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기행 통일 여행

제주시 봉개동 한라산 자락에 들어선 제주 4·3평화기념관.

제주시 봉개동 한라산 자락에 들어선 제주 4·3평화기념관.

분단이 남긴 상처 보듬고
화해와 통일 향해 걷는다

4월이면 곳곳에 만발한 유채꽃으로 제주는 아름답다. 하지만 그 아름다움 뒤에 핏빛 아픔이 서려 있다. 제주 4·3항쟁 70주년을 맞는 올 4월 제주에서 분단이 안긴 상처를 되새기며 화해와 통일의 의미를 되새겨보자.

아름다운 제주 산야와 해변을 붉게 물들였던 참혹한 양민 학살의 역사, 오랜 세월 동안 발설조차 금기시됐던 한과 눈물의 역사, 지금도 정명(正名)을 갖지 못한 제주 4·3의 역사는 한라의 아름다운 풍광 뒤에 숨어 허공을 떠돌고 있다. 69년 전, 우리나라 최남단의 섬 제주도에서는 군인, 경찰, 서북청년단 등 국가 공권력에 의해 수많은 제주도민들이 목숨을 잃었으며, 중산간 마을 등의 수많은 집들이 불에 타 엄청난 재산 피해를 보았다. 당시 27만의 인구 중에서 2만여 명의 제주도민이 목숨을 잃었으며, 130여 개의 마을이 잿더미가 되어 사라지고 만 것이다.

간절한 마음으로 70주년을 맞는 제주 사람들

전쟁이 아닌 상황에서 특정 지역의 인구 10%가 국가 공권력에 희생되는 경우는 세계사적으로도 찾아보기 힘들다. 제주 4·3은 제주도민들에게 큰 아픔을 주었고, 우리 현대사에서 6·25전쟁 다음으로 많은 피해를 안겨준 비극적인 사건이었다. 4·3사건으로 인적, 물적 피해 및 제주 공동체 파괴 등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시련과 고통을 겪었던 4·3 유족들과 제주도민들은 화해와 상생의 정신으로 이를 극복하고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다. 그만큼 제주도민의 고통은 지난 20세기를 관통하며 제주도민과 제주 사회에 필설로 형용할 수 없을 만큼 깊은 상처를 남겼다.

반세기를 넘는 세월을 건너 제주 4·3은 올해 70주년을 맞았다. 제주 4·3의 오늘이 있기까지 수많은 국민과 유족들의 열정적인 진상 규명운동이 있었기에 일정한 한계 속에서도 진실과 해원을 향한 빛의 역사를 새기게 된 것이다. 제주 4·3은 지난 2000년 4·3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정부 차원의 ‘4·3 진상조사보고서’ 확정, 노무현 대통령의 국가 공권력의 잘못에 대한 첫 공식 사과, 4·3 희생자와 유족 결정, 4·3평화공원과 기념관 조성, 유해 발굴, 4·3평화재단 설립 등 일정한 성과를 얻어냈다.

이제 제주 4·3은 보수와 진보의 문제를 넘어 한국 사회의 처절한 반성의 지표 위에 서 있다. 더이상 4·3의 비극적 역사 앞에 쓰러져간 희생자를 폄훼하고 유족들의 아픈 상처를 덧내려는 시도가 중단되기를 희망한다. 한국 과거사 정리의 모범으로 평가받는 4·3의 불행한 역사를 슬기롭게 극복함으로써 해원과 상생 그리고 평화로운 미래를 앞당기는 진정한 국민 화합을 이뤄내야 할 것이다.

한편 4·3항쟁 70주년은 4·3의 이념적 논쟁으로 갈등을 유발했던 분열의 시대를 마감하고 포용과 화해 정신으로 화합의 시대를 여는 출발점이 돼야 할 것이다.

고(故) 김길수의 묘비.
김길원 할머니가 돌아가신 오빠 고(故) 김길수의 묘비 앞에서 눈물을 훔치고 있다.
묘비에는 ‘6·25전쟁으로 인하여 예비검속 후 행불’이라고 적혀 있다.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제.

고통의 기억을 평화의 마당으로 ‘제주 4·3평화공원’

제주 4·3평화공원은 제주시내에서 동쪽에 위치한 봉개동 거친오름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4·3사건 발발 이후 반세기가 넘는 동안 해원되지 못한 4·3사건 희생자의 넋을 기리고 4·3의 역사적 의미를 되새겨 희생자의 명예 회복 및 평화와 인권을 위한 교육의 장으로 조성한다는 목표에 따라 제주 4·3평화공원은 탄생되었다.

그동안 3단계에 걸친 국비사업으로 위령제단, 위령탑, 추념광장, 4·3평화기념관 건립, 전시시설, 행방불명인 묘역, 4·3 희생자 각명비, 4·3유해봉안관, 상징조형물, 4·3평화교육센터 등의 시설이 완료됐다. 특히 공원의 가장 위쪽에 자리 잡은 위패봉안실에는 4·3 희생자의 위패가 마을별로 정리돼 있다. 여기에 들어서서 1만5000여 명의 희생자 이름만 보아도 4·3으로 얼마나 많은 인명 피해가 있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총 7만 평 부지에 조성된 평화공원은 4·3평화기념관이 개관함으로써 공원의 큰 얼개가 완성됐다. 또한 기념관은 공원의 핵심시설로 자리 잡아 공간 활용도를 높이는 역할을 하고 있다.

4·3평화기념관 입구인 ‘역사의 동굴’을 지나면 큼지막한 백비가 누워 있다. ‘언젠가 이 비에 제주 4·3의 이름을 새기고 일으켜 세우리라’는 안내 문구가 묵직하게 다가온다. 역사의 정명을 간절히 기원하는 것이리라. 6년여의 준비 끝에 문을 연 제주 4·3평화기념관은 4·3의 진실을 기록한 역사의 공간이다. 옥외에는 각종 편의시설과 조형물이 배치돼 관람객들에게 일상적인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4·3평화공원 내의 유일한 예술 조형물인 ‘모녀상’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토벌대의 총탄에 고통스럽게 쓰러지는 모습을 형상화해 보는 이들을 슬프게 한다.

옥외에는 각종 편의시설과 조형물이 배치돼 관람객들에게 일상적인 휴식공간을 제공하고 있다. 특히 4·3평화공원 내의 유일한 예술 조형물인 ‘모녀상’은 아이를 안은 어머니가 토벌대의 총탄에 고통스럽게 쓰러지는 모습을 형상화해 보는 이들을 슬프게 한다.

봉개동 지역에서 대대적인 토벌작전이 벌어지던 1949년 1월 6일, 변병생(당시 25세)과 그의 두 살배기 딸은 거친오름 북동쪽 지역에서 토벌대에 쫓겨 피신 도중 토벌대가 쏜 총에 맞아 숨졌다. 후일 행인에 의해 눈더미 속에서 이 모녀의 시신이 발견되었다. 이 모녀상은 당시 억울하게 희생된 이 두 생명을 기억하고자 제작됐다. 이제 4·3평화공원은 제주 4·3의 비극적 역사를 기억하고 화해와 상생의 평화 정신을 고양하며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상징적인 장소로 많은 관람객들이 찾고 있다.

제주 4·3평화공원에 있는 행방불명인 표석.
제주 4·3평화공원에 있는 행방불명인 표석. 제주 4·3평화공원 전경. 제주 4·3평화공원 전경.

피눈물로 쌓은 토벌의 전초기지 ‘수악 주둔소’

수악 주둔소로 찾아가는 길은 멀고 험하다. 남원읍 신례리 북쪽 수악 중턱에 자리 잡고 있다. 초지와 계곡, 잡목 숲을 헤치고 들어가면 고대 유적처럼 시커먼 석성이 유령처럼 버티고 서 있다. 1950년 겨울부터 경찰의지휘하에 신례리, 하예리, 상효리 전 주민이 동원돼 피눈물로 주둔소 성을 쌓았다.

이 주둔소는 그때까지 한라산에 남아 있던 잔여 무장대를 토벌하기 위한 전진기지로 이용됐다. 당시 토벌대가 주둔한 석성의 원형이 그대로 잘 남아 있다. 들판의 모든 먹을 것과 가옥을 철거해 적에게 양식과 거처의 편의를 주지 않으면서 성벽을 지켜내는 소위 견벽청야(堅壁淸野)의 토벌작전이었던 것이다.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에 있는 제주 4·3사건 관련 유적인 수악 주둔소. 제주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에 있는 제주 4·3사건 관련 유적인 수악 주둔소.

주둔소는 내성과 외성으로 견고히 쌓았으며, 외성은 보초와 전투의 편의를 위해 회곽도를 갖추고 있다. 회곽도의 바깥쪽 높이는 3.5m가량이며, 내벽 높이는 2m가량이다. 주둔소의 내부 면적은 대략 250평 정도이다. 주둔소가 구축된 이후 경찰 토벌대는 주민들을 특공대로 조직해 이 주둔소에 집결시킨 후 함께 토벌작전을 수행했다. 주둔소까지 물자를 나르는 일은 대부분 가까운 신례리 주민들이 맡아서 했다. 수용소 대장이 지원 명령을 내리면 음식에서 술까지도 바쳐야 했다. 신례리 주민들은 그 당시의 힘든 고통을 회상하며 고개를 흔든다.

주둔소의 정문 앞쪽에는 높이 6m 정도의 삼나무를 세워, 그 꼭대기에 주둔소 표시인 하얀 깃발을 달았다. 그들은 토벌 과정에서 사로잡은 무장대의 머리를 잘라 와서 나무 꼭대기에 걸었다가 며칠 후에 그 머리를 나무 밑에 묻었다고 한 증언자는 그때의 상황을 실감나게 들려준다. 수악 주둔소는 사람들의 출입이 없었던 까닭으로 거의 완벽한 형태로 남아 있다. 외성과 내성은 물론이고, 외성의 회곽도 등도 당시의 원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또한 주둔소 내부에는 건물이 있었던 곳과 건물에 난방을 했던 아궁이의 모습 등이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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