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은 탁 트인 자연환경 전체를 배경으로 삼은 퍼포먼스가 일품이었다. 짙은 어둠이 드리워진 하늘에 흰색의 오륜기가 떠오르고, 검은 실루엣의 산허리를 배경으로 고구려 벽화의 인면조가 되살아났다. 한국 문화의 멋과 첨단 기술의 조합을 보여준 종합예술이었다. 깔끔한 운영으로 나라 안팎의 좋은 평도 받았고 국민적 호응도 대단했다.
하계, 동계올림픽을 비롯한 스포츠 메가 이벤트를 모두 치른 국가의 국민답게, 메달의 숫자나 국가의 순위에 집착하지 않고 설원과 빙판 위에서 펼쳐지는 기량과 페어플레이의 역동성을 즐기는 모습이 두드러졌다.
김연아 같은 걸출한 스타가 아니어도 한 우물을 성실하게 파온 대표선수들이 땀을 흘리고 메달을 목에 거는 순간에 박수를 아끼지 않았다. 스켈레톤의 윤성빈, 스노보드의 이상호, ‘영미야’로 기억될 여자 컬링 대표팀 등 기억에 남는 순간들이 적지 않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 개막식에서 합동 공연을 펼치고 있는 남북 태권도 시범단.
동계올림픽의 감동은 패럴림픽으로도 고스란히 이어졌다. 불편한 장애와 차별의 시선을 극복하고 불굴의 투지를 보여준 선수들의 경기는 또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다.
3월 16일 한국 아이스하키팀이 혼신의 열정으로 동메달을 따내는 모습을 화면에서 보고 곧 이어 신의현이 크로스컨트리에서 한국 패럴림픽 사상 처음으로 금메달을 차지한 소식을 들었을 때의 감동은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 그런데 관련된 인생 스토리가 더욱 가슴에 울림을 주었다. 신의현의 아내 김희선 씨는 베트남에서 한국으로 시집온 여성이고, 아이스하키팀의 최광혁은 북한에서 이주해온 탈북민이었다. 이들은 모두 어려운 과정을 거쳐 한국 사회의 구성원이 됐고, 장애와 편견의 이중고를 온몸으로 이겨내 오늘을 맞이한 영웅들이었다. 모든 점에서 평창동계올림픽은 앞으로 2020년 도쿄하계올림픽, 2022년 베이징동계올림픽으로 이어지는 동북아시아의 협력과 스포츠 유대에도 큰 힘이 될 것으로 여겨진다.
‘평창 이후’ 우려 불식
여기에 더해 평창올림픽은 평화올림픽으로서 기대 이상의 성과를 거두었다. 북한이 신년사에서 올림픽 참가를 선언한 이후 짧은 시간에 남북 선수단의 공동 입장, 여자 아이스하키 단일팀 구성, 북한 응원단 방남, 마식령스키장 훈련과 북한 예술단의 공연 등이 합의됐다.
금강산에서의 공동 문화행사가 행사 직전에 취소됐고, 일방적인 단일팀 구성 합의에 대한 비판 여론이 부각되는 등의 문제도 없지 않았지만, 전반적으로 남북관계의 개선에 중대한 계기가 됐다. 강릉과 서울에서 열린 북한 예술단 공연, 한반도기를 들고 남북 선수들이 함께 입장하는 모습에 많은 관심이 주어진 것에서도 남북 간에 화해와 신뢰의 자산이 여전히 강하다는 점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개막식에서 문재인 대통령과 함께 펜스 미 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 북한의 김영남 상임위원장과 김여정 특사가 같은 공간에 자리한 장면은 상상조차 하기 어려운 장면이었다. 토마스 바흐 국제올림픽 위원장은 자신도 분단국가의 선수로 뛴 적이 있어서 더욱 감격스러웠다며 평창에서의 남북 화합을 높이 평가했다. 한반도 긴장이 높아져서 평창올림픽의 평화로운 마무리가 가능할지를 염려하던 2017년 중반의 분위기를 생각할 때 평창올림픽이 ‘평화올림픽’으로 얻어낸 성과는 참으로 큰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올림픽이 스포츠 행사로만 끝났다면 ‘평창 이후’의 불안정한 상황에 다시 마음을 졸여야 했을지 모른다. 연기된 한미 연합 군사훈련의 재개에 따른 북한의 반발과 갈등이 예상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평창에서 시작된 평화외교가 빠른 속도로 또 남북과 북·미, 한미를 포괄하는 차원으로 진행되면서 기존의 우려를 상당 부분 불식시켰다.
김정은 노동당 위원장과 대북특사단이 3월 5일 저녁 평양 노동당 본관에서 만찬을 하고 있다.
정의용 청와대 안보실장을 대표로 한 대북특사단은 평양에서 김정은 위원장을 면담하고 돌아온 후 6개 항을 발표했는데 3차 남북 정상회담 개최 합의, 정상 간 핫라인 설치, 비핵화 의지 및 북·미 대화 의사 표명 등이 담겨 있었다. 뒤이어 미국을 방문한 특사단은 북한의 비핵화 의사와 북·미 대화 의향을 전했고, 트럼프 대통령의 적극적 수락 의사 표명으로 5월까지 북·미 정상회담이 개최될 것임이 발표됐다.
한반도 문제와 관련해 급속도로 전개되는 새로운 상황에 중국도, 일본도, 러시아도 모두 깊은 관심을 보이고 한국의 주도적인 역할을 예의주시하고 있다. 기대만큼이나 우려도 있고 넘어야 할 산이 많지만 2018년 상반기는 평양과 워싱턴, 서울을 무대로 한반도 문제를 둘러싼 세계적 차원의 복합 게임이 벌어질 것으로 보인다.
비핵화와 평화체제가 주된 의제
올림픽이 제공해준 절호의 기회를 살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서 3차 남북 정상회담을 갖기로 한 것은 큰 진전이다. 또한 한국의 특사를 통해 북한이 비핵화 의지와 북·미 대화 의사를 표명함으로써 북·미 정상회담이 가능해진 것은 한국의 주도적인 역할 확보란 측면에서 매우 주목할 변화다. 아직 의제가 구체화되지 않았고 여러 가지 불확실한 변수들이 남아 있지만 비핵화와 평화체제를 포괄하는 중요한 대화 국면이 열릴 가능성이 커졌다.
제한된 의제에 대한 실무적 차원의 대화가 아니라 정상 차원에서 톱다운(Top-down) 방식으로 대화가 이뤄질 예정이어서 기대와 염려가 함께 커지고 있다. 현재로서는 ‘비핵화할 수 있다’는 김정은의 의사 표명이 얼마나 진정성이 있는지, 어떤 방식으로 실현하고 검증할 것인지, 미국의 대응전략은 어떠할지 등 확인해야 할 사안들이 적지 않다. 한미 간의 실무적 협조나 정책적 공조가 얼마나 잘 이뤄질지도 관건이다. 과거의 실패 경험이 적지 않은 만큼 제네바 합의의 실패 기억을 떠올리는 사람도 적지 않지만, 정말 획기적인 전환의 계기가 될 가능성도 있기 때문에 우리로서는 유리 그릇을 다루는 성실함으로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현재의 국면을 만들어내는 데는 한반도 문제의 운전자로서 북·미 간에 정직한 중개자 역할을 자임한 문재인 대통령의 기여가 크다. 비핵화의 목표를 견지하면서 포괄적으로 문제 해결을 도모하는 큰 전환의 흐름에서 북·미 대화를 한국이 견인해내고 그 전후 과정에서 미국과의 긴밀한 공조가 이뤄지고 있는 것은 매우 다행스럽다.
남·북·미 3자의 논의 틀이 만들어진 것 자체가 민족 공조와 한미동맹의 갈등을 넘어설 수 있고 지나친 중국 의존의 틀에서도 벗어날 수 있는 중요하고도 새로운 진전이다. 북·미관계와 한미관계, 그리고 남북관계는 한편의 변화가 다른 한 축에 심대한 영향을 미치는 구조적인 관계다. 이번 남북 정상회담에서도 남북 경협이나 사회·문화 교류와 같은 사안보다 비핵화와 평화체제가 주된 의제가 될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바, 기본적으로 북·미 정상회담과의 연계를 염두에 둔 것으로 생각된다. 전통적으로 평화 의제에 있어서는 북·미 간의 합의를 더 중시해온 북한이 남북·미 대화채널 속에서 중대한 사안을 논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비핵화와 평화체제의 여러 쟁점들이 남북관계와 북·미관계 전반과 깊이 연결돼 있는 만큼 한국 정부로서는 이 두 차원 모두를 깊이 생각하고 중개자의 역할과 당사자의 역할, 촉진자로서의 역할을 동시적으로 수행하는 복합적인 외교 역량을 발휘해야 한다. 현재 한미 회담과 북·미 회담이 각기 별개로 예정돼 있는 상태에서 양자 간의 의제 연결성과 차별성을 확보하고, 그러면서도 남북관계가 당사자로서 주도할 동력을 강화시켜갈 지혜를 모으는 것이 대단히 중요할 것이다.
정상회담을 남북 화해와 신뢰의 동력으로
남북 간에는 화해와 평화를 위해 그동안 합의하고 약속한 여러 조치들이 있다. 특히 1991년의 남북 기본합의서는 남북 화해, 불가침, 교류협력의 주요 내용이 포괄적으로 포함돼 있고 한반도의 평화 공존을 위한 기구들도 규정돼 있다. 두 차례의 정상회담에서 마련된 합의에도 남북 간의 평화와 변영을 도모할 여러 방안들이 담겨 있다. 새로운 틀, 새로운 성과를 얻는 것 못지않게 기존의 합의와 교류협력의 경험을 다시금 복원하면서 약화된 남북관계의 동력을 되살리는 것도 중요하다.
4월 남북 정상회담이 개최될 판문점 평화의집.
문재인 대통령은 즉각적이고 인위적인 통일을 추구하지 않을 것이며,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와 공동 번영을 대북정책의 목표로 설정할 것임을 밝혔다. 이러한 정책 조정이 북한으로 하여금 지금과 같은 전향적 태도를 취할 공간을 마련해주었을 것이다. 이제 본격적으로 한반도 평화를 구축하는 실천 국면에 들어서게 되면 고려해야 할 다양한 쟁점과 복합적인 상황들이 고려되지 않을 수 없다.
군사적 긴장 완화라는 초보적 차원을 넘어 6·25전쟁의 실질적인 종식과 평화체제로의 전환이라는 과제로 진행하는 과정에는 경제적이고 사회·문화적인 교류협력도 필수적이다. 민간 부문의 자발성과 상호 신뢰 형성이 없이 정치·군사적 조치만으로 한반도 평화가 마련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향후 한반도 평화의 세밀한 로드맵을 준비하고, 그것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전반에서 진행될 다차원적 실행 과제로 이어져야 할 것이다.
2018년에는 자연의 봄소식과 함께 한반도 정치시계에도 봄이 올지 모른다는 기대감을 갖게 한다. 한순간에 쾌도난마처럼 문제가 해결될 수는 없겠지만 문제를 해결하는 집합적 의지, 구체적 기획, 이를 이끌어갈 동력이 마련되고 있는 것이 긍정적인 예감을 더한다. 과잉 기대로 들떠서는 안 되지만 그렇다고 냉소적인 태도로 새로운 기회를 흘려보내서도 안 될 것이다. 성공적인 정상회담을 통해 남북 사이에 화해와 신뢰의 동력이 회복되고, 이를 바탕으로 한반도에 평화의 질서가 구축되는 뜻깊은 전환의 국면이 조만간 펼쳐질 것을 기대한다.

서울대 교수·사회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