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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은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달래는 추모의 달에서 희망과 미래의 번영을 상징하는 평화의 달이 되어가고 있다. 사진은 경기 파주 임진각에서  재외동포재단주최로 재외동포 청소년 DMZ 자전거 평화 대행진에 앞서 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6월은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달래는 추모의 달에서 희망과 미래의 번영을 상징하는 평화의 달이 되어가고 있다. 사진은 경기 파주 임진각에서 재외동포재단 주최로 재외동포 청소년 DMZ 자전거 평화 대행진에 앞서 학생들이 기념촬영을 하는 모습.

분단에서 평화로
한반도 6월이 달라진다

한국 현대사에서 6월은 전쟁과 분단의 달로 인식돼왔다. 이제 6월은 남북 화해와 평화를 상징하는 달이 돼가고 있다.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달래는 추모의 6월에서 희망과 미래의 번영을 상징하는 평화의 6월로 만들어가자.

올해에도 어김없이 6월이 돌아왔다. 한국 현대사에서 6월은 ‘전쟁과 분단의 달’로 인식돼왔다. 현대 한국 사회의 기본 틀을 만들어낸 결정적 사건으로서의 6·25전쟁과 이 전쟁에서 희생된 이들을 추모하는 현충일이 있기 때문이다.그런데 점차 6월의 의미가 달라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987년’이라는 영화가 보여주듯이 6월 민주항쟁이나 2000년 6월의남북 정상회담의 기억은 6월의 이미지를 복합적으로 만들고 있다. 오는 6월 12일로 예정된북·미 정상회담은 이런 흐름에 결정적 영향을 미칠 수 있을까?

판문점에서 열린 지난 4월 27일의 평화의집 남북 정상회담과 소용돌이치는 반전을 보여준 5월 26일 판문각 정상회담에 이어 예정돼 있는 싱가포르 정상회담을 한국뿐 아니라 세계가 주시하고 있다. 이 회담의 결과가 과연 지구상에 남아 있는 냉전의 마지막 질곡인 한반도의 냉전·분단체제를 종식시킬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나아가 불가침협정으로까지 밀고 나갈 수 있을지, 조마조마하면서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매우 많다는 것은 그것이 곧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출발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6월이 냉전·분단 상징하게 된 까닭

오늘날 6·25전쟁의 주요 당사국들, 즉 미국이나 중국, 그리고 북한은 모두 전투가 종료되고 휴전협정이 조인된 7월 27일을 기념해왔다. 특히 북한은 이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명명했고, 1974년부터는 전쟁의 결과를 자신들의 승리로 치장하는 대규모 기념탑을 세웠으며, 근래에는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관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그러나 한국은 전쟁이 시작된 6월 25일을 기념한다. 한국 정부는 당시 ‘북진통일’을 부르짖으며, 휴전협정에 조인을 하지 않았고, 또 ‘북한의 침략’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맥락에서 7월 27일이 아닌 6월 25일을 기억하고 기념하고 있다. 그러나 6월 25일이나 7월 27일 모두 한반도의 냉전·분단체제의 지속성에 바탕을 둔 기념일들이어서, 만약 종전선언이 이뤄지거나 평화협정이 맺어진다면, 이 냉전·분단의 기념일들은 의미를 상실하고 새로운 기념일로 대체될 수밖에 없다.

6월의 이미지를 전쟁과 추모로 만들어낸 것은 현충일이라는 국가적 기념일이다. 현충일의 기원은 1956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해 4월 19일 대통령령으로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을 개정해 6월 6일을 현충기념일로 지정했는데, 이날은 24절기의 하나인 ‘망종’이었다고 알려져 있다. ‘현충’이라는 국가의례는 현충기념일이라는 시간과 국립묘지라는 공간에기초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전쟁 중이던 1952년 국방부 주관으로 국군묘지 후보지 선정을위한 작업에 착수했고, 1953년 9월 서울의 동작동 일대를 국군묘지 후보지로 선정해 이승만대통령의 재가를 받았다. 1956년 4월 13일 대통령령으로 국군묘지령이제정돼 전쟁에서 희생된 병사들이 안장됐다.

1956년 당시의 정부 지도자들의 6·25전쟁에 대한 인식을 보여주는단편적 사례가 당시 국군묘지의 지명에 담겨 있다. 동작동 현충원에 있는 제 1장병묘역과 제 2장병묘역 사이에 ‘현충천’이 흐르고 있는데, 이천을 건너는 몇 개의 작은 다리가 있다. 이 다리들은 1958년 12월에 건설됐는데, 이들의 이름이 정국교, 정난교, 수충교이다. 공교롭게도 일본 도쿄대학의 다카하시 데쓰야 교수가 <국가와 희생>이라는 책에서 ‘정국교(靖國橋)’를 주목했다. 그는 한국의 국립묘지에 어째서 정국교라는 이름의 다리가 있는지를 묻고 있다. 이 다리를 일본식으로 읽으면, ‘야스쿠니 다리’이기 때문이다.

6월은 호국·보훈뿐 아니라 민주·평화의 맥락에서의 중요한 기념일을 포함하고 있다. 6월은 호국·보훈뿐 아니라 민주·평화의 맥락에서의 중요한 기념일을 포함하고 있다.

그가 이 책을 쓸 무렵, 시카고대학의 노마 필드 교수가 나에게 그 연유를 물어 온 적이 있는데, 나는 그것이 당시 부통령 함태영의 작명이고, 그것이 <삼국사기>를 쓴 김부식의 ‘공신호’에서 연유했다고 답을 했지만, 몹시 의아하고 또 허탈했던 기억이 있다. 김부식은 묘청의 난을 진압한 공로로 수충정난정국공신(輸忠定難靖國功臣)이 됐다. 함태영 부통령은 6·25전쟁을 고려시대의 묘청의 난과 유사한 것으로 인식한 듯하다. 이것은 당시 6·25전쟁을 일종의 ‘사변’으로 인식했던 흐름과 맥을 같이한다.

현충기념일의 추모 대상은 6·25전쟁 전사자들이었는데, 1965년 3월 30일 대통령령 제2092호로 국군묘지가 국립묘지로 승격되면서부터 순국선열을 함께 추모하게 됐다. 이는 5·16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부가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전략으로 시행한 것이지만, 동시에 베트남전쟁 참전을 고려한 조치이기도 했다. 당시 일부 야당의 반대를 무릅쓰고 박정희 정부는 1964년 10월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을 단행했다.

이후 한국 정부는 1970년 1월 9일 국립묘지령 제4510호로 연 1회 현충추념식을 거행하게 됐다. 현충기념일은 통상적으로 현충일로 불리다가 1975년 12월 ‘관공서의 공휴일에 관한 규정’ 개정에 따라 공식적으로 현충일로 개칭됐으며, 1982년 5월 15일 대통령령으로 공휴일로 지정됐다.

1983년부터 현충일 추념행사를 국가보훈처가 주관하게 되면서 6월 한 달을 ‘현충일 추념행사 및 원호의 달’로 정했고, 1989년부터는 ‘현충일 및 호국보훈의 달’로 정해 각종 행사를 실시해오고 있다. 근래에 이뤄지는 ‘호국보훈의 달’ 행사에는 현충일과 6·25뿐 아니라, 2002년에 발생한 제2 연평해전 기념이 포함된다. 이런 맥락에서 6월은 국가적 추모와 냉전·분단체제의 아우라를 가장 짙게 가진 달이 됐다.

민주·평화 맥락에서의 6월

6월은 이런 호국 및 보훈뿐 아니라 민주·평화의 맥락에서의 중요한 기념일을 포함하고 있다. 1987년의 전국적인 시민항쟁은 6월을 민주주의와 밀접히 연관되는 시간으로 만들어냈다. 1960년의 4·19, 1980년 5·18과 함께 1987년 6월은 한국 민주주의를 상징하는 시간들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6월 10일은 민주화운동과 관련된 시민단체들의 중요한 기념일이 됐다.

이와 함께 6월은 남북 화해와 평화를 상징하는 달이 돼가고 있다. 2000년 6월에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됐기 때문이다. 당시 김대중 대통령과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6월 13일부터 15일까지 정상회담을 개최하고, 6·15 남북 공동선언을 했다. 당시의 선언은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염원하는 온 겨레의 숭고한 뜻’을 담은 것으로 5개 항으로 구성됐다.

1)남과 북은 나라 의 통일 문제를 그 주인인 우리 민족끼리 서로 힘을 합쳐 자주적으로 해결한다. 2)남과 북은 남측의 연합제안과 북측의 낮은 단계의 연방제안이 서로 공통성이 있다고 인정한다. 3)남과 북은 2000년 8월 15일에 즈음해 흩어진 가족, 친척 방문단을 교환하며 비전향 장기수 문제를 해결하는 등 인도적 문제를 조속히 풀어나가기로 합의한다. 4)남과 북은 경제협력을 통해 민족 경제를 균형적으로 발전시키고 사회, 문화, 체육, 보건, 환경 등 제반 분야의 협력과 교류를 활성화해 서로 신뢰를 도모한다. 5)위의 네 개항의 합의 사항을 구체적으로 이행하기 위해 남과 북의 당국이 빠른 시일 안에 관련 부서들의 후속 대화를 규정해 합의 내용의 조속한 이행을 약속한다.

공동선언 내용의 합의 과정에서 가장 많은 시간이 소요된 부분은 제2항 통일 방안이었다고 한다. 유감스럽게도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적절한 시기에 서울을 방문한다는 약속은 지켜지지 않았고, 미국의 정책이 바뀌면서 이 선언의 의미가 약화됐다.

어떤 변수가 생길지 모르지만, 역사적인 북·미 정상회담이 6월 12일 열리게 될 가능성이 크다. 이 회담은 북·미 사이에 북한의 비핵화와 체제 안전보장을 교환하는 정치적 이벤트가 될 것이 틀림없지만, 서로 간의 신뢰 수준과 교환의 균형 여부가 역사적 의미의 폭과 지속성을 결정할 것이다. 북·미 정상회담과 함께 문재인 대통령이 참여하는 3자 정상회담에서 종전선언을 하거나, 또는 시진핑 주석이 합류해 평화협정을 맺게 된다면, 6월은 한반도나 동아시아에서 특별한 시간이 될 것이다. 과연 냉전과 분단의 6월에서 화해와 평화의 6월로 변할 수 있을 것인가? 현실은 언제나 희망과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늘 희망을 따라 움직이며, 평화는 민주적 화해 의지에 기초한다.

크로노스적 시간, 카이로스적 시간

사실 모든 시간은 지속적으로 그리고 똑같은 속도로 흘러간다. ‘크로노스적 시간’이다. 그러나 인간이 만든 캘린더는 이 시간을 주기적으로 돌아오는 것으로 만들었다. 자연사적 시간 위에 서 있는 인간들은 자신들의 운명을 잊기 위해 사회적 시간을 창출했고, 여기에 자신들의 주관적 의미를 부여했다. ‘카이로스적 시간’이다.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한국은 세계적인 의미를 지닌 기념일을 갖게 될 수도 있다.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한국은 세계적인 의미를 지닌 기념일을 갖게 될 수도 있다.

현충일과 6·25 기념일 등으로 말미암아 지난 60여 년 동안 6월은 냉전과 분단을 상징하는 달로 자리 잡아왔다. 그러나 이제는 변해야 한다. 6월 12일 북·미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이뤄지면, 한국은 6·10 민주항쟁과 6·12 가칭 ‘평화의 날’, 6·15 선언 기념일 등이 연속되는 화해와 평화주간을 설정할 수 있게 되며, 이 기간에 세계적인 평화 페스티벌을 구상할 수도 있다. 최근 며칠간 한반도 평화정치의 극적인 반전들을 경험하면서, 전쟁과 분단의 아픔을 달래는 추모의 6월에서 화해와 번영을 노래하는 평화의 6월로 변화해야 한다는 소망이 더욱 간절해진다.

정근식 정 근 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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