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0일 청와대를 방문한 김여정 특사는 ‘남북관계 개선 의지’를 담은 김정은 국무위원장의 친서와 함께 문재인 대통령 평양 초청 의사를 전달했다. 이에 대해 문 대통령은 “앞으로 여건을 만들어 성사시켜나가자”고 사실상 정상회담을 수락했다. 평창동계올림픽을 활용한 북한의 ‘김여정 특사’ 카드는 파격적이었고, 단숨에 정세를 변화시키는 효과를 가져왔다.
미국과 협의를 마친 문재인 대통령은 3월 5일 예상보다 빨리 정의용 청와대 국가안보실장을 단장으로 하는 대북특사단을 파견했다. 대북특사단을 만난 김정은 국무위원장은 비핵화 의지를 명확하게 밝혔고, 남과 북은 3월 말 남북 정상회담 개최, 정상 간 핫라인 설치 등 6개 항에 합의했다. 문재인 대통령의 지속적인 노력과 북측의 호응으로 남북 화해와 협력, 남북 정상회담으로 가는 기회의 창이 열리는 순간이었다.
속전속결로 남북 및 북·미 정상회담 합의
여기까지는 어느 정도 예상된 수순이었다. 그러나 4월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미국 국무장관의 방북 또는 북·미 간 특사 상호 교환이 이뤄질 것이라는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북한의 북·미 정상회담 제안을 전격적으로 수용했기 때문이다.
대북특사단의 북한 방문 결과를 설명하기 위해 미국을 방문한 정의용 실장과 서훈 국가정보원장은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에게 김정은 위원장의 특별 메시지를 전달했다. 김 위원장은 전례 없는 북·미 정상회담에 함께하면 두 정상이 ‘역사적인 돌파구(Historic Breakthrough)를 만들 수 있다’는 내용을 전했고, 공개되지 않은 특별 메시지에는 정상회담 성사를 위한 신뢰 구축의 일환으로 매우 포괄적인 내용이 담겼다고 한다.
하고 즉석에서 정상회담 제안을 수용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이 약속을 지킬 것이라고 믿는다”고도 했다. 북한이 제시한 핵 실험과 미사일 발사 중단, 비핵화 회담 의지 표명에 일단 신뢰를 보낸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 간 접촉뿐만 아니라 북·미 간에도 상당한 물밑 접촉이 있었던 것이다.
남북 정상회담에 이어 북·미 정상회담이 전격 합의되면서 북·미 대화가 정상 차원에서 이뤄지게 됐다. 과거처럼 실무라인 협의부터 진행하는 방식에서 탈피해 정상회담을 통해 큰 틀의 합의부터 하자는 것이다.
미국의 제한적 대북 예방공격 검토 등 한반도 전쟁위기설이 나돌던 지난해 말만 해도 상상할 수 없던 흐름이다. 신년사에서 9월의 ‘대경사’를 위한 ‘평화적 환경’ 조성을 언급한 북한이 예상보다 전향적으로, 속전속결로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임기 1년 안에 남북대화에 성과를 내겠다는 문재인 정부의 의지, 올해 중간선거를 앞두고 외교 성과가 필요한 트럼프 행정부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이기도 하다.
일반적인 예측을 벗어나 김정은 위원장은 왜 비핵화 의지를 표방하며 ‘정상외교’에 나선 것일까. 2012년 김정은 체제가 공식 출범하면서 북한은 김일성 시대를 기준점으로 삼아 노동당과 국가 기구의 운영, 당·군 관계, 대외노선 등을 재정비했다. 신년사 직접 발표, ‘집단적 협의구조’의 복원 등 김일성 시대를 모델로 한 내부 체제 정비 과정은 2016년 5월 노동당 7차대회 개최를 통해 기본적으로 완료되었다.
특히 노동당 7차대회와 2017년 10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거치면서 김정은 시대를 대표하는 신진 엘리트들의 목소리가 커졌다. 이들은 아직까지 전면에 나서지 않고 있지만 실력과 국제 감각을 갖춘 중견 간부들로 김정은 위원장을 보좌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북한의 ‘전략국가론’과 비핵화 회담 수용
북한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말과 올해 신년사에서 두 차례 ‘전략국가’의 지위를 언급했다.
북한은 내부 시스템을 안착시키면서 ‘평화적 환경’ 조성과 대외관계 개선 쪽으로 눈을 돌리기 시작했다. 2016년 7월 6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대변인 성명’을 통해 비핵화의 5가지 조건을 제시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북한은 이미 2014년 하반기에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외교’에 관한 구상을 세운 바 있다. 이 구상은 대내·대외적 여러 요인으로 유보됐지만 지금은 정세가 또 변했다. ‘김여정 특사’ 파견이 이를 잘 보여준다. 김여정 특사가 남북관계에 돌파구를 열었다면 이제 미국 주도의 대북제재를 돌파하는 데 김정은 위원장이 나설 차례가 됐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은 위원장을 만나고 온 대북특사단도 “기본적으론 김 위원장이 자기가 구상하고 있는 장기 계획을 가지고 있었던 것 같다. 한국, 미국과 현재 걸려 있는 걸림돌이 되는 모든 현안, 즉 핵과 미사일, 평화체제 문제에 대해 금년 안에 큰 가닥을 잡겠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었다”라고 평가했다.
김정은 위원장이 적극적인 ‘평화 공세’와 함께 정상외교에 나서는 내부 논리는 ‘전략국가론’이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말과 올해 신년사에서 두 차례 ‘전략국가’의 지위를 언급했다. 2014년의 ‘정상외교’ 구상을 다시 추진하려는 복선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지난해 12월 21일 세포위원장대회 개막사에서 “미국에 실제적인 핵 위협을 가할 수 있는 전략국가로 급부상한 우리 공화국의 실체를 이 세상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게 됐다”고 주장했다. 미국을 핵으로 위협할 수 있는 전략국가로서 미국과 대등한 위치에서 협상을 할 수 있는 지위가 확보됐다는 의미다. 이보다 앞선 11월 북한은 ‘핵무력 완성’을 선언한 바 있다. 핵보유국이라는 지위에서 공세적으로 ‘대화 국면’에 나설 수 있는 내부 논리가 완성된 것이다.
북한의 매체들은 “조성된 주객관적 조건들과 정세 전망에 대해 종합 분석하고 당중앙위원회 제7기 제2차 전원회의에서 거창하고도 섬세한 방략과 독창적인 전략전술적 방침들을 내놓았다”고 선전했다. 이때 ‘핵무력 완성 선언’과 ‘전략국가론’이 결정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전략국가론에 입각한 김정은 위원장의 정상외교 구상은 3월 5일 남측 지역인 판문점 평화의집에서 4월 말 남북 정상회담을 열기로 결정되는 순간 실행에 옮겨지기 시작했다.
“비핵화 회담은 없다”던 북한은 ‘핵 무력 완성’을 선언한 직후 국면 전환을 모색하기 시작해 한국과 미국에 궁극적인 비핵화 목표를 명백히 밝혔다. 미국을 겨냥한 핵·미사일 능력을 확보한 뒤, 대외 환경 안정을 토대로 경제 발전에 자원을 집중하겠다는 구상이다. 북한의 논리대로라면 ‘경제와 핵무력 건설 병진노선’을 추진하면서 핵무력이 완성된 만큼 이제 경제 발전을 위한 ‘평화적 환경’ 조성에 나설 시점이라는 것이다.
북, 미국과 관계 정상화·한반도 평화체제 구축 노려
이용호 북한 외무상 (가운데)이 3월 16일 (현지시간) 스웨덴 스톡홀름 중심부에 있는 스웨덴 정부 건물에서 나와 차를 타고 있다.
이 외무상은 스웨덴 측과 북한에 억류된 미국인 3명의 처우 문제 등을 논의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외신들은 보도했다.
남북, 북·미 정상회담 합의로 한반도 정세는 긍정적인 측면에서 엄청난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있다. 4월과 5월 한반도에서는 한반도 운전자론에 입각한 문재인 정부의 ‘한반도 평화구상’, 트럼프 행정부의 ‘최고의 압박과 개입’을 골자로 하는 대북정책, 전략국가론에 입각한 북한의 ‘포괄적 세계전략’이 부딪히는 정상외교의 장이 펼쳐지는 셈이다.
문재인 정부는 남북 정상회담 준비위원회를 출범시켜 정상회담을 준비하면서 미국, 중국, 일본과 정상회담을 통해 공조 다지기에 들어갔다. 트럼프 대통령은 새롭게 외교라인을 구축하고 있다. 북한도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상무조(태스크포스팀)를 조직해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 대비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우선 억류 중인 한국계 미국인 3명 석방, 미군 유해 발굴사업 재개 등 북·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양국 간 신뢰 구축에 필요한 사안에 대해 협의해나갈 것으로 예상된다. 이를 통해 북한은 국제사회의 대북제재 완화, 북·미 간 특사 교환 등을 모색할 것이다.
또한 북한은 남북, 북·미 정상회담에서 한국과 미국이 정상회담 의제로 비핵화 문제를 집중 거론할 것에 대비해 미국의 대북 적대시정책의 폐기, 즉 북·미관계 정상화와 평화협정 체결에 역량을 집중할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는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유리한 국제 환경 조성을 위해 중국, 러시아와의 협력관계에도 신경을 쓸 것이다. 이미 김정은 위원장이 정상외교로 전면에 나서는 것이 결정됐기 때문에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정상회담도 추진할 가능성이 크다. 일본의 아베 총리도 만날 수 있다.
현재로선 전초전 격인 4월 남북 정상회담이 성공적으로 개최되고 5월 북·미 정상회담으로 순조롭게 이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북한은 이를 활용해 정전협정 체결 65년 만에 한반도 비핵화 협상, 북·미 및 북·일관계 정상화와 평화협정을 위한 입구에 들어서려고 하고 있다. 출구로 나가기 위해서는 많은 단계와 국면을 거쳐 최대 난제인 검증과 보장 문제가 타결돼야 하겠지만, 남이나 북이나 한 번은 거쳐야 할 과정이고 장기적으로 풀어나가야 할 숙제이다.
동아시아평화회의 운영위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