 서 있지 않다. 남북 각 측에서 관람객이 방문했을 때만 병사들이 나온다. 남쪽 방문객들이 T2와 T3를 찾아갔을 때, 북측의 병사들을 발견하는 것은 쉽지 않다. 일부러 남북 양측이 관람시간을 달리하여 서로 마주칠 일을 피한다.
T자는 ‘임시’라는 뜻의 ‘Temporary’를 가리키는 머릿글자. 휴전협상을 위해 천막을 세워 만든 ‘임시 회담장’이 이제는 반영구 건물로 바뀌며 65년간 쓰이고 있다. T1은 중립국감독위원회 회의실, T2는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실, T3는 군사정전위원회 소회의실이다. 그중 T2가 일반 관람객에게 개방된다. T2 건물 안에서는 군사분계선이 상징적으로만 존재한다. 회담 테이블의 마이크 너머가 실제로는 북한 땅임에도 관람객들은 그 이상의 북쪽으로 발을 디딜 수 있다. 4월 27일 문재인 대통령이 5cm 높이의 군사분계선을 넘어서 한 발짝 디뎠던 북한 땅보다 조금 더 북쪽에 서볼 수 있다.
3초소로 이동한다. 지대가 높아 북한 마을 기정동과 높이 솟은 인공기가 훤히 보인다. 기정동은 비무장지대 내 평화를 상징하기 위해 남북 합의에 의해 북측에서 조성한 마을이다. 남측에는 같은 역할을 하는 대성동 마을이 있다. 인공기 게양대의 높이는 160m. 세계에서 네 번째로 키가 크다. 날이 맑으면 기정동 뒤로 개성공단까지 보인다. 그 뒤로 송악산이 둘러쳐졌다. 민간인이 다닌다는 오솔길도 멀리 보이는데, 가끔 자전거 탄 사람이나 양을 모는 이들의 모습이 어렴풋이 눈에 띈다고 한다.
판문점 인근에서 바라본 북한 기정동 마을에 인공기가 바람에 펄럭이고 있다.
나갈 자유는 있으나 입주는 통제된 대성동
1990년대까지만 해도 JSA 여기저기서 북한군에 의한 남쪽 주민의 회유와 납치 시도가 있었다. 대성동 주민들이 그 대상이다. 대성동 주민들은 전쟁 이전부터 이곳에서 나고 자란 이들, 그리고 그 후손들이다. 주로 농사를 짓고 산다. 이곳 땅은 모두 국유지. 경작은 할 수 있지만 소유권이 없다.
상거래가 금지된 곳이기에 물건을 사려 해도, 병에 걸려 치료를 받으려 해도 외지로 나가야 한단다. 여러 가능한 위험을 감수하고 사는 삶. 그래서 세금과 병역 의무가 면제된 곳이다. 이들이 타지로 나가 사는 것은 자유지만, 타지 사람이 이곳에 들어와 살기는 어렵다. 성인 여성이 이곳 주민과 결혼을 하는 방법밖에 없다. 성인 남성의 이주는 불가능하다. 농촌 인구 감소 문제는 이곳도 마찬가지다. 출생률이 떨어지고 인구가 계속 줄어들고 있다.
재를 실은 트럭도 스쳐 지난다. 이곳 주민들에게도 삶은 여느 농촌의 그것과 별 차이가 없다. 조금 불편하고, 어쩌면 조금 더 위험할지 모를, 그런 다름이 있을 뿐이다.
지금 한반도에 불어오고 있는, 그 어느 때보다 따뜻한 바람이 조만간 이들의 삶을 지금보다 좀 더 평범한 것으로 아니, 종국에는 다른 어느 마을과 온전히 다름없는 것으로 만들어주리라. 그런 기대를 갖게 해주는 한반도의 해빙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