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은 국제 스포츠 행사이지만 영향은 스포츠에서 끝나지 않는다. 올림픽을 통해 국가 위상도 높아지고, 경제 활성화에도 긍정적인 영향을 미쳐 국민적 자부심도 높아진다.
대한민국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통해 전쟁이나 시위로 각인됐던 부정적인 국가 이미지를 씻어낼 수 있었다. 2002 한일월드컵을 통해 역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인 가치, 무한한 잠재력을 상징하는 ‘다이내믹 코리아(Dynamic Korea)’의 국가 이미지를 만들었다. 그리고 2018 평창동계올림픽을 통해 ‘피스 코리아(Peace Korea)’의 브랜드를 만들어가고 있다. 두 번의 올림픽은 대한민국의 발전과 평화를 위한 주춧돌이 된 것은 물론 평화올림픽을 넘어 한반도 평화,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국가로서 새로운 도전에 나서고 있다.
1988 서울올림픽 이후 30년 만에 열린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전쟁 위기 속에서 기적처럼 찾아온 역사의 기회였다. 우리의 문제였지만 한반도 문제는 국제 질서, 국제사회의 움직임에 더욱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이 당연하게 여겨졌다. 하지만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한반도에서도 평화를 기대할 수 있게 됐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게 있기는 할까?’ 하는 마음으로 내려놓았던 자신감도 생겼다. 힘들고 어렵고 복잡하지만 한반도 평화를 위해 나아가야 할 길에 들어선 것이다.
1988 서울올림픽과 해금
기억을 돌이켜보면 30년 전 서울올림픽에서도 동서 진영의 화해를 알리는 세계 평화의 무대가 펼쳐졌다. 1988년의 서울올림픽 이전에 개최된 두 번의 올림픽은 반쪽으로 진행됐다. 1980년 모스크바올림픽에서는 미국을 비롯한 서방세계 64개국이 출전을 거부하거나 개인 자격의 선수만 참가했다. 1979년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에 대한 반발이었다. 1984년에 치러진 LA올림픽에서는 대회 직전에 구소련과 동구권 사회주의 국가들이 전격 불참을 선언하면서 역시 반쪽으로 치러졌다.
그렇게 맞이한 1988년의 서울올림픽에서는 사회주의 종주국인 구소련과 중국을 포함해 역대 최다인 160개국에서 출전하면서 화해의 올림픽으로 진행됐다. 이념 대결로 얼룩졌던 지구촌 국가들이 분단의 땅 대한민국에서 한자리에 모인 것이다. 그렇게 서울올림픽은 분단된 땅에서 치러낸 지구촌 평화의 축제였다.
올림픽 개최는 우리 국민들에게 엄청난 자부심과 자신감을 심어주었다. 사회적으로도 의미 있는 조치가 취해졌다. 1988년에 취해진 월북작가, 예술가에 대한 해금 조치와 1989년의 해외여행 전면 자유화 조치였다.
1988년 3월 31일 납북시인인 정지용, 김기림에 대한 해금 조치에 이어 7월 19일 월북 혹은 납북했다는 이유로 금지됐던 120여 명의 작가에 대해 해금 조치를 취했다. 이기영, 한설야, 임화, 김남천, 백석, 이용악, 오장환, 박팔양, 박세영, 박태원, 이태준, 홍명희, 안함광, 안막, 한효, 송영, 윤기정 등 대한민국 근현대사의 큰 족적을 남긴 문인들이었다.
북한 노동신문은 2월 13일 김정은 위원장이 남한을 방문하고 평양에 귀환한 김여정 당 중앙위 제1부부장 등 고위급대표단, 현송월 단장 등 삼지연관현악단과 기념사진을 각각 찍었다며 관련 기사와 사진을 1면에 나란히 게재했다.
의도치 않게 월북작가로 낙인찍힌 경우도 있었다. 시인 백석은 평안북도 정주(定州) 출신의 문인으로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하면서 작품 활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결혼 실패와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방황하다 광복을 맞이하면서 고향으로 돌아갔다. 정주(定住)를 위해 고향인 정주로 갔다가 북한 체제에 살게 된 것이다. 백석은 북한 체제하에서 몇 편의 작품을 쓰기도 했지만 사회주의 이념과는 거리가 먼 작가였다. 사회주의 문학을 거부하다 양강도 삼수군의 협동농장에서 양치기로 일생을 마쳤다. 이들의 작품까지도 이념의 틀 안에서 해석했고, 월북작가라는 낙인을 찍었던 것이었다.
1988년 10월에는 월북·납북 음악가 63명의 작품에 대한 규제도 풀었다. 월북작가, 예술가에 대한 해금 조치가 있기 전까지 월북했다는 이유로 혹은 북한에 있었다는 이유로 문학과 예술에 대한 평가를 막았던 것이었다. 1988년의 해금 조치를 통해 문학사와 예술사는 온전히 복원될 수 있었고, 다양한 연구가 가능해졌다.
2018 평창동계올림픽은 대회 이전까지만 해도 상당한 우려 속에서 준비작업이 진행됐다. 국내외의 정치적 상황이 좋지 않았고, 올림픽에 대한 회의적 시각도 상당했다. 올림픽을 주관하는 국제올림픽위원회(IOC)에서도 국제사회의 무관심과 엄청난 적자를 고민할 정도였다. 하지만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르기 위한 정부의 적극적인 노력과 국민적인 참여가 여느 올림픽대회보다 더 성공적인 대회로 이끌었다.
삼지연관현악단의 공연과 남한 가요
한반도의 불안한 정세를 우려하면서, 불참 가능성까지 내비쳤던 일부 국가에서는 북한의 참가 선언으로 안전에 대한 우려를 씻어낼 수 있었다. 나아가 남북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면서 스포츠가 평화를 가져올 수 있음을 체감하기도 했다. 평화올림픽의 분위기를 살린 행사의 하나는 삼지연관현악단의 공연이었다. 2018년 2월 8일 강릉 공연은 2002년 8월 서울에서 열린 8·15 민족통일대회 이후 16년 만에 이뤄진 방남 공연으로 향후 남북관계에 대한 상당한 기대를 갖게 했다.
공연 내용은 더욱 놀라웠다. 2월 8일 강릉 공연과 2월 11일 서울 공연에서 레퍼토리의 중심은 클래식과 남한 가요였다. ‘친근한 선율’이라는 제목이 붙은 클래식 연주에는 익숙한 클래식과 세계민요 25곡이 연주됐다. 남한 가요는 ‘J에게’를 비롯해 11곡의 남한 가요를 연주와 노래로 무대에 올렸다. 북한 가수가 공식 무대에서 남한 가요를 노래한 것은 처음이었다.
강릉과 서울에서의 공연보다 놀라운 것은 삼지연관현악단의 귀환 공연이었다. 올림픽 축하 공연을 마친 삼지연관현악단은 2월 16일 평양 만수대예술극장에서 귀환 공연을 가졌다. 북한 언론은 “출연자들은 관현악 ‘친근한 선율’에서 ‘아리랑’을 비롯한 세계 명곡들을 손색없이 연주하였으며 남녘 인민들 속에 깊은 인상을 남긴 여러 곡의 남조선 노래들도 무대에 올렸다”고 보도했다.
최용해를 비롯한 당중앙위원회 간부들과 예술 부문 일꾼들, 창작가, 예술인들이 관람하는 공식 무대에서 여러 곡의 남한 가요가 불린 것이다. 연주곡 선정은 아무렇게나 할 수 없다. 중앙당 간부들이 참가한 공연에서 남한 가요를 불렀다는 것은 문화적인 해금 조치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한의 공식 대표단이 공연했으니, 제한적이기는 하겠지만 공연된 남한 노래는 불려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다.
북한 체제의 특성상 남한 가요에 대해 공식적으로 명시적인 조치를 취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공식 무대에서 공연하게 되면 다른 공연에서도 무대에 올릴 수 있다. 비슷한 사례가 있다. 모란봉악단 창단 공연이다. 모란봉악단은 2012년 7월 6일 평양 만수대예술극장에서 ‘시범 공연’을 통해 첫선을 보였다. 북한 예술단의 공연으로는 보기 드문 무대였다. 짧은 치마와 화려한 무대 장식, 레이저 조명으로 무대를 꾸몄고 미국 영화 ‘록키’의 주제가와 ‘마이 웨이’를 비롯해 세계 명작 애니메이션 주제가가 연주됐다. 디즈니의 애니메이션인 미키마우스, 백설공주, 곰돌이 푸우 인형들이 무대를 누볐다. 이후 외국 민요와 애니메이션 주제가 연주는 순회 공연의 레퍼토리의 하나가 되었다. 1988 서울올림픽을 통해 남한에서 월북작가, 예술인들이 해금됐다면 2018 평창올림픽을 계기로 북한에서 남한 가요에 대한 제한적이나마 해금 조치가 내려진 것이다.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한을 방문해 공연했던 삼지연관현악단이 2월 16일 평양 만수대예술극장에서 귀환 공연을 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2월 17일 보도했다.
평창동계올림픽 이후 남북관계가 급물살을 타면서 남한 예술단의 북한 공연이 결정됐다. 남한 예술단의 수석대표는 대중가요 작곡가이자 가수인 윤상이 맡았다. 남북 사이에 이뤄지는 실무회담에서 대중음악인이 대표로 나선 것이다. 예술단 방북 공연은 1회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북한 주민들에게 이제 남한 노래는 비법적인 노래가 아니라 무대에서 들었던 노래로 다가올 것이다. 그렇게 조금씩 ‘봄날의 눈석이(눈석임의 북한어·쌓인 눈이 속으로 녹아 스러짐)’를 하고 있다.
닻줄을 풀고 평화의 바다로
‘해금(解禁)’. 금지되었던 것을 푼다는 의미이다. 한반도의 분단 체제는 많은 것을 금기시했다. 정치적인 문제뿐만이 아니었다. 미풍양속, 부작용을 이유로 두발과 복장 등을 규제하고 야간 통행까지 금지했다. 신체와 행동에 대한 통제는 사유와 인식에 대한 가장 간단하면서도 억압적인 통제 수단이었다.
1982년 1월 위험하다며 금지했던 야간 통행금지가 풀린 서울의 밤거리는 세계인들이 가장 놀라는 것 중의 하나가 됐다. 1988년에 ‘경범죄처벌법’을 개정하면서 ‘장발 및 저속의상’을 경범죄에서 제외했다. 장발과 복장에 대한 국가 통제를 풀고, 자율적인 선택으로 한 것이다. 오늘날 세계인이 열광하는 한류도 이런 해금을 통해 단초를 마련했다. 1989년에는 해외여행의 전면적 자유화가 단행됐다. 해외여행 자유화 조치를 통해 대한민국의 울타리를 넘어 세계 속에서 대한민국을 바라볼 수 있게 됐다.
조선 중기의 문인이자 정치가인 송강 정철은 ‘관동별곡(關東別曲)’에서 ‘고주해람(孤舟解纜)하야 정자(亭子) 위에 올라가니 강문교(江門橋) 너믄 곁에 대양(大洋)이 거기로다(묶였던 배의 닻줄을 풀고 정자에 올랐더니 강문 옆에 큰 바다가 있구나)’라고 노래했다. 2018년 평창동계올림픽을 계기로 남북은 한반도 분단의 닻줄을 풀고 평화의 바다로 나아가야 할 때가 됐다.
건국대학교 HK연구교수